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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가타케 전투》히데요시의 미노 제압전 (完) 역사



  이 글은《(旧) 歷史群像シリーズ 15 賎ケ岳の戦い ~「秀吉vs勝家」覇権獲得への死闘 ~》에 수록된 글【 히데요시의 미노 제압전 - 노부타카의 숨통을 틀어쥔 히데요시의 전략 】을 번역한 글로, 예전에 네이버 카페 <낭인풍운록>에 올렸던 내용을 다듬어서 올립니다. 필자는 일본의 역사학자이신 타니구치 켄고谷口研語 님입니다.

  1989년에 출간된 서적이니만큼 시대적 한계가 다소나마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명운이 다한 노부타카와 기후 성의 말로

  더욱 더 고립된 기후 성.

  그러나 2월 말에 접어들어 노부타카에게 점차 낭보가 들려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가 움직인 것이다. 카츠이에 휘하의 홋고쿠 군北国勢이 잔설을 밟으며 오우미 북부北近江로 진출하자 이와 연계하기 위하여 노부타카는 3월, 다시 기후 성에서 거병했다.

  히데요시는 카츠이에와 노부타카의 움직임을 알고, 노부타카가 바친 인질(노부나가의 첩이자 노부타카의 어머니인 사카 씨坂氏)을 죽인 후 오우미 북부로 출병했는데, 여기서도 히데요시의 신속한 움직임은 두드러진다. 그는 카츠이에와의 대진이 오래 끄는 것을 보고 홋고쿠 군을 견제할 부서를 편성하고서 나가하마長浜로 귀환한 후, 우선 노부타카를 궤멸시키기 위해 4월 16일 오오가키大垣에 입성했다.

  히데요시도 이번에는 노부타카를 용서하지 않고, 싸움으로 기후 성을 함락시키려고 한 것 같다. 그러나 때마침 쏟아진 폭우로 코우토 강合度川의 물이 불어나,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잠시 체진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 이나바 잇테츠稲葉一鉄들로 하여금 기후 주변을 방화하도록 하였다.

  이럭저럭하는 동안에, 드디어 결전의 시각이 임박했다.

지금의 시즈가타케 산 정상.(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히데요시 측 쿠와야마 시게하루桑山重晴가 이곳에 포진하였다.

 
  21일, 히데요시는 미노인들의 일부로 구성된 기후 성 포위군을 남기고 시즈가타케賤ヶ岳로 급행하여 홋고쿠 군을 격파하고, 24일에는 시바타 카츠이에를 키타노쇼北ノ庄에서 멸망시켰다. 홋고쿠 시오키(北国仕置, 역주 : 거물들에 한하면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에겐 기존 영지에다 에치젠 지방越前国 대부분 + 카가 남부南加賀가 새로이 주어졌고, 마에다 토시이에는 기존 영지인 노토 지방能登国을 보장받고 새로이 카가 북부北加賀를 영유하게 되었다. 엣츄越中 지방의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는 기존의 영지를 보장받았다)와 함께 기후 성 공방전도 본격적으로 접어들어, 이윽고 오와리尾張의 오다 노부카츠織田信雄가 기후 성 공격에 참진했다.

  기후 성은 오로지 시바타 카츠이에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 카츠이에가 패한 이상, 기후 성의 말로는 뻔한 것이었다.

【 산시치 노부타카三七信孝 시바타를 특히 의지하셨으나, 그가 멸망하여 죽자 초목의 뿌리가 끊긴 모습이 되어, 로쥬(郎従, 승마를 허락받지 못한 하급 무사)들 모두 도망쳐 사라지고, 이즈음엔 정 깊었던 부하들만이 남아 머물렀다. 】이는 타케나카 시게카도竹中重門의《토요카가미豊鑑》에 기록된 내용이다.

한때 노부타카의 본거지였던 칸베 성.(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노부타카가 낙하산 양자였던 만큼 칸베 가신단도 그에게 면종복배했던 듯.


  시바타 카츠이에의 패사敗死와 오다 노부카츠의 내습을 알게 되자 기후 성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여, 이나바 잇테츠와 친척관계인 사이토 토시타카斎藤利堯 / 이나바 교부쇼유稲葉形部少輔 등은 잇테츠를 의지하여 히데요시에게 항복했다. 그리고 이세 칸베슈(伊勢神戸衆, 역주 : 노부타카가 칸베 가문 당주였을 때 그를 섬기던 가신들) 470명 등 성을 버리고 도주하는 성병城兵도 속출하여, 일설에 따르면 노부타카의 주변에는 겨우 27명만이 남았다고 한다.

  이렇게 되어서는, 노부타카의 명운도 다했다. 노부타카는 4월 29일, 기후 성을 넘겨주고 오와리 치타 군 노마知多郡野間의 대불당으로 퇴거해, 이윽고 5월 2일 (역주 : 이복형) 오다 노부카츠의 강요하에 자살했다. 노부타카의 편을 든 무사들도 이와 함께 구축驅逐되었다. 오리 성주小里城主 오리 미츠아키小里光明는 5월 6일 도망하여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를 의지했다. 나에기 성주苗木城主 토오야마 토모마사遠山友政는 여전히 저항했으나, 5월 15일 모리 나가요시에게 성을 빼앗기고, 이쪽 역시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의지하여 미카와三河로 도망쳤다.


(역자 曰)

그 옛날 주군을 죽인 우츠미 노마이니
むかしより主をうつみの 野間なれば
응보를 기다려라. 하시바 치쿠젠.
むくいを待てや 羽柴ちくぜん

(《카와스미타이코키川角太閤記에 나오는 노부타카의 사세구.

1159년 헤이지의 난 당시 오와리의 무사 오사다 타다무네가 주군인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를 살해한 곳에서 노부타카는 자결을 강요받았다.

훗날 참혹하게 보복당한 오사다처럼, 히데요시 네놈에게도 천벌이
내릴 거라는 노부타카의 원념怨念이 가득 묻어있는 사세이다.)


  이로써 미노 지방은 완전히 제압되었다. 대군을 이끌고 오우미 / 이세 / 미노를 종횡무진한 히데요시에 비해, 노부타카는 오직 시바타 카츠이에에 매달렸을 뿐, 전투다운 전투도 해 보지 못하고 완패했다.

  모리 나가요시가 미노 동부 경략에 나서는 동안, 노부타카 스스로 병력을 인솔하여 미노 동부의 여러 무사들을 원호한 흔적은 없다. 그리고 이나바 잇테츠의 거취가 확장되지 않았던 몇 개월 동안, 노부타카가 미노 서부로 출병한 흔적도 없다. 노부타카는 기후 성에 완전히 틀어박혔던 것이다. 기후 성을 한 발짝도 나서지 않고 미노인들을 아군으로 삼는 것은 불가능하다.

  히데요시와 노부타카의 역량 / 행동력의 차이를 보여준 기후 성 공방전이었다. 오다 가문의 후계자는 커녕 미노 지방의 주인조차 되지 못한 노부타카였다.


덧글

  • 차가운 도시남자 2019/06/02 13:16 # 답글

    히데요리도 오사카성에 어미랑 틀어박혀 있다 죽은게 생각납니다.

    귀한 도련님으로 자라서 아랫것들이 다 알아서 챙겨주다보니 직접 안 움직이고 그렇게 되나 싶군요.

    관찰자님은 히데요리가 히데요시의 친자라고 보시나요 아니다라는 쪽으로 보시나요?

    저는 아니다 쪽입니다만 어떤 생각이신지 궁금합니다.
  • 3인칭관찰자 2019/06/02 14:08 #

    1천 명 이상의 대군을 지휘해본 경력조차 없는 25세 도련님이 산전수전 다 겪은 46세의 히데요시에게 대적한다는 게 많이 힘들긴 하지만, 이기든 지든 끝장을 보겠다는 진취적인 적극성이 그에게 결여돼 있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겠죠.(그보다 두 살 어린 나이에 오슈 남부를 통일한 다테 마사무네 같은 먼치킨도 있긴 하니)

    저도 히데요시가 씨없는 수박이 아니었나 추측하며 히데요리는 그 친아들이 아닐 확률이 높다고 봅니다. 왜소한 히데요시와는 달리 히데요리는 비정상적으로 키가 크고 뚱뚱했던데다 정실을 비롯한 다른 여자들과의 사이에선 생겨나지 못한(아들 하나가 있었다는 말이 있지만 의문스럽습니다) 자식을 요도도노만이 두 명 낳았다는 점은 아무래도 수상쩍습니다.
  • 함부르거 2019/06/02 16:48 # 답글

    격동기일 수록 바닥민심을 잘 끌어 모아야 하는데 노부타카는 그런 감각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뭐 곱게 자란 도련님들이 대게 그렇지만요. ^^;;
  • 3인칭관찰자 2019/06/02 17:27 #

    이세의 5만 석 영주에서 준비없이 급작스레 미노 지방 태수가 된 점을 감안하더라도 귀하게 자란 사람 특유의 미숙한 면이 있었던 점은 부정하기 힘들겠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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