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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타케다 가문의 유산을 둘러싸고 (2)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55호(2002년 10월호) 52~67쪽의 기사인,《타케다 유령 쟁탈전武田遺領爭奪戰 ~ 카이ㆍ시나노 획득에 담긴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천하를 향한 포석 ~》을 번역한 것으로 후쿠다 마코토福田誠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1582년 3월에 타케다 가문이 멸망하고, 그로부터 고작 3개월 후에 혼노사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횡사하면서, 사실상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카이ㆍ시나노 두 지방을 둘러싸고 벌어진 토쿠가와ㆍ호죠ㆍ우에스기의 3파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혼노사의 변과 이에야스의 카이 지방 공작

  우에스기 가문이 제 2의 다케다가 될 운명이 임박하고 있던 시기,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梅雪를 데리고 아즈치 성安土城을 찾아가, 영지를 보장하는 문서所領安堵の御札와 마주했다. 5월 20일에 이에야스는 아즈치 성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향응을 받은 후 입경上洛, 노부나가의 권유를 따라 사카이堺를 유람하던 6월 2일에 혼노사의 변本能寺の変이 급작스럽게 터졌다. 이에야스가 거느린 자는 10여 명에 불과했는데, 외유하러 나온 땅에서 예상하지도 못했던 위기에 빠진 격이었다.

《신센타이코키》노부나가 미츠히데 구타 삽화
(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本能寺の変')


  그날 당일 변사를 알게 된 이에야스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곧장 사카이에서 도망쳤다. 일행은 이가伊賀 지방을 지나 이세지伊勢路를 거쳐 시라코白子에서 승선, 바닷길海路을 통해 오카자키岡崎로 귀환했다. 이때가 6월 4일이었다. 그러나 이에야스와 동행하였던 아나야마 바이세츠는 개별행동을 취한 끝에 잇키 세력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에야스에게 암살당할 걸 경계하여 별개로 행동한 것이라 하나, 그 경계심은 오히려 재앙이 되고 말았다.

  위기를 모면한 이에야스는 즉각 군세를 일으켰다. "원수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한다" 는 명목을 걸었다.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되는 건 과연 누구인가' 하는 건, 이 시점에서는 아무리 이에야스라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이는 실질적으로 노부나가의 부하였던 이에야스가 그 충절을 오다 가문에 증명하는 보험임과 동시에, 다른 오다 가신들을 상대로 보여주어야만 하는 퍼포먼스적 행동이었다.

  카미가타(上方, 역주 : 교토, 오사카 일대) 출진을 결정한 이에야스는 한편으로 오다 영지인 카이甲斐ㆍ시나노信濃 지방에 공작의 포석을 차례대로 놓기 시작했다. 노부나가의 죽음으로 두 지방이 혼란에 빠지리란 것을 예측하고서 벌인 처치였다. 이 시점에선 칸토関東의 제장 그 누구도 혼노사의 변보를 알지 못했다.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난과 맞닥뜨린 이에야스였기에 누구보다도 빠른 대응책을 세우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혼토쿠사本徳寺에 전해지는 아케치 미츠히데초상화
(출처 : 한국 위키피디아 '아케치 미쓰히데' 항목)


  기실 이에야스의 본심은 카이ㆍ시나노 지방으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노부나가의 죽음으로 오다 가문織田家은 사실상 붕괴했다. 그렇게 된 이상 그 유산은 정복하는 자의 것이다. 그것이 전국시대의 룰戦国の掟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오다 가문의 본관인 오와리尾張ㆍ미노美濃 지방에 손을 대는 건 오히려 오다 잔당들을 결속시키고 그들을 적으로 돌릴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카이ㆍ시나노 지방은 3개월 전만 해도 타케다武田의 영지였기에 오다 잔당들 역시 '점령지 정책을 막 개시한 적지' 란 감각을 갖고 있었다. 반면 이에야스의 입장에선 이 두 지방은 다양한 면에서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을 강력하게 만들어주었던 온갖 노하우가 남겨진 곳이었다. 비밀리에 인재 확보까지 시도했을 정도로 관심이 있었던 만큼, 이 호기好機를 놓칠 수 없었다. 

  혼노사의 변으로 노부나가 / 노부타다信忠가 죽은 건 천하통일天下統一을 향해 가던 오다 가문이 붕괴했고, 그 지휘중핵이 소멸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오즈 성 공격 등에서 보여준 오다 가신단의 연대와 결속은 노부나가의 존재 하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노부타다까지 죽은 이상 후계자도 부재한 상태. 가신단이 극도의 혼란에 빠지리란 건 확실했다.

  노부나가에 필적할 만한 후계자는 이제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시대가 난세로 역행할 가능성은 높았다. 그렇다면 가능한 한 영지를 확대하여 다른 세력들에 견줄 만한 국력을 충실히 쌓는 게 바람직하다. 그것이야말로 난세를 살아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이에야스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체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에게도 천하天下를 탐할 기회가 찾아올 수 있다. 이에야스가 '천하' 라는 것을 의식하기 시작한 건 바로 이 시기가 아니었을까. 지금까지는 노부나가와의 동맹同盟을 유지하고 타케다 가문을 상태로 고전苦戰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그와 같은 걸 생각해 볼 여유도 없었을 터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토쿠가와 영지와 인접한 옛 타케다의 영지에는 유력한 세력도 없었으며, 유일하게 경계할 만한 존재는 스루가駿河 접경지대를 두고 인접해 있는 호죠 씨北条氏 뿐이었다.

바이세츠의 아들 아나야마 카츠치요초상화
(출처 : 한국 위키피디아 '아나야마 가쓰치요' 항목)


  6월 5일, 이에야스는 스루가 지방에 있던 오카베 마사츠나岡部正綱에게 "시모야마 성下山城으로 출향하라." 고 명령했다. 시모야마 성은 카이 코마 군巨摩郡에 있는, 아나야마 바이세츠가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본거지. 바이세츠의 조난사遭難死로 인해 무주지가 된 아나야마의 영지를 접수하여 이곳을 카이 진출의 교두보橋頭堡로 삼는 데 목적이 있었다. 영지 접수를 위임받은 마사츠나는 옛날 이마가와 가신今川家臣이었고, 이마가와 가문이 멸망한 후에는 타케다 가문의 스루가 사키카타슈駿河先方衆로서 활약한 무장으로, 에지리 성江尻城을 다스리고 있던 바이세츠의 가신들과 돈독한 친교를 맺고 있었기에 발탁된 것이었다.

  그리고 6월 6일, 이에야스는 혼다 노부토시本多信俊를 카이로 파견했다. 노부나가 밑의 무장이었던 카와지리 히데타카川尻秀隆에게 카미가타 정세를 알려주면서 그 상담역을 맡도록 한 것이다. 노부나가는 생전, 이에야스에게 히데타카를 후원해 줄 것을 의뢰한 바 있었다. 이에야스는 고인의 뜻에 따라 노부토시를 카이로 보낸 것이었다곤 하나, 그 내실은 히데타카를 감시監視하는 것이었다.

  히데타카는 노부나가의 충실한 능리能吏였으나 주인을 잃은 적지敵地를 통치할 수 있을 정도로 유능하진 못했다. 그 충성은 민중에 대한 압정으로 이어졌고,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소식이 카이에 알려지면 그 압정에 맞서 잇키가 발발할 공산이 컸다. 그 만일의 사태에 앞서 히데타카의 복속을 받는 것이 노부토시의 임무였다.

  이에야스가 코신甲信 양 지방에 둔 포석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對 타케다 전쟁 당시 스루가 타나카 성田中城에서 항복하여 엔슈 후타마타遠州二俣에 은둔하던 타케다의 옛 가신 요다 노부시게依田信蕃도 옛 영지인 시나노 사쿠 군佐久郡으로 파견하였다.

  타케다의 옛 영지로 보내진 오다 가신들이 노부나가의 죽음을 알게 되면, 이에야스와 마찬가지로 주군의 복수전을 명분으로 카미가타로 떠날 가능성이 높다는 건 당연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올 만한 세력은 노부나가에게 굴욕적인 처우를 받던 호죠 씨, 그리고 멸망 직전의 위기에 몰려 있던 우에스기 씨上杉氏였다. 이 둘 중 이에야스가 가장 경계한 건 스루가 지방을 통해 접경해 있으며, 마찬가지로 카이ㆍ시나노 진출을 도모하려 들 호죠 씨였다.

  칸토의 패자雄를 자부하는 호죠 씨는 분명 코즈케上野 지방 탈환에 나설 것이다. 그리고 그 후, 코즈케 지방에서 시나노로 들어가는 입구인 사쿠 군이 무주지無主地일 경우, 호죠 씨는 주저없이 이곳으로 진출하리라. 이와 동시에 그들이 카이 지방으로까지 병력을 보내면 이에야스는 두 곳에서 정면작전을 벌여야만 한다. 사쿠 군을 먼저 확보하여 호죠 씨의 시나노 진출을 견제할 목적으로 현지에 노부시게를 파견한 것이었다.

  노부시게에게는 또 하나의 지령이 내려졌다. 귀환길에 카이 지방에서 옛 인연이 있는 무사들을 설득해 이에야스에게 귀복시키라는 것이었다. 이는 시모야마에 파견된 오카베 마사츠나와 마찬가지로 카이 지방을 제압하는 데 필요한 중요 역할이었다. 이에야스는 타케다의 옛 신하들을 능란히 활용함으로써 싸움 없이 카이를 자기 영토에 포함시키려 했다. 그리고 타케다의 옛 신하들을 믿고 뒷공작에 사용하는 것 자체가 카이 지방에서 이에야스의 평판을 높이는 길이 될 터였다.
 

덧글

  • BigTrain 2019/09/04 14:53 # 답글

    이에야스가 천하인이 될 야망을 가지게 된 시점이 저 떄라는 건 설득력이 있네요. 카이 지역 이삭줍기 과정이 꽤나 체계적이기도 했고, 창작물에서 혼노지의 변 이후 이에야스의 귀환을 드라마틱하게 그리는 건 다 이유가 있었나봅니다. 저는 뭐 대전투도 아닌 여행을 저리 중요시하나 했는데...
  • 3인칭관찰자 2019/09/04 16:51 #

    노부나가의 죽음에 의해 이에야스는 생전 처음으로 독립된 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감회는 남달랐을 거라 생각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오다 노부나가에게 종속되어 있던 시기를 청산하고 드디어 쇠사슬에서 풀려난 데다, 이삭줍기가 가능한 곳이 두 지역이나 코앞에 펼쳐져 있었으니만큼 잘하면 천하도 먹을 수 있겠다는 꿈을 꾼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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