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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백년》일본 측에서 나온 갑신정변 뒷이야기 역사



출처 :《日本の百年 2 - わき立つ民論》p. 338 ~ 341

  이 글은 위 책에 수록된 일본 내 자유민권세력의 '오사카 사건' 을 다룬【 조선에 걸어라 】편의 도입부분인 갑신정변 관련내용만을 번역한 글로,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그리 부각되지 않는 내용인 것 같아 옮겨 봤습니다. 1차 저작권자 분과 마찰이 생길 때는 삭제할 생각입니다만, 그래도 퍼가실 때에는 출처표기 부탁드립니다.


  - 일본에서 만개하던 정치의 계절은 바다 건너 한반도에도 불어오고 있었다. 1884년(메이지 17년) 12월 4일, 경성(京城, 지금의 서울)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청나라에 기대고 있던 사대당事大黨 정부를 일본에 의지하던 김옥균(金玉均, 1851~1894) 등의 독립당獨立黨이 습격, 하룻밤에 정권을 탈취하였다. 일본의【 타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 】공사는 1개 중대 병력을 동원하여 그들을 도왔다.

나가사키에서 촬영된 김옥균의 사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金玉均' 항목)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2천 병력을 인솔하여 쳐들어오면서 일본 측은 힘없이 패퇴했다. 공사관公使館은 불길에 휩싸였고 재류 일본인 30명이 살해당했으며 여인들은 능욕당했다. 독립당 정부는 3일도 버티지 못했고 타케조에 공사와 김옥균들은 목숨만 겨우 건져 일본으로 도망쳤다.

  일의 발단은 약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옥균은 기대를 걸고 있던 일본 정부가 대외 소극책을 펴는 데 실망하여 재야의 실력자【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 】와 만나, 조선 개혁을 위한 원조를 해 줄 것을 부탁했다. 호걸 고토는 가슴을 탕탕 치며 이를 떠맡았고, 이로서【 고토 - 김옥균 밀약 】이 성립되었다.

고토 쇼지로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後藤象二郎' 항목)


  고토의 계획이란 건 자금 100만 엔과 장사들의 군대를 가지고 그 땅으로 건너가, 사대당을 일거에 소탕하고 그 자신이 한국 정부의 재상宰相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100만 엔의 조달이 여의치 않아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근 1년이 지났고, 그 사이에 캄보디아 방면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 프랑스와 청나라의 관계가 험악해졌다. 여기에 착안한 고토는 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退助와 상담하여 자유당自由黨의 간부【 코바야시 쿠스오(小林樟雄, 1856~1920) 】를 통역通譯으로 앞세워 재일在日 프랑스 공사에 문의한 결과, 이야기는 순조롭게 진척되어 100만 엔 뿐만 아니라 군함 2척까지 빌려주기로 협의가 되었다.(역주 : 원문의 과장. 프랑스 공사는 자금과 군함 대여를 완곡히 거절했다. 단지, 공사의 사적 인맥을 통해 자금 출자자를 물색해줄 수는 있다고 함.) 한편으로 고토는, 건달俠客인【 아이즈노 코테츠会津の小鉄 】밑의 조직원들 7~8백 명을 동원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는 출발을 앞두고 바람이 불길 기다릴 뿐이었다. 의기양양해진 고토는 마침 입각入閣을 제의해 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자신의 비밀계획을 고스란히 털어놓고는, "천하의 영웅이라 하면 족하足下와 나 뿐이오. 족하는 능히 카보우르(역주 : 이탈리아의 통일 3걸 중 한 명. 정치가)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나는 가리발디(역주 : 이탈리아의 통일 3걸 중 한 명. 혁명가)가 될 수 있겠지." 라는 허세를 부렸다.

  '이토 카보우르' 는 당연히 마음 속으론 깜짝 놀랐으나, 그 역시 '천하의 영웅' 이다.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열심히 손뼉을 쳐 가며 고토에게 찬동한 후, 신속히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 외무경과 상의하여 극비리에 對 한국 적극책으로 선회키로 하고, 12월 4일의 쿠데타(갑신정변)가 일어나도록 선수를 쳤다. 나중에 고토가 크게 분통을 터트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반드시 타케조에 공사에게 할복을 명해야" 라는 깐깐한 의견이 나오는 한편으로, 의분에 사로잡힌 국민들은 "청ㆍ한을 토벌하자" 며 격앙했다.

중화민국 대총통 시기의 위안스카이(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袁世凱' 항목)


【 도쿄부의 청년유지들과 여러 관립 / 사립학교의 학생들은 우에노 공원上野公園에서 시위운동을 벌이며,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돼지머리를 장대 끝에다 꽂고 대로를 질주, 긴자銀座에 다다르자 비전론非戰論을 주장한 쵸야신문朝野新聞에 분노를 터뜨리며 사옥社屋의 유리창을 깨부수고 온갖 욕설과 매도를 퍼부어 구인된 자 적지 않았고, 나중엔 청나라 공사관을 습격하여 바람에 휘날리던 황룡기黃龍旗를 끌어내리고 이를 갈기갈기 찢으려 했으나 이것만은 경관의 계엄으로 무마되고 말았다. 】(이시카와 료이치石川諒一ㆍ타마미즈 죠지玉水常治 著《자유당 오사카 사건》, 1933년 출간)

  이노우에 카오루가 한국으로 건너가 사죄를 받고 배상금도 수령했으나, 정작 재한 일본인을 살상한 청나라 쪽은 대단히 완강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건너가 교섭을 벌인 끝에 1885년(메이지 18년) 4월 16일, 드디어【 텐진 조약 】이 체결되었다.

  - 종래 양국이 조선에 주둔시키던 병력을 철수한다.
  - 양국은 군사교련을 이유로 조선에 교관을 보내지 않는다.
  - 장래에 사연이 있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려 할 때는 행문을 보내 통고한다.(이타가키 타이스케 감수《자유당사》

  그러나 청나라 병사의 일본인 살상 건은【 언젠가 증거가 생긴다면 처벌하겠다 】는 허울 좋은 호도로 끝이 났다. 이 굴욕외교에 의해 우국지사들은 단장斷腸의 감정에 사로잡혔다. 자유당 장사들의 '오사카 사건大阪事件' 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덧글

  • BigTrain 2019/08/26 09:43 # 답글

    개화당의 민낯을 알면 알수록 씁쓸하달까요. 사설군대 따위에게 조국을 들어바칠 생각이었다니...
  • 3인칭관찰자 2019/08/26 10:32 #

    개화파가 고토의 꿍꿍이까지 알았는진 모르겠지만 남의 나라 야당 정치인+그 부하들+건달집단까지 끌어들여서 자기 나라 정권전복을 하려 한 것은 아무래도 옹호하기가 힘들겠지요...
  • 도연초 2019/08/27 10:18 # 답글

    생각보다 심각했군요. 아니 을사오적보다 더 심각하네요. 그놈들은 그나마 일본제국정부라는 탈을 쓴 놈들과 대면(...)하기라도 했지.

    비록 의원이어도 사병조직 내지 정치깡패를 동원해 조선정부를 장악 내지는 막후조종할 가능성이 높은 인간에게 조선의 미래를 맡기려고 했었다니...(개인적으로 전 고토의 시나리오가 성공했다는 전제라면 후자의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근대화를 핑계로 흑막정치를 하는거라 결국 통감부랑 다를 게 없을듯) 개화당의 특성상 이상주의와 젊은 혈기에 눈이 멀어서 저런 어리석은 판단에 코가 꿰였을지도 모릅니다.
  • 3인칭관찰자 2019/08/27 11:45 #

    고토의 목표는 자기들이 앞장서서 조선을 개혁(?)하여 그런 외부에서의 업적을 이용해 일본 내에서 삿쵸에 밀려 만년 야권이었던 자기들이 헤게모니를 잡고서 세력을 강화시키고 나아가서는 정권을 잡는 데 있었다더군요. 만주를 차지해 정책실험장 겸 전선기지로 삼아 일본 본토의 개혁을 다그치려 했던 4~50년 후의 일본 우익세력과 닮았을지도요(....)

    개화파 입장에선 이상주의와 혈기, 그리고 민씨 정권에 대한 반감이 넘쳐서 눈에 보이는 게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전두환을 증오한 나머지 김일성, 김정일을 찬양하게 된 대한민국 주사파들 생각이 나네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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