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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가타케 전투》히데요시의 미노 제압전 (1) 역사



  이 글은《(旧) 歷史群像シリーズ 15 賎ケ岳の戦い ~「秀吉vs勝家」覇権獲得への死闘 ~》에 수록된 글【 히데요시의 미노 제압전 - 노부타카의 숨통을 틀어쥔 히데요시의 전략 】을 번역한 글로, 예전에 네이버 카페 <낭인풍운록>에 올렸던 내용을 다듬어서 올립니다. 필자는 일본의 역사학자이신 타니구치 켄고谷口研語 님입니다.

  1989년에 출간된 서적이니만큼 시대적 한계가 다소나마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소란한 미노에 봉해진 노부타카

  기후 성이 자리잡은 이나바 산(稲葉山, 지금의 킨카 산金華山)은 노우비 평야濃尾平野 북부에 깎아지른 듯이 우뚝 솟아 있는 산봉우리로, 노우비 평야가 한 눈에 들여다보이는 천험의 요새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에이로쿠 10년(1567), 이나바 산성을 함락시켜 사이토 타츠오키斎藤龍興를 추방한 후 이윽고 이 땅을 본거지로 정하였고, 이나바 산기슭의 이노구치井ノ口를 '기후岐阜'로 개칭하였다. 이후 텐쇼 4년(1576)에 아즈치 성安土城으로 옮겨갈 때까지 이곳이 노부나가의 본성이 되었고, 그 10년 간 기후 성은 천하포무天下布武의 거점이 되었다.

엔토쿠사에 전해지는 기후 성을 그린 그림.(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그것만은 아니다. 아즈치로 옮기기 전년에 노부나가는 적자 (오다) 노부타다信忠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기후 성주로 앉혀 놓았기에, 노부나가의 본거지는 아즈치로 옮겨지긴 했어도 기후 성은 형식적으론 오다 가문의 본성이라는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키요스 회의清洲会議 결과 미노 지방을 분배받은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는 떨떠름하게 이를 따랐으나, 그런 한편으로는 오다 가문의 본성인 기후의 주인이 되어 산보시(三法師, 오다 히데노부織田秀信)를 후견하는 입장에 선 것은 그의 자존심을 어느 정도 만족시켰을 것이다.

  뭐니뭐니해도 그는 (하시바羽柴) 히데요시秀吉와 함께 노부나가의 복수전에 참가한 바 있고, 실질적인 오다 가문 후계자의 자격은 자신에게 있다는 자부가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 /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가 히데요시를 배제하고 주도권을 잡는다면, 노부타카는 오다 가문의 후계자가 될 것이었다.

우타가와 쿠니요시가 그린 오다 노부타카(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그러나 그 미노에선 27일 벌어진 키요스 회의 이전부터, 이미 격렬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당시 미노 서부에는 북부 일대를 지배하는 소네 성曽根城의 이나바 잇테츠稲葉一鉄 / 사다미치貞通 부자, 남부 일대를 지배하는 오오가키 성大垣城의 우지이에 유키히로氏家行広가 있었고, 미노 중부와 동부 미노의 최대세력은 카네야마 성兼山城의 모리 나가요시森長可였다. 그 외에 비교적 커다란 세력으로는 구죠 하치만 성郡上八幡城의 엔도 요시타카遠藤慶隆와 미노 동쪽 끝인 에나 군 나에기 성恵那郡苗木城의 토오야마 토모마사遠山友政 등이 있었다.

  혼노사의 변 직후 미노에서는 이들 세력을 축으로 각지의 성주들이 제각기 자기 권익의 확대 내지는 회복을 노리고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미노인들의 동향을 최종적으로 좌우하게 될 대물이 미노 서부의 이나바 씨와 미노 중ㆍ동부의 모리 씨였다.

  이나바 잇테츠는 과거 우지이에 보쿠젠氏家卜全 / 안도 모리나리安藤守就와 함께 '서 미노 3인중西美濃三人衆' 으로 일컬어지던 유력무장으로, 이나바 / 우지이에 / 안도 세 가문은 노부나가 정권하에서 거의 호각의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도 모리나리가 텐쇼 8년(1580), 타케다 씨와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아 키타가타 성에서 추방되고 무기 군 타니구치武儀郡谷口에 칩거한 후, 노부나가는 안도 씨의 영지를 이나바 잇테츠에게 주었다.

이나바 잇테츠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이 시점에서 잇테츠는 미노 서부의 최대 세력자가 되어, 이후 미노 서부 무사들 다수가 노부나가에 의해 이나바 잇테츠에게 배속되었으리라 추측된다.

  한편 모리 나가요시는 노부나가가 미노를 평정한 후, 카니 군 카네야마의 성주로 봉해졌으나(역주 : 카네야마 성주로 봉해진 것은 나가요시의 아버지 모리 요시나리森可成. 1563~1564년 경으로 추정됨. 카네야마 성은 당시 타케다 가문에 복속해 있던 토오야마 씨遠山氏와의 접경지대로, 그는 타케다ㆍ오다 동맹 이전 노부나가의 對 신겐 최전선 지휘관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1570년 경에는 아자이浅井ㆍ아사쿠라朝倉에 맞서 오우미 서부西近江의 최전선을 지키고 있었으며, 그 해 9월 오우미 사카모토坂本에서 아자이ㆍ아사쿠라ㆍ잇코잇키 신도들과 싸운 끝에 패하여 전사했다.) 타케다 씨 공격(1582) 당시, 오다 노부타다를 따른 공에 의해 시나노 4군을 하사받았다.

오치아이 요시이쿠가 그린 모리 란마루(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그리고 혼노사에서 죽은 모리 란마루森蘭丸 / 보마루坊丸 / 리키마루力丸는 모두 나가요시와 형제관계로, 모리 란마루는 텐쇼 3년(1575) 이와무라 토오야마 씨岩村遠山氏가 멸망한 후, 이와무라 성주岩村城主가 되어 있었다.(역주 : 실제론 란마루는 시나노 카와나카지마信濃川中島에 봉해진 형을 대신해 1582년에 카네야마 성주가 되었다. 1575년에 이와무라 성주로 임명된 건 카와지리 히데타카川尻秀隆이며, 타케다 씨 멸망 후 카이甲斐 지방의 태수가 된 카와지리를 대신해 이와무라에 봉해진 건 단 타다마사団忠正)

  혼노사의 변 직후, 우선 안도 모리나리 일족이 옛 영지 회복을 위해 키타가타北方 / 코우토 성河渡城에 농성하였다. 안도 일족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그들의 옛 영지를 차지하고 있던 이나바 잇테츠 부자가 출병하여 이를 며칠만에 진압. 안도 일족은 멸망당했다.

  그리고 카네야마 성주 모리 나가요시는 혼노사의 변 당시 시나노 마츠시로松代의 카이즈 성海津城에 있었는데, 나가요시에 대항하여 미노 동부의 토오야마 / 히라이平井 / 히다肥田 / 오쿠무라奥村 등의 무사들이 키소 요시마사木曽義昌와 짜고 그 귀로를 기습하여 미노 귀환을 저지하려는 책모가 진행중이었다. 그러한 키소 씨 / 토오야마 씨들의 모략은 불완전했던지, 급히 귀로에 오른 나가요시는 6월 하순, 무사히 카네야마 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한편 주군의 비명횡사로 혼란에 빠진 기후 성은 노부타카의 가신 사이토 토시타카斎藤利堯가 제압했으나, 토시타카는 히데요시와 노부타카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 세력을 토벌하기 전까지 기치를 선명히 하지 않았고, 기후 성을 넘겨준 건 아케치 일파가 멸망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 사이토 토시타카는, 혼노사에서 순사한 사이토 신고로斎藤新五郎의 거성居城 카지타 성加治田城에 입성했다.

  이와 같이 혼노사의 변으로 노부타다라는 중심을 잃어버린 미노에서는 각 세력이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며 혼돈스러운 정세가 펼쳐졌다. 그런 정세 속에서 노부타카는 미노 지방에 입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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