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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가타케 전투》히데요시의 미노 제압전 (3) 역사



  이 글은《(旧) 歷史群像シリーズ 15 賎ケ岳の戦い ~「秀吉vs勝家」覇権獲得への死闘 ~》에 수록된 글【 히데요시의 미노 제압전 - 노부타카의 숨통을 틀어쥔 히데요시의 전략 】을 번역한 글로, 예전에 네이버 카페 <낭인풍운록>에 올렸던 내용을 다듬어서 올립니다. 필자는 일본의 역사학자이신 타니구치 켄고谷口研語 님입니다.

  1989년에 출간된 서적이니만큼 시대적 한계가 다소나마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히데요시秀吉의 대군 앞에 손도 쓰지 못하고 화목和睦

  이런 모리 나가요시森長可의 움직임에 대해, 기후 성의 노부타카信孝는 어떤 유효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이에 비해 히데요시의 행동은 신속했다. 히데요시는 에치젠越前이 눈으로 뒤덮인 틈을 노려 미노 지방으로 창끝을 겨누고, 텐쇼 10년(1582) 12월 18일날 3만 병사를 인솔하여 미노로 들어갔다. 미노 서부의 무사들은 히데요시의 위세에 두려움을 느끼고 항복하였고, 이나바稲葉 / 우지이에氏家 두 가문도 히데요시를 찾아가 복속하였다.

  21일 히데요시는 우지이에 가문의 오오가키 성大垣城에 들어가, 오오가키 성을 미노 / 이세 공략을 위한 전선사령부로 삼았다.

일제시대오오가키 성 망루와 텐슈(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 서군 주력부대가 이 성에 주둔하며 동군과 대치했다.


  이나바 잇테츠의 거취는 그 때까지(역주 : 히데요시가 미노에 진입할 때까지)는 분명치 않았던 것 같다. 그랬던 그가 히데요시 편에 붙은 건, 기후 성 전면에 펼쳐진 미노 평야 전역이 노부타카의 적으로 돌아선 것을 의미했다. 노부타카의 계산은 최초부터 착오를 일으켰다. 미노 동부뿐만 아니라 미노 서부에 대해서도 유효한 대책을 내지 못한 채, 기후 성에서 히데요시의 대군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기후 성은 천험의 요새이긴 했으나, 독자적인 힘으로 대군을 상대할 수 있는 성은 아니다. 고립된 성이다 보니 대군에 의해 산 위에서 옥죄이다가 결국은 바깥세상과 유리되어, 정보마저 단절된다. 그렇게 된다면 어딘가에서 원군이 와 포위를 풀어주지 않는 한은 독자적 반격이 불가능하다.

  미노 서부는 싸움 한 번 벌이지 않고 히데요시의 세력 하에 편입되었으며, 기후 성의 배후인 미노 중부 쪽도 이미 모리 나가요시에 의해 제압당했다. 이 시점에서 미노의 노부타카 세력은 외연부인 토키土岐 / 에나恵那 / 구죠郡上 3군의 무사들인데, 그들은 모리 나가요시의 움직임 앞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오직 미노 북부 구죠 군의 엔도 요시타카遠藤慶隆만이 과감하게 기후 성 지원을 시도했다. 11월 엔도 씨는 무기 이타토리武儀板取의 나가야 씨長屋氏, 이어서 야마가타타로마루山縣太郎丸의 후카오 이즈미深尾和泉를 투항시키고, 나아가 기후 성의 노부타카를 원호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기후 성은 히데요시의 대군에 포위되었다. 기후 성을 포위한 히데요시의 대군에 비하면 엔도 씨의 후방지원 따윈 구우일모九牛一毛에 지나지 않는다. 시바타柴田 / 타키가와滝川의 원군이 오지 않아 궁지에 몰린 노부타카는 12월 20일,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를 의지하여 산보시三法師와 인질(노부타카의 친어머니 사카 씨坂氏)을 보내고 일단 히데요시와 화목했다.

오다 가문의 중진 니와 나가히데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히데요시의 약진을 도운 공적으로 같은 해 100만 석 다이묘가 되었다.


  다음 해(1583) 정월, 이번엔 이세 북부의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가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는 츄고쿠 모리 씨中国毛利氏, 노부타카는 시코쿠 쵸소카베 씨長宗我部氏와 각기 결탁하여 히데요시 협공작전을 도모했다.

  미노 동부의 여러 무사들도 일단 이에 호응할 듯 보였으나, 이번에도 모리 나가요시가 선수를 쳤다.

  나가요시는 정월, 부젠 이치노죠豊前市之丞의 군대를 토키 군으로 출진시켜 타카야마 성주高山城主 히라이 타노모平井頼母 / 츠마키 성주妻木城主 츠마키 요리타다妻木頼忠의 항복을 받고, 이어서 쿠쿠리 성주久々利城主 토키 미카와노카미土岐三河守를 모살謀殺했다. 나가요시에 의해 중부ㆍ동부 미노의 무기 / 가모 / 카니 / 토키 4군이 거의 제압당한 것이다.

  남은 건 토키 군의 오리 씨小里氏 / 에나 군의 나에기 토오야마 씨苗木遠山氏 / 미노 북부 구죠 군 엔도 씨 등 손으로 꼽을 정도의 세력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 기후 성 지원을 도모할 수 있는 건 역시 구죠 군의 엔도 씨다. 히데요시는 무기 군의 여러 무사들을 스바라須原 / 호라토洞戸 두 성채에 모아 기후 - 구죠 통로를 지키게 하는 한편으로, 모리 나가요시에게 엔도 씨 공략을 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엔도 요시타카는 구죠의 2천여 병력을 이끌고 출진, 스바라 / 호라토 두 성채의 항복을 받은 후 나아가 타치바나 산立花山에 진을 쳤다. 엔도 씨와 모리 씨 간의 타치바나 산 공방전은 정월 8일부터 시작하여 이후 대진이 10여 일 이어졌으나, 엔도 군의 분투도 여기까지였다. 보급로를 차단당한 엔도 요시타카는 진퇴양난의 궁지에 빠진 끝에, 인질을 바치고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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