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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군의 사령관》오다 노부타카와 시코쿠 방면군 (上) 역사



  예전 네이버 카페에 올렸던 글을 오늘 문서 정리 도중 발견해, 포스팅합니다. 오다 노부나가 가신단 연구의 권위자이신 타니구치 카츠히로谷口克広 님께서 2005년 집필하신《노부나가군의 사령관信長軍の司令官》의 해당 부분을 번역한 글입니다. 번역 실력이 지금보다 많이 미흡했던 때의 글이라 상당 부분을 뜯어 고쳤습니다.
  

  시코쿠의 정세

  시코쿠四國에서는 쵸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에 의한 전토통일이 이제 눈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남은 건 이요伊予 지방 북부와 아와阿波ㆍ사누키讃岐 지방 동부 뿐이었다.

  쵸소카베는 텐쇼 3년(1575)에 토사土佐 지방 통일을 완료한 시점부터 노부나가信長에게 연락하여 친교를 도모했다. 그 중개역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가 맡았다고 한다. 노부나가는 쵸소카베의 적남嫡男 야사부로弥三郎에게 '노부信' 글자를 주어 '노부치카信親' 라 이름짓게 하고, 모토치카에게는 "시코쿠에서 자네가 정복한 땅만큼 (영지로) 보장하겠다." 는 슈인죠朱印状를 넘겨주었다고 전해진다.(《모토치카키元親記》,《토사노쿠니토간슈》)

  그러나 그 후, 노부나가가 카와치河内 지방의 항장降將 미요시 야스나가三好康長를 용서하고 중용하면서 쵸소카베 씨에 대한 노부나가의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쵸소카베와 미요시는 아와 / 사누키 두 지방을 둘러싸고 싸움을 거듭하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쵸소카베 씨는 노부나가의 응원 같은 건 전혀 받지 않고 자력으로 시코쿠 통일을 진척시켜 갔다. 아와 / 사누키에 세력을 펴고 있던 미요시 씨는 압박을 받은 끝에 양 지방의 동부만을 간신히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상태가 여기에 이르자 노부나가는 쵸소카베 모토치카에게 통지했다. "본 영지인 토사 지방과 아와 남부 지방의 영유는 인정하겠다. 그러나 그 외 지방의 영유는 인정해 줄 수 없다" 고. 쵸소카베는 화가 났다. 이요도 사누키도 스스로의 힘으로 정복한 지방이다. 노부나가의 은혜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논리적으로 보면 쵸소카베 쪽이 정당하다.

  쵸소카베 씨와의 절충역을 맡았기에 그 사이에 끼인 형태가 된 아케치는, 가신 사이토 토시미츠斎藤利三의 형이자 모토치카의 처남인 이시가이 효부쇼유石谷兵部大輔를 시코쿠에 보내어 설득을 시도했으나 쵸소카베의 고집을 꺾는 데 실패했다.

  이와 같이 쵸소카베와 미요시 간의 다툼으로 인해 (역주 : 그 사이에 개입한 노부나가의 처우에 분노한) 쵸소카베가 노부나가를 향해 반항적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 당시 시코쿠의 정세였다.


  시코쿠 방면군의 성립

  노부나가가 시코쿠에 손을 쓰기 시작한 것은 텐쇼 9년(1581)부터이다. 미요시 야스나가를 움직였다. 당시의 야스나가는 카와치 남부를 영유한 신분에 불과하나, 본래 아와 미요시 씨阿波三好氏의 원로급이던 사내다.

  야스나가의 아들 시키부쇼유式部少輔는 여태껏 아와 이와쿠라 성阿波岩倉城에 눌러앉아 있었는데, 당시엔 쵸소카베 씨에 복속해 있었다. 아와로 향한 야스나가는 아들을 쵸소카베 씨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손을 썼다.

  그렇다고 해도 노부나가와 쵸소카베는 아직 표면적으론 대립하지 않았다. 그 해 6월 12일 노부나가는 모토치카의 동생 코소카베 치카야스香宗我部親泰에게 슈인죠를 보내 시키부쇼유와 협력하여 아와에서 활동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야스나가 쪽도 모토치카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키부쇼유는 풋내기이니 여러가지로 지도편달을 부탁드리고 싶다. 】고 썼다. 정략政略이라고는 하지만, 마음에도 없는 바를 이 정도까지 술술 잘도 늘어놓을 줄 아는 인물이 야스나가였다.

  아마도 이 텐쇼 9년의 종반기일 것이다. 노부나가가 쵸소카베에게 "아와 북부ㆍ사누키ㆍ이요 지방 영유를 인정할 수 없다." 고 통보한 것은. 쵸소카베가 아케치 미츠히데의 설득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은 앞에서 서술한 그대로이다. 다음해인 텐쇼 10년(1582) 연초가 되자 노부나가의 쵸소카베 씨 토벌이 시작되었다. 2월, 미요시 야스나가를 시코쿠에 파견한 것이다.

  물론 노부나가는 미요시의 군대만으로 시코쿠의 대부분을 제압하고 있던 쵸소카베 씨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곧 대군을 파견할 계획이었다.

  노부나가가 총대장으로 예정한 자가 그의 3남인 (칸베神戸) 노부타카信孝였다. 시코쿠 공략을 준비중이었는지는 모르나 노부타카는 오다 군이 거의 총동원되어 출진하다시피 한 타케다武田 토벌전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시코쿠에서는 몇 개월동안 미요시 야스나가가 필사적으로 쵸소카베 군을 아와에 묶어두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그들에게 맡겨둘 수는 없었다.

  5월에 이르러 간신히 시코쿠 토벌군이 정비되었다. 총대장 노부타카를 유격군인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 / 같은 신분인 하치야 요리타카蜂屋頼隆 / 렌시(連枝, 일가붙이) 츠다 노부즈미津田信澄 이상 3명이 부장部將으로서 보좌하는 진용이었다.

  이 시코쿠 토벌전의 편성이 난항을 겪은 것은 총대장이 되어야 할 노부타카의 영지가 작았기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도 적었던 탓이리라. 노부타카의 영지인 이세 스즈카鈴鹿 / 카와와河曲 2군(《토우다이키当代記》에 따르면 약 5만 석)만으론 1천여 명의 병력밖에 동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3명의 부장을 붙였으나, 대표적인 유격군단이라는 평을 받는 니와 / 하치야도 기실 지배지로 둔 코쿠다카石高는 10만 석 정도로 딱히 거물이 아니다. 노부즈미의 지배지도 오우미 타카지마 군近江高島郡 뿐이었다.

  그런 연유로 이 군단에는 각지에서 긁어모은 무사들이 참가했다고 한다.《예수회 일본연보》에 따르면 오우미 코우가 군近江甲賀郡 / 이가伊賀 / 키슈 사이가紀州雑賀, 그 외에 탄바丹波 지방에서도 일부 병사들이 참가한 것 같다.

  어쨌든 간에 칸베 노부타카를 사령관으로 삼은 시코쿠 토벌군은 성립되었다. 여기서부턴 다른 방면군들과 짝을 지어《시코쿠 방면군》이라 부르기로 하자. 물론 쵸소카베 씨 토벌에 한정된 일시적 진용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이 당시의 시코쿠 방면군은 왼쪽의 그림과 같이 편성되어 있었다.

● 총대장 칸베 노부타카

후다이 집단

오카모토 요시카츠岡本良勝 / 코우다 히코우에몬幸田彦右衛門

● 이세 북부 집단

세키 모리노부(関盛信, 이세 카메야마 성주伊勢亀山城主)
코쿠후 사도노카미(国府佐渡守, 이세 코쿠후 성주国府城主)
코지마 효부쇼유(小島兵部少輔, 이세 타카오카 성주高岡城主)

● 미요시 야스나가(카와치河内 남부 영유)

카와치 집단河内衆 / 아와 집단阿波衆

● 니와 나가히데(와카사 오바마 성주若狭小浜城主. 와카사 지방 영유)

와카사 집단若狭衆

● 하치야 요리타카(이즈미 키시와다 성주和泉岸和田城主. 이즈미 지방 영유)

이즈미 집단和泉衆

● 츠다 노부즈미(오우미 오미조 성주近江大溝城主)

오우미(近江, 그 중에 타카지마 군高島郡) 집단

그 외, 오우미 코우가 집단 / 이가 집단 / 탄바 집단 / 키슈 사이가 부대가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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