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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타케다 가문의 유산을 둘러싸고 (1)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55호(2002년 10월호) 52~67쪽의 기사인,《타케다 유령 쟁탈전武田遺領爭奪戰 ~ 카이ㆍ시나노 획득에 담긴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천하를 향한 포석 ~》을 번역한 것으로 후쿠다 마코토福田誠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1582년 3월에 타케다 가문이 멸망하고, 그로부터 고작 3개월 후에 혼노사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횡사하면서, 사실상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카이ㆍ시나노 두 지방을 둘러싸고 벌어진 토쿠가와ㆍ호죠ㆍ우에스기의 3파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 거성 줄이어 떨어지다 - 여러 세력으로 분열된 코신甲信 ]

  타케다 멸망 후의 칸토 정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타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 공격은 적자嫡子 노부타다信忠를 대장으로 삼아 텐쇼 10년(1582) 2월에 개시되었다. 카이甲斐ㆍ시나노信濃 토호들에게 버림받은 카츠요리는 코슈 타노田野에서 추적당한 끝에 자결하여, 정예精強함으로 칭송받았던 카이 겐지甲斐源氏의 명문 타케다 가문武田家은 공격이 시작된지 고작 1개월 만에 멸망해 사라졌다.

카이야마토 역 옆에 있는 카츠요리의 동상(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武田勝頼')


  타케다 멸망 후 신슈 스와諏訪에 도착한 오다 노부나가는 3월 29일, 타케다의 옛 영지 분배방침을 공개했다.《신쵸코우키》에 따르면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 카와지리 히데타카川尻秀隆

카이 지방(甲斐国, 아나아마 바이세츠의 영지는 제외)
시나노 지방 스와 군信濃国諏訪郡

●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스루가 지방駿河国

●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

코즈케 지방上野国
시나노 치이사카타 군小県郡 / 사쿠 군佐久郡

● 모리 나가요시森長可

시나노 타카이 군高井郡 / 미노치 군水内郡
사라시나 군更級郡 / 하니시나 군埴科郡

● 키소 요시마사木曽義昌

시나노 키소 군木曽郡 / 아즈미 군安曇郡
치쿠마 군筑摩郡

● 모리 히데요리毛利秀頼

시나노 이나 군伊那郡


  이들 외에도,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권유에 넘어가 오다 편으로 돌아선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梅雪는 선조父祖들로부터 물려받은 영지였던 카이 지방 야츠시로八代ㆍ코마巨摩 2군의 영유를 인정받았다. 노부나가는 코신의 '통치 방침' 을 정한 후 4월에 아즈치로 돌아가, 옛 타케다 영토의 통치는 이들 무장들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이에야스의 수인이 찍힌 종이(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徳川家康'


  별격別格적 대우를 받은 건 미카와 지방三河国의 토쿠가와 이에야스로, 노부나가와는 가장 깊은 동맹관계同盟関係에 있었다. 그 대우는 역연한 독립 다이묘独立大名 그 자체로 다른 무장들과는 분명 일선을 긋고 있었다 하나, 실질적으로는 노부나가 휘하의 대장급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對 타케다와의 전쟁에서 이에야스는 타케다의 친족집단親族衆에 속하는 아나야마 바이세츠를 배반시키는 데 성공, 타케다 가문이 붕괴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 공적을 높이 산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에게 스루가 지방을 주었다. 한편으로 이는 10년 동안 타케다 가문과 싸워온 이에야스의 노고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미카와 / 토오토우미에 이어 스루가 지방까지 손에 넣은 이에야스는 명실공히 "토카이도 제일의 지휘관海東一の弓取り" 이 되었으나, 이제 서쪽과 북쪽은 오다의 영지, 동쪽은 호죠北条의 영지와 접하게 되면서, 맹방盟邦에 둘러싸인 이제부턴 더 이상의 영지확대를 바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노부나가에게 순종恭順적인 자세를 관철하고 있던 이에야스에게 과연, 이 시점에선 야심野心이라는 게 있었을까?

  야심의 가능성이 느껴지는 건 노부나가가 코신의 옛 타케다 가신들을 용서없이 주멸해간 데 비해, 이에야스 쪽은 그들을 몰래 숨겨주면서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다는 점에 있다. 이세 나가시마伊勢長島 -> 에치젠越前 -> 카이로 이어지는 저항세력에 대한 노부나가의 처단은 가열苛烈의 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오다 가문의 영지가 확대되는 한편으로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 / 벳쇼 나가하루別所長治 /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 같이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도 속출하고 있었다. 모리 가문의 외교승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가 "노부나가는 언젠가 크게 한 번 자빠질 것" 이라 예언하였던 것처럼, 이에야스 역시 노부나가의 장래에 불안감을 느끼고 타케다의 옛 신하들을 가신으로 포섭함으로써, 혹시나 싶은 노부나가 사후의 가능성에 대비하려 했던지도 모른다.   

후대에 그려진 호죠 우지마사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北条氏政')


  칸토에 있던 또 다른 군웅인 사가미 지방相模国의 호죠 우지마사北条氏政 역시, 노부나가의 타케다 토벌에 손을 빌려주었다. 호죠 가문 당주 지위에는 5대째인 (호죠) 우지나오氏直가 앉아 있었으나, 4대째인 우지마사 역시 건재하여 실질적인 집정권執政権을 틀어쥐고 있었다. 교활한 우지마사는 오다 vs 타케다 양 가문의 싸움이 장기화될 것이라 내다보았던지 전쟁 초기 단계에선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오다 군은 이제까지의 우지마사로선 예상조차 하지 못한 스피드로 타케다 영지를 침공했다. 그 결과, 호죠 씨는 對 타케다 전쟁에 크게 지각하고 말았다.

  우지마사는 노부나가의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전후 타케다의 옛 영지를 한 뼘도 분배받지 못했다. 물론 우지마사도 불만이었겠지만, 아무리 쇠퇴기를 걷고 있다 해도 호죠 가문과 호각지세로 싸웠던 타케다 가문을 단 1개월만에 멸망시킨 오다 가문의 실력을 직접 목도한 상황에서, 노부나가에 대항하는 노선 같은 건 상상할 수가 없었으리라. 이후로도 노부나가의 심증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對 타케다 전쟁의 전승을 축하하는 등, 우지마사는 비굴卑屈하다 싶을 정도로 저자세를 보였다. 호죠 가문도 토쿠가와와 마찬가지로 타케다 멸망과 동시에 발전의 가능성이 닫혀버린 상황이었다.

우에스기 신사에 보관된 카게카츠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上杉景勝')


  또 하나의 유력 다이묘有力大名인 에치고 지방越後國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는 타케다 가문이 멸망한 후, 노부나가의 다음 표적標的이 되어 있었다. 에치고 변두리奥郡에서 모반을 일으킨 시바타 시게이에新発田重家와, 코즈케의 타키가와 카즈마스 / 카와나카지마川中島의 모리 나가요시 / 엣츄越中의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로부터 일제히 공격받게 된 카게카츠는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카게카츠도 멸망을 각오했던 듯, 5월 1일 자로 사타케 요시시게佐竹義重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런 심정을 엿볼 수 있다.

  모리 나가요시의 5천 군대가 시나노 - 에치고 접경지를 월경한 것이 5월 23일로, 타키가와 카즈마스의 군대도 미쿠니 고개三国峠를 넘어 에치고 우오누마 군魚沼郡에 침입했다. 이때 카케카츠는 오다 군에 포위되어 있던 우오즈 성魚津城을 구원하기 위해 엣츄 지방으로 출진한 상태였으나, 화급한 보고를 받은 카게카츠는 우오즈 성 구원을 단념하고 즉각 엣츄의 진채를 물렸다. 이 때가 5월 27일이었다.

  그로부터 2일 후인 5월 29일, 엣츄의 시바타 카츠이에는 구원군이 자취를 감춘 우오즈 성에 총공격을 개시했다. 멋드러질 정도의 연계라 할 만했다. 오다 세력이 3개 지방에 걸친 광역정면에서 효과적인 연대공격을 실시할 수 있었던 데는 노부나가의 지시가 있었으리란 건, 상상하기 어렵지가 않다. 우오즈 성이 함락된 건 혼노사의 변이 터진 다음 날, 즉 6월 3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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