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관찰자

beholderer.egloos.com

포토로그



《토쿠가와 이에미츠》혼다 마사즈미 카이에키 사건 (1) 역사



  이 글은《(旧) 歷史群像シリーズ 62 徳川家光 ~ 三代将軍、葵の御代の治と断 ~》에 수록된 글【 혼다 마사즈미 카이에키 사건 ~ 강의剛毅한 성격이 부른 역사적으로 희소한 의옥사건 ~ 】을 번역한 글로, 예전에 네이버 카페 <낭인풍운록>에 올렸던 내용을 다듬어서 올립니다. 필자는 일본의 역사학자 겸 역사소설가이신 카쿠 코조加來耕三 님입니다.


  이에야스는 (토쿠가와徳川) 히데타다秀忠의 장래를 생각하여,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이던 오오쿠보 타다치카大久保忠隣를 막부 법령 위반幕法違反 등의 이유로 케이쵸 19년(1614) 실각失脚시켰다.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의 경우도 그와 같은 케이스였다.


  슨푸 정권의 필두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ㆍ히데타다 두 쇼군을 섬긴 측근 혼다 마사즈미(1565~1637)의 카이에키 사건은 흔한 정치학적 현상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노골적인 면에서는 역사적으로 보기 드문 의옥疑獄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케이쵸 5년(1600)의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를 전후하여 마사즈미는 갑자기 역사의 표무대에 등장한다.《칸세이쵸슈쇼가후寛政重修諸家譜》에 따르면 서군의 총대장이라 할 수 있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를 붙잡은 타나카 요시마사田中吉政가 미츠나리의 신병을 이에야스에게 헌상하는 일을 거들어 줄 것을 마사즈미에게 부탁하고 있다. 그리고 이후 그는 오사카 니시노마루大坂西の丸에 들어가 소송사건을 처리하였다.

유골조사를 통해 얻은 데이터로 그려진 미츠나리의 초상화
(출처 : 나무위키 '이시다 미츠나리' 항목)


  이 때, 마사즈미의 나이는 36세였다.

  이에야스의 아들뻘 측근으로서 서서히 두각을 드러낸 마사즈미는 이윽고 이에야스가 슨푸駿府에 거주하며 '오오고쇼大御所' 로서 에도江戸의 히데타다와 이원정치二元政治를 펼쳐 나감에 따라 슨푸(이에야스) 쪽의 필두 측근 지위로 격상되었다.

  그 인품은 청렴하여 권력자에게 있기 쉬운 뇌물수수 스캔들은 전무하다. 학문이 있으며 인물도 탁 트인 사람이다. 단, 지나치게 뻣뻣한 구석이 있어서, 그것이 후에 알력을 낳는 원인이 된다.

슨푸 성 혼마루 터에 있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동상
(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德川家康' 항목)


  이에야스의 이원정치가 해소된 1616년, 센히메(千姫, 이에야스의 손녀딸.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에게 시집갔고 오사카 여름 전쟁大阪夏の陣 때 구출되었다)의 시집 행렬을 습격하여 히메를 납치하려던 사카자키 데와노카미 나오모리(坂崎出羽守直盛, 역주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사촌형. 오사카 여름 전쟁에서 센히메를 구출하여 이에야스로부터 그녀와의 약혼을 승낙받았으나, 이에야스가 죽은 후 약속이 흐지부지되었다)가 숙사에 틀어박혀 소동을 일으켰다.

  막부는 사카자키 가문坂崎家의 가신들에게【 그 주인 나오모리를 자진시켜라. 그리 한다면 사카자키 가문의 단절만은 면하게 해 주겠다. 】는 지령서를 내려 구슬리려 했는데, 마사즈미만이 이를 반대했다. 나오모리가 자진한다 해도 막부 각료들은 사카자키 가문을 존속시켜 줄 생각 따윈 갖고 있지 않다는 걸 알기 떄문이었다.

  "천하의 정사政事는 믿음 없인 이루어질 수 없다."

  "그 같은 임시방편적인 거짓은 할 게 못 된다." 고 마사즈미는 주장하며 지령서에 서명을 거부했는데, 문제는 그런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이 극도로 신랄辛辣하다는 것이었다.《메이쇼겐코로쿠名将言行録》는 그런 그의 성격을【 강의剛毅하다 】고 표현하였다.

  그런 성격에다, 마사즈미가 혼다 마사노부의 아들로 태어난 것도 그에겐 훗날 화근이 되었다.

'카가 혼다 박물관' 소장 혼다 마사노부 초상화
(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本多正信' 항목)


  마사노부는 토쿠가와 가문의 후다이譜代이긴 했으나 본래 '매 조련사鷹匠' 신분이었고, 거기에다 복직帰参한 신참자의 입장이었다. 젊은 시절 미카와 잇코잇키三河一向一揆에 잇키 측 참모로 가담하여 이에야스의 목숨을 노렸다가 실패하고, 여러 지방을 떠돌아다니던 끝에 용서받아 이에야스의 모신謀臣이 된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투 ~ 토요토미 씨 멸망에 이르는 시기에 이에야스가 가장 신임하였던 자가 마사노부로, 이원정치를 시작하면서 이에야스는 마사노부를 에도에 파견하였다. 이 즈음의 마사노부는 2만 2천 석 정도의 영지(사가미 지방相模国 타마나와玉縄)를 영유하고 있었다.


덧글

  • BigTrain 2019/08/02 20:41 # 답글

    창작물에선 음험한 모사꾼이나 시건방진 2세 실세쯤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강직한 성격이라니, 흥미롭군요.
  • 3인칭관찰자 2019/08/02 21:21 #

    분명 빅트레인님께서 접해오신 이미지가 보다 더 보편적일 겁니다. 저도 그런 이미지에 익숙하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론 이시다 미츠나리와 좀 닮지 않았나 생각해보기도 합니다만...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통계 위젯 (블랙)

3858
460
346290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블랙)

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