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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춘추 Special》키리시탄 다이묘 오토모 소린 (上) 역사



  이 글은 일본의 거대출판사인 분게이슌쥬文芸春秋에서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삼아 3달에 1번씩 계절별로 출간하던 잡지인《文芸春秋 Special》의 2016년 봄호 p.92 ~ 97, 전국시대사 연구자 후쿠카와 카즈노리 박사님께서 집필하신《오오토모 소린 - 큐슈 키리시탄 왕국의 좌절를 번역한 글입니다.

 
  <후쿠카와 카즈노리福川一徳>

  1940년생. 호세이 대학法政大学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공저로《오토모 소린》(신진부츠오라이샤新人物往来社) /《분고 오토모 씨》(에비스코쇼슛판戎光祥出版) 등이 있다.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 크리스트 교가 우리 나라에 전파되면서 수많은 키리시탄 다이묘キリシタン大名들이 배출되었다. 오토모 소린大友宗鱗은 그 대표적인 존재라 하겠다.

  본인의 입신入信은 늦게 이루어졌으나 소린은 이른 시기부터 크리스트 교 전도를 보호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그 덕택에 오토모 씨의 거점이었던 분고 후나이豊後府内는 예수회의 선교 중심지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텐분 22년(1553), 가고 신부가 후나이에 사원을 건립하고 전도를 시작한 그 때로부터 2년이 지나자, 1500명의 신자가 모여들었다. 코우지 2년(1556)에는 상인 아르메이다アルメイダ가 병원病院과 교회敎會를 건립하여, 이곳이 일본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 되었다. 에이로쿠 5년(1562)에 소린은 우스키臼杵로 거처를 옮기면서 우스키 시가에 교회 건립용 부지를 기증하였다.

일본의 거리를 걷는 유럽인들을 그린 그림
(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南蛮貿易' 항목)


  남만무역南蛮貿易에 주목한 다이묘大名들은 적지 않았으나, 소린의 경우는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來航을 전도 허가조건으로 내걸지 않았기에 선교사들도 소린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훗날 일본의 전도구를 '미야코'(都, 교토 근변지역) /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삼은 '시모' / 그리고 '분고 지구' 로 나누어, 특별히 분고 쪽을 중시했다.

  소린의 크리스트 교에 대한 관심은 텐쇼 6년(1578)에 세례를 받으면서 더욱 박차가 가해졌다. 그리하여 큐슈九州 땅에 크리스트 교도를 위한 왕국王国을 건설하려는 계획이 진척되기에 이른 것이다.


  아시아적 센고쿠다이묘로서

  오토모 소린은 쿄로쿠 3년(1530), 분고 후나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토모 요시아키大友義鑑 / 어머니는 오우치 요시오키大内義興의 딸이었다. 큐슈 최고 명문집안의 공자님으로 어린 시절부터 응석받이로 자라, 성격은 상당히 방자했고 무예에 관심이 많은 한편으로 학문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 한편으로는 진취進取적인 기상이 풍부하고, 개명開明적인 측면도 겸비하고 있었다.

오우치 요시오키의 기마상.(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大内義興')
실질적인 텐카비토天下人10여 년간 교토에 군림하기도 했다.


  그가 16세였을 때 몇 명의 포르투갈인들을 태운 중국 선박이 내항했다. 어느 중국인이 포르투갈인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재물을 빼앗으라고 요시아키를 충동질하자 소린은 "일신의 이욕을 위해 먼 곳에서 찾아온 손님을 살해해선 안 됩니다." 라고 부친을 설득해 이를 무마시켰다고 한다.

  텐분 8년(1539)에 소린은 성인식을 치렀고, 다음 해(1540)에는 아시카가 요시하루 쇼군足利義晴將軍의 이름자를 배령하여 요시시게義鎮로 불리게 되면서 자신이 오토모 가문의 적자임을 천하에 알렸다.

  그러나 텐분 18년(1549) 연말, 요시아키는 후처後妻와 필두숙로筆頭宿老 뉴타 씨의 청을 받아들여 소린을 폐적하고 후처의 소생인 막내아들 시오이치마루塩市丸를 후계자로 앉히려 했다. 이로 인해 다음 해(1550) 2월, 소린을 지지하는 중신들이 요시아키와 후처 모자를 살해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를 '니카이쿠즈레의 변二階崩れの変' 이라 부른다.

  텐분 19년(1550) 가독을 계승한 소린은 곧장 히고 지방에 있던 뉴타 부자入田父子를 토벌, 사태 수습을 도모했다. 그리고 부친이 다스리던 분고 / 히고 두 지방을 승계했다.

  일본에 처음으로 크리스트 교를 전파한 프란시스코 자비에르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가 분고 지방을 찾은 건 '니카이쿠즈레의 변' 이 남긴 상처자국이 아직도 선명했던 텐분 20년(1551)의 일이었다. 소린은 자비에르에게 직접 설교를 받은 유일한 센고쿠다이묘戦国大名가 되었다. 자비에르에게 호의를 품은 소린은 텐분 20년(1551), 일본을 떠나 인도インド로 향하려던 자비에르에게 사자使者를 동행시켜, 포르투갈 국왕ポルトガル国王에게 보내는 친서를 갖고서 인도 총독インド総督에게 경의를 표하도록 했다.

오이타 현에 있는 자비에르의 상. 제작자는 사토 츄료佐藤忠良.
(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


  그러나 그 이후로도 소린은 오랜 기간 동안 입신하지 않았다. 자비에르를 만나 크리스트 교에 흥미를 갖게 된 이후 소린의 마음은 전통 불교와 새로이 도래한 크리스트 교 사이에서 언제나 흔들리고 있었다. 이는 한편으로 '센고쿠다이묘로 살아야 하는' 전제 하에 '내가 키리시탄이 될 수 있을까', '센고쿠다이묘 지위와 크리스트 교 신앙은 양립할 수 있을까' 라는 문제를 자문하는 고민의 세월이기도 했다.

  이 시기 소린은 센고쿠다이묘로서 커다란 과제와 마주하고 있었다. 큐슈 평정 문제였다. 소린은 기회 있을 때마다 쇼군 가문에 헌금하여 텐분 23년(1554)에 히젠 슈고 지위肥前守護職를, 에이로쿠 2년(1559)에는 부젠豊前 / 치쿠젠筑前 / 치쿠고筑後 슈고 지위와 더불어 큐슈탄다이 지위九州探題職에 임명되었다.

  소린은 6개 지방 슈고 지위와 큐슈탄다이를 겸직하며 큐슈 북부北九州의 패권을 거머쥔 지역정권地域政權을 수립하였으나, 제 1인자로서 큐슈 지배를 확립하기 위해선 오우치 씨大内氏의 영지를 계승한 모리 씨毛利氏와 그 동조세력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야만 했다. 이 싸움은 큐슈 북부에서 그치지 않고 츄고쿠中国 / 시코쿠四国 지역에까지 비화되어, 코우지 2년(1556)에서 텐쇼 5년(1577)에 이르는 장장 20여 년의 세월을 요구했다.

모리 모토나리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毛利元就')
오우치의 영지였던 부젠 / 치쿠젠 지방 영유를 놓고 소린과 대립.


  한편 소린은 아시아 국가들과도 활발한 외교를 벌였다. 코우지 원년(1555), 해적왕 왕직王直의 선무宣撫와 왜구금지倭寇禁止를 요청할 목적으로 명나라의 사자 장주가 분고에 내방했고, 코우지 2년(1556)에는 왜구대책을 협의할 목적으로 명나라의 정순공鄭舜功이 분고를 찾았다. 소린은 이 두 사신이 귀국할 때 각기 다른 외교승을 딸려 보내 감합무역을 재개시켜 줄 것을 명나라에 청하도록 했다. 그리고 텐쇼 원년(1573)에 소린은 남만국(南蛮国, 아유타야?)에 무역선을 파견했고, 텐쇼 7년(1579)에는 캄보디아カンボジア의 사절선을 맞이했다. 그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국왕과 인도 총독에게 여러 번 친서와 사절을 보내며 친교를 쌓으려고 노력했다.

  이와 같은 소린의 스케일 큰 활동은 프로이스プロイス가 남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생전 모습과도 통하는 게 있다 하겠다.

  근년에 들어 소린은 "대륙과 가까운 큐슈의 지리적 이점을 살려 아시아 역사적 전개 속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추구" 하며 "센고쿠다이묘라 불리는 일본 국내 한 지역의 공권력 정권 정의의 틀을 과감히 뛰어넘은 아시아적 규모의 활동" 을 행한 "아시아적 센고쿠다이묘였다." 고 재평가되고 있다.(카게 토시오鹿毛敏夫《오토모 소린》)


덧글

  • 차가운 도시남자 2019/08/20 19:41 # 답글

    그림을 보니 저시절에도 일본의 거리는 깨끗했군요.(어느정도 미화가 되었다고 이해는 합니다)

    조선이었으면 여기저기 똥에 파인자국에 난장판으로 나타났을텐데

    유럽인 바지는 왜 저리 과장되게 부풀어진 것으로 그려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오토모소린에 대한 설명이 거두절미하고 다이묘의 가문이라고 설명하고 시작하니 오토모가문에 대해 전혀 모르는 저로서는 어떤 내력의 가문이고 어떻게 성장했는가도 궁금해지지만, 그 부분은 이미 안다는 전제로 시작하는 점이 아쉽습니다.

    세키가하라대전에 참전한 규수출신 시미즈, 임진왜란때 건너와 석만자라 불렸던 이런 가문은 인지도가 좀 있는데 이 가문은 역사의 굴직한 사건들에서 별로 스폿라이트를 받지 못했던 가문인거 같군요. 그래도 지방의 뿌리깊은 명문이라는 것은 검색을 통해 알수 있었습니다.

    관찰자님의 포스팅을 통해 일본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점차 늘어나는 점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 3인칭관찰자 2019/08/20 22:22 #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바지가 부풀어 있지요. 어느 정도 과장스럽게 묘사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도시남자님께서 언급하신 시마즈 씨가 큐슈 남부의 무사 가문 중에서 최상급 명문가라면 오토모 씨는 큐슈 북부의 무사 가문 중에서 1~2위를 다투던 명문집안이었죠. 전국시대에서도 한때 큐슈의 패권자 급으로 잘 나간 적도 있습니다. 시마즈에게 밀려서 안습한 신세가 되긴 했지만...
  • 남중생 2019/08/21 01:12 # 답글

    크으...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쇼군 토탈 워를 오오토모 가문으로 플레이하기 좋아하는 1인.
  • 3인칭관찰자 2019/08/21 09:16 #

    쇼군 토탈워에서도 오토모 가문을 플레이할 수 있군요. 저의 경우 아무래도 노부나가의 야망의 대머리 아재 이미지가 좀 더 익숙합니다. 게임 시작부터 타치바나 도세츠나 타카하시 죠운을 가신으로 부릴 수 있어서 좋았던 기억이 나네요.
  • 남중생 2019/08/24 21:14 #

    넵. 쇼군 토탈워 2의 확장팩에서 가능합니당 ㅎㅎㅎ
  • 3인칭관찰자 2019/08/24 22:25 #

    2에서 나왔군요. 찾아보니 처음부터 기독교 신자 설정이네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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