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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춘추 Special》키리시탄 다이묘 오토모 소린 (下) 역사



  이 글은 일본의 거대출판사인 분게이슌쥬文芸春秋에서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삼아 3달에 1번씩 계절별로 출간하던 잡지인《文芸春秋 Special》의 2016년 봄호 p.92 ~ 97, 전국시대사 연구자 후쿠카와 카즈노리 박사님께서 집필하신《오오토모 소린 - 큐슈 키리시탄 왕국의 좌절를 번역한 글입니다.


  <후쿠카와 카즈노리福川一徳>

  1940년생. 호세이 대학法政大学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공저로《오토모 소린》(신진부츠오라이샤新人物往来社) /《분고 오토모 씨》(에비스코쇼슛판戎光祥出版) 등이 있다.


  휴우가 지방에 키리시탄 국가를

  모리毛利와의 다툼도 종반에 접어들던 텐쇼 원년(1573), 소린宗鱗은 적남 요시무네義統에게 가독을 물려줬지만 내정사안을 요시무네가, 군사적ㆍ외교적 중요안건을 소린이 담당하는 쌍두정치二頭政治가 텐쇼 5년(1578)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야말로 오토모 가문의 절정기絶頂期였다 하겠다. 그러나 쌍두정치는 이윽고 권력구조의 균열을 초래하여 중신重臣들과의 알력ㆍ중신들 간의 분열항쟁이 조장되면서 서서히 대들보가 침식되고 있었다.

오치아이 요시이쿠가 그린 오토모 요시무네(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大友義統')
임진왜란 때 황해도에서 적전도망을 친 경력 등으로 인해 평가가 매우 박하다.


  그 균열의 원인 중 하나가 소린의 크리스트 교 보호정책이었다. 이 시기 反 키리시탄의 급선봉에 선 사람이 다름아닌 소린의 정실부인【 나다 씨奈多氏 】였다. 나다 씨는 나다하치만궁奈多八幡宮 최고위 신관의 딸이기도 했다. 키리시탄 문제로 가문 내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오토모 가문의 실권은 요시무네와 숙로필두宿老筆頭인【 타와라 죠닌田原紹忍 】에게 집중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큐슈 남부南九州를 무대로 시마즈 가문島津家이 득세했다. 텐쇼 5년(1578) 12월 휴우가(日向, 지금의 미야자키 현宮崎県) 지방의 유력 다이묘였던 이토 씨伊東氏가,【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 】의 휴우가 침공을 견디지 못하고 제휴관계에 있던 오토모 씨를 의지해 분고로 도망쳐 왔다.

도쿄예술대학이 소장한 시마즈 요시히사의 상(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島津義久')
히데요시가 중용한 동생 요시히로와의 갈등 등으로 인해 말년의 평이 좋지 않음.


  휴우가 지방의 오비飫肥ㆍ쿠시마櫛間 일대는 풍부한 산림자원과 광물자원이 가득했고, 쿠시마ㆍ아부라쯔油津ㆍ토노우라外浦 같은 곳들은 내외 무역과 해상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토 씨가 휴우가 남부에서 퇴거함에 따라 오토모 씨가 난카이 항로南海航路에서 갖고 있던 권익이 시마즈 씨에 의해 위협받게 되었다.

  한편 소린은 텐쇼 6년(1578) 7월에 큰 결단을 내렸다. 예수회의【 카브랄 신부 】에게 세례를 받고 키리시탄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앞서 소린은 정실부인 나다 씨와 이혼한 상태였고, 세례명은 '돈 프란시스코'. 젊은 시절 깊은 감명을 주었던【 자비에르 신부 】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그리고,

  - 생명ㆍ영지를 잃는다 해도 신앙을 버리지 않겠다.
  - 주님의 가르침을 지키며, 선교사들의 충고와 가르침에 순종하겠다.
  - 정절을 지키며 살겠다.

  는 세 가지 맹세를 한 후, '산겐사이三玄斎'란 호를 지었다.

  그에 뒤이은 소린의 비전은 컸다. 휴우가 지방을 통일한 후, 저항세력이 적은 이 신천지新天地에 "종래의 일본과는 상이한 법률과 제도" 로 굴러가는 이상적인【 크리스트 교 왕국 】을 건설하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었다. 소린은 "휴우가 지방에 하나의 견고함으로 똘똘 뭉친, 그 로마 땅에까지 이름이 울려퍼질만한 키리시탄 종단" 을 건설하겠다는 결의를 품고 텐쇼 6년(1578) 10월 하순, 일부 병력과 함께 몇 문의 대포를 끌고서 십자가를 내걸고 우스키를 출항, 무시카(務志賀, 無鹿)에 진을 쳤다. 카브랄 신부와 예수회 수도사들도 일행으로서 수행했다.

관광지로 남아있는 오비 성飫肥城의 죠카마치(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飫肥')
에도 시대 오비 번飫肥藩 5만 1천 석의 다이묘였던 이토 씨伊東氏의 본거지였다. 


  이 시기, 오토모 가문은 시마즈와 싸워야 할 것인지를 놓고 두 주장으로 여론이 갈라져 있었다. 시가志賀ㆍ타키타 씨田北氏 등의 오토모 일족大友一族 내 미나미고오리 집단南郡衆과 군사軍師【 츠노쿠마 세키소角隈石宗 】는 "아직 시마즈 씨와 싸울 때가 아니다" 며 비전론非戰論을 전개했으나 타와라 죠닌이 강경한 주전론主戰論을 앞세우며 당주 요시무네를 다그쳐 싸움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휴우가 지방 출병은 소린의 지휘하에서 행해졌다" 고 자주 일컬어지나, 이는 속설로 텐쇼 6년(1578) 당시 소린은 이미 은거한 몸이었으며, 오토모 가문의 외교와 군정은 완전히 타와라 죠닌이 주도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여 오토모 가문은 내부의 의사통일이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출병을 결정, 휴우가 / 히고肥後 양 방면에서 휴우가 남부로 쳐들어가게 되었다. 본대本隊에 해당하는 휴우가 방면군의 총대장이 죠닌이었다.

  5만여 명의 본대는 느릿느릿 휴우가 지방으로 출발했다. 미미카와 강耳川을 건너 소린바루宗麟原에 포진, 10월 20일 타카 성高城 공격을 시작했다. 타카 성은 시마즈의 최전선으로,【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 】 등이 농성해 있었다. 전황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휴우가 방면 오토모 군은 군사회의軍議를 열었으나 의견일치에 도달하지 못했다. 선진의 우익右翼을 담당하던【 타키타 시게카네田北鎮周 】는 적전도하敵前渡河를 주장하며 뻗댄 끝에 총대장인 죠닌에게 자포자기성 언사를 내뱉고는 군사회의 석상을 떴다.

오늘날의 미미카와 강(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耳川の戦い')


  11월 12일 새벽, 시게카네가 단독으로 코마루 강小丸川을 도하했다. 그러자 이에 휩쓸리기라도 하듯 오토모 군이 줄줄이 강을 건너 시마즈 군島津軍에 결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시마즈 군의 교묘한 매복전술에 오토모 군은 각개격파당하며 궤멸상태에 빠져, 2만 명의 전사자를 버려둔 채 미미카와 강까지 패주해 도망쳤다. 이 전투를 흔히 '미미카와 강 전투耳川の戦い'(내지 '타카 성ㆍ코마루 강 전투高城ㆍ小丸川の戦い')라 일컫는다.

  생각지도 못한 대패大敗에 의해 소린 일행도 목숨만 겨우 건져 분고로 도망쳐 돌아갔다. 이로써 "휴우가 지방에 이상적인 크리스트 교 교단을 만들겠다." 는 소린의 꿈도 어그러지고 말았다.


  소린 스스로가 전도의 길로

  그러나 시마즈 씨에게 패배한 후에도 소린의 크리스트 교에 대한 마음은 사그라들기는 커녕 오히려 더 강해졌다.

  세례를 받기 전의 소린은 어디까지나 '크리스트 교의 보호자' 입장에 머물러 있었고, 분고 지방 영내에서의 전도는 소린의 후원을 받았다고는 하나 전적으로 신자信者들 내지 묘슈名主 계층의 개인적인 노력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휴우가에서의 패배로 상황은 일변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오토모 씨는 커다란 타격을 받아, 텐쇼 7, 8년(1579~1580)에는 분고 지방 안팎에서 반란이 줄을 이어 일어나는 내란상태에 빠졌다. 이로 인해 소린은 중신들의 요청을 받아 다시 요시무네를 보좌하며 오토모 영지 재건에 노력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소린은 분고 영내의 '키리시탄화' 를 위해 매진했던 듯하다. 분고 각지의 토호영주들을 대상으로 소린 본인이 직접 개종改宗을 권하는 적극적인 전도布敎를 펼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전도활동은 주로 소린과 토호영주들의 주도하에 조직적으로 전개되었기에 개종자는 급속히 불어났다. 원래부터 예수회의 전도방침이라는 게 다이묘ㆍ영주 계층을 위시한 지배계급支配階級의 개종을 우선하여 그들의 영향력 아래 全 주민의 키리시탄화를 도모하는 것으로, 소린의 활동은 그들의 의향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오오사이 향大佐井鄕 / 쿠스 군玖珠郡 / 유후인湯布院 / 타카다쇼高田庄 / 키요타 향清田鄕 / 노츠인野津院 / 타케다竹田 / 묘켄 산妙見岳 등, 소린의 주도하에 여러 토호영주들은 영내 민중들을 데리고 줄을 이어 개종하였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가문 내 反 키리시탄 파벌과의 항쟁抗爭을 더욱 더 격화시키는 길이기도 했다.

  치쿠젠筑前 지방의 노장【 타치바나 도세츠立花道雪 】는 텐쇼 8년(1580), 미나미고오리 집단南郡衆의 인물들에게 격문檄文을 보내 분고 지방에서 텐지쿠종(天竺宗, 크리스트 교)이 유행하고 사찰ㆍ신사寺社와 불상仏像ㆍ신상神像이 파괴되어 가는 것을 개탄하며, "오토모 가문의 존망이 위태로운 시기에 사람들이 쓸데없는 미련에 사로잡히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 고 질타했다.

  텐쇼 9년(1581)에 들어선 나다 부인과 중신들이 '키리시탄 망국론'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키리시탄들을 박해迫害하는 등, 방해妨害와 박해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 때는 소린 본인이 나서 사태수습에 임해야 할 정도였다.

류조지 타카노부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龍造寺隆信')
 그 유산은 히데요시ㆍ이에야스의 지지 하에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주어졌다.


  내부분열로 인해 약체화되어가는 오토모 씨를 대상으로 한 시마즈 씨의 영토확대 움직임은 그 세를 더해가고 있었다. 텐쇼 12년(1584), 히젠 지방의【 류조지 타카노부龍造寺隆信 】를【 오키타나와테 전투沖田畷の戦い 】에서 격파한 그들은 다음 해에는 히고 지방을 평정했고, 텐쇼 14년(1586), 시마즈 요시히사는 드디어 분고ㆍ치쿠젠 지방 침공작전을 개시했다.

  소린은 오사카 성大坂城을 찾아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알현, 토요토미 산하에 들어가겠으니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시마즈의 기세는 사그라들지 않아 오토모 가문은 멸망 직전의 위기에 봉착했다.

  이때 시마즈군의 분고 침공에 맞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며 분고 지방을 지켜내 수 있었던 건 강대한 오토모 일족집단도, 분고 남부 / 북부의 토호들의 활약도 아닌, 오토모 영지 내지는 중소 토호 영지의 키리시탄 무사ㆍ농민들이 활약한 덕이었다. 텐쇼 14년(1586) 연말에 시마즈군이 우스키로 쳐들어왔을 때 소린과 함께 우스키 성臼杵城에 농성하여 성을 끝까지 지켜낸 것도 우스키에 거주하던 키리시탄 주민들의 힘이었다. 소린이 꿈꾸던 '크리스트 교 왕국' 은 이런 형태로 현현하였던 것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윽고 히데요시가 약 25만 명의 군대를 인솔하여 큐슈에 당도한 건 다음 해인 텐쇼 15년(1587)의 일로, 이로써 전쟁국면은 일변해 시마즈군은 사츠마薩摩 본토까지 패주敗走를 거듭했다.

츠쿠미 시에 있는 오토모 소린의 묘(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大友義鎮')


  시마즈 요시히사가 항복한 날로부터 며칠이 지난 5월 23일, 병상에 누워있던 소린은 가족들이 '아베마리아' 를 합창하는 가운데 58세의 삶을 하직했다. 큐슈를 평정한 히데요시가 이 지역의 크리스트 교 확장세에 위기감을 품고 '선교사 추방령バテレン追放令' 을 발포한 건 그로부터 1개월 후의 일이었다.


덧글

  • 남중생 2019/08/24 21:14 # 답글

    오, 저렇게 죽음을 맞이하는군요.

    이번에도 좋은 번역글 감사합니다!
  • 3인칭관찰자 2019/08/24 22:11 #

    저 때 간 게 어쩌면 다행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ㅠㅠ 애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BigTrain 2019/08/24 22:51 # 답글

    사망할 때까진 자신의 꿈이 어느 정도 지상에 이뤄졌다고 생각했겠지만... ㅜㅜ
  • 3인칭관찰자 2019/08/25 07:16 #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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