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부전으로 인해 향년 98세(1922년생. 일본식으로는 96세)의 나이로 오늘(24일) 새벽 별세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링크 : 아사히신문
일본고전에서 현대문학까지 두루 통하여, 일본문화와 일본문학을 세계에 널리 알린 일본문학 연구가이자 문화훈장 수장자 도널드 킨 씨가 24일, 심부전으로 별세했다. 향년 96세. 장례는 친족만으로 치른다. 상주는 그의 양아들로 조루리 샤미센 연주자인 킨 세이키キーン誠己 씨가 맡는다.
1922년, 미국 뉴욕 태생. 콜롬비아대학 재학중《겐지 이야기源氏物語》를 접했다. 미일개전에 따라 1942년, 미 해군 일본어학교에 입학했다. 어학장교가 되어 하와이ㆍ오키나와에 종군하며 일본병들의 일기 번역과 포로들의 통역을 맡았다. 오키나와 전선에선 스피커를 사용해 일본병들에게 투항을 권고했다. 전후 하버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일본문학 연구를 계속했고 1953년엔 교토대학에 유학했다. 영어로 번역한《일본문학 선집日本文學選集》을 편집하여 미국의 출판사를 통해 간행, 일본문학이 해외에 소개되는 스타트를 끊었다.
타니자키 쥰이치로谷崎潤一郞ㆍ카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ㆍ아베 코보安部公房ㆍ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ㆍ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등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들과의 교류가 그의 문학연구를 풍부하게 만들었다.《츠레즈레구사徒然草》,《오쿠노호소미치奧の細道》등의 고전과 아베ㆍ미시마를 위시한 현대작가들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했다.《메이지 텐노明治天皇》,《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등의 평전을 집필하는 데도 힘을 기울여, 작가들의 일생을 통해 일본인의 정신을 부각시켜 왔다.
1962년 키쿠치칸상菊池寛賞을 수상했다. 1982~1992년 동안 아사히신문의 객원편집위원을 맡으며 헤이안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의 일기문학을 논한 <백 대의 과객>(1984년 요미우리문학상 수상) 등을 연재했다. 1983년엔 야마가타반토상山片蟠桃賞을 수상했다. 1986년엔 콜롬비아대학교에 '도널드 킨 일본문화센터'가 설립되었다. 1992년 콜롬비아대 명예교수가 되었고, 1997년에는《일본문학의 역사日本文學の歷史》(全 18권)를 완결지었으며, 같은 해 아사히상朝日賞을 수상했다. 2008년에 문화훈장을 수장했다.
일본과 미국을 왕복하고 있었으나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 터진 후, 일본 영주를 결심하고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강연 등을 다니며 재해를 입은 지역을 격려했다. 2013년에는 킨 씨가 부활을 지원하고 있던 옛 조루리의 인연에 의해 니이가타 현 카시와자키 시에 '도널드 킨 센터 카시와자키'가 개관했고, 이때 장서와 자료를 기증하였다. 반 세기가 넘는 연구와 작품을 수록한《도널드 킨 저작집ドナルド・キーン著作集》(全 15권)이 올해 봄, 별권을 끝으로 완결될 예정이었다.
링크 : 도널드 킨(일본 위키피디아)
- 도널드 킨(Donald Keene, 1922년 6월 18일 ~ 2019년 2월 24일[1])은 미합중국 출신의 일본문학자 겸 일본학자. 콜롬비아대학 명예교수.
일본문화연구의 1인자로, 일본문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2][3]였다. 문예평론가로서도 수많은 저작을 남겼다. 일본문화를 유럽ㆍ미국에 소개하는 데도 어마어마한 업적을 남겼다. 케임브리지대학, 토호쿠대학, 쿄린대학 등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전미문예평론가상을 수상하는 등 수많은 수상이력이 있다. 2002년 문화공로자로 선정되었고, 2008년 문화훈장을 포장했다.
일본국적을 취득한 후, 본명을 출생명인 '도널드 로렌스 킨Donald Lawrence Keene'에서 카타가나 표기인 '킨 도널드キーン ドナルド'로 고쳤다. '킨 도나루도鬼怒鳴門'[주석 1]란 음차명도 사용하였다[4].
[1] 도널드 킨 별세, 96세(NHK 뉴스, 링크 깨짐)
[2] 도널드 킨 NHK 인물록(NHK 아카이브)
[3] 킨 씨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자 뉴욕에서 제자들의 추도회(도쿄신문 웹)
[주석 1] 키누 강鬼怒川과 나루토鳴門를 조합하여 만들었다[4][5].
[4] '키누 도나루도'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요미우리 온라인)
[4] '키누 도나루도'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요미우리 온라인)
[5] 도널드 킨 씨 별세 "일본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산케이 뉴스)
- 내력 -
출생
뉴욕시 브룩클린구에 있는 무역상 가정에서 태어났다.[6][7] 9세의 나이에 아버지와 함께 유럽을 여행했고, 이 경험을 계기로 프랑스어 등의 외국어를 습득하는 데 강한 흥미를 보이게 된다.[6][8] 그러나 세계공황이 한창일 때 여동생이 죽고, 15세가 되었을 때 양친이 이혼했다.[9] 이후 어머니와 함께 생활을 꾸려나가게 되어 경제적 곤란에 봉착했으나, 월반을 거듭하고 있던 킨은 뉴욕주의 최우수학생으로서 콜롬비아대학의 퓰리처 장학금을 타는 데 성공, 1938년(쇼와 13년) 16세의 나이에 콜롬비아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였다.[6][10][11]
[6] 도널드 킨 센터 카시와자키(사이트 홈페이지)
[8]《도널드 킨 자서전 - 증보신판》p.29~36(도널드 킨 저, 카쿠치 유키오幸男角地 번역. 츄오코론신사)
[9]《도널드 킨 자서전 - 증보신판》p.17~18(도널드 킨 저, 카쿠치 유키오 번역. 츄오코론신사)
[10]《도널드 킨 자서전 - 증보신판》p.37~39(도널드 킨 저, 카쿠치 유키오 번역. 츄오코론신사)
[11]《도널드 킨 나의 일본어 수행》p.18~28(도널드 킨, 카와지 유카河路由佳 저, 하쿠스이사)
같은 학교의 마크 반 도렌과 라이오넬 트릴링으로부터 훈도를 받아, 프랑스어와 고대 그리스어를 습득[6][7][11][12]했다. 같은 시기, 도렌의 강의를 듣다 중국인 유학생 리李와 친해지면서 이를 계기로 중국어, 특히 한자 학습에 이끌리게 된다.[7][11][13]
[11]《도널드 킨 나의 일본어 수행》p.18~28(도널드 킨, 카와지 유카河路由佳 저, 하쿠스이사)
[12]《도널드 킨 자서전 - 증보신판》p.40~42(도널드 킨 저, 카쿠치 유키오 번역. 츄오코론신사)
[13]《도널드 킨 자서전 - 증보신판》p.45~47(도널드 킨 저, 카쿠치 유키오 번역. 츄오코론신사)
제 2차 세계대전과 일본어와의 만남
1940년(쇼와 15년)의 어느 날,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과 같은 유럽정세를 보며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킨은 타임 스퀘어에서 떨이로 팔리고 있던 아서 웨일리 譯《겐지 이야기》를 입수하게 된다. 책 두께에 비해 저렴하다는 이유만으로 49센트를 주고 이 책을 구입한 킨은, 이윽고 작품의 세계에 매료되어간다[6][7][11][13][14].
[11]《도널드 킨 나의 일본어 수행》p.18~28(도널드 킨, 카와지 유카河路由佳 저, 하쿠스이사)
[13]《도널드 킨 자서전 - 증보신판》p.45~47(도널드 킨 저, 카쿠치 유키오 번역. 츄오코론신사)
[14] NHK 스페셜 "내가 사랑한 일본인에게 ~ 도널드 킨 문호들과의 70년 ~"(NHK온디맨드, 유료 영상)
이후로도 반일감정을 갖고 있던 리를 의식하여 일본어를 배우진 않았으나, 조지 헨리 카[주석 2]의 권유를 받아들여 폴 브룸(훗날의 CIA 초대 도쿄지국장)과 함께 유지들로 구성된 일본어 공부합숙에 참가했다.《사쿠라독본》을 교재로 삼아 일본계 미국인인 이노마타[주석 3]로부터 강의를 받았다[11][16]. 합숙이 끝난 후에도 최초에 애착을 갖고 있던 프랑스문학에 몰두할 것인가, 일본어 연구를 계속할 것인가 망설이던 킨은, 프랑스 출신인 브룸으로부터 "프랑스에서 자라나 완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미국인은 산더미처럼 많네. 그러나 일본어를 할 줄 아는 미국인은 거의 없지 않은가."는 논리로 설득되었다. 대학교에선 카의 권유를 따라 츠노다 류사쿠의 일본사상사를 수강하였고, 일본연구의 길에 입문하였다[15][17].
[주석 2] 자서전에는 "잭 케어"라고 표기되어 있다[15].
[주석 3] 그 후 이노마타는 콜로라도대학 해군일본어학교의 교원으로 근무했다[16].
[11]《도널드 킨 나의 일본어 수행》p.18~28(도널드 킨, 카와지 유카河路由佳 저, 하쿠스이사)
[16] 1930년대~50년대의 조지 헨리 카와 환태평양 문화교섭의 지정학(요시하라 유카리吉原ゆかり, 츠쿠바대학 리포지토리)
[15]《도널드 킨 자서전 - 증보신판》p.53~67(도널드 킨 저, 카쿠치 유키오 번역. 츄오코론신사)
[17]《비밀파일 CIA의 대일공작 (上)》p.224(하루나 미키오春名幹男, 신쵸사)
진주만 공격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42년 초,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교에 설립된 해군어학교[주석 4][주석 5]에 지원해, 미국 서해안으로 건너가게 된다[6][7][20][21]. 어학교에는 어학에 뛰어난 1류대학 학생들과 일본 내지 중국에 주재하고 있던 선교사ㆍ실업가들의 자제들이 모여들어, 일본어교육 커리큘럼으로 나가누마 나오에의《표준 일본어독본》[주석 6]을 교재로 삼아 언어의 습득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 있었고,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후 귀국한 일본계 미국인들이 교사를 맡았다[22]. 같은 해 6월 충수염에 걸려 해군병원에 입원했을 때, 히노 아시헤이의《땅과 병사》를 읽었다. 이것이 킨이 처음으로 읽은 일본문학 작품이었다[7][24]. 같은 해, 콜롬비아대학에서 학사학위를 취득하고 졸업하였다[7][25].
[주석 4] 미국 육군은 정보부[18]와 제 442연대 전투단 같은 곳에 일본인 2세가 활약할 기회를 터 주었으나, 미국 해군은 일본계 미국인의 입대를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일본계를 제외한 별도의 통역을 필요로 했다[19].
[주석 5] 전시법규에 의해 강사를 맡을 일본계 미국인의 미국 서해안 체재가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도중에 내륙에 있는 콜로라도대학으로 이전하였다[20].
[20]《도널드 킨 나의 일본어 수행》p.34~45(도널드 킨, 카와지 유카河路由佳 저, 하쿠스이사)
[21]《도널드 킨 자서전 - 증보신판》p.61~64(도널드 킨 저, 카쿠치 유키오 번역. 츄오코론신사)
[주석 6] 주일 미군 해군장교용으로 나가누마가 만든 교과서[22][23]
[22]《도널드 킨 자서전 - 증보신판》p.64~67(도널드 킨 저, 카쿠치 유키오 번역. 츄오코론신사)
[7] 일본에서의 도널드 킨 약년보 1922-1977(키타지마 후지사토北嶋藤鄕, 케이와가쿠인대학 연구기요)
[24]《도널드 킨 나의 일본어 수행》p.119(도널드 킨, 카와지 유카河路由佳 저, 하쿠스이사)
[25] '공지' 도널드 킨 씨에게 본 학교 명예박사학위 수여(쿄린대학)
[18] "그 전쟁에서 미국을 이기게 만든 건, 일본계 육군 정보부원들이었다"(스즈키 쥰이치, 현대 비즈니스)
[19]《도널드 킨 자서전 - 증보신판》p.74(도널드 킨 저, 카쿠치 유키오 번역. 츄오코론신사)
[23] 표준 일본어독본(도쿄일본어학교=나가누마 스쿨)
다음해인 1943년(쇼와 18년) 2월, 킨 등의 그룹은 군무의 시급함을 이유로 조기졸업하여, 킨은 졸업생 총대표로서 재학중에 숙달한 일본어 실력으로 '고별사'를 읊었다[22][20].
[22]《도널드 킨 자서전 - 증보신판》p.64~67(도널드 킨 저, 카쿠치 유키오 번역. 츄오코론신사)
[20]《도널드 킨 나의 일본어 수행》p.34~45(도널드 킨, 카와지 유카河路由佳 저, 하쿠스이사)
그 후 킨은 해군 정보장교로 하와이 번역국에 부임하여, 일과보고서ㆍ물자명세서 등 과달카날 전투에서 노획한 일본군의 문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 중에는 사망한 병사들로부터 압수한 일기도 포함되어 있었고, 초서체에 익숙해져 있던 킨은 즐겁게 이를 번역했다. 최후를 앞둔 마음이 적나라하게 직조된 자필 문서를 읽으며 킨은 일본인의 마음과 접해갔다[주석 7][14][26][29][27][28]. 통역관으로서 심문[주석 8]한 최초의 포로가, 훗날 작가가 된 토요타 죠豊田穣[30]다.
[주석 7] 그 중에는 일기를 발견하게 될 미국인에 대한 메시지로 "전후 가족들에게 이걸 보내주길 바란다."는 뜻의 영문이 주소와 함께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있어서, 이를 해독하며 병사들을 동정하게 된 킨은 이를 비밀리에 보관했으나, 나중에 압수당해버렸다[26][27][28].
[14] NHK 스페셜 "내가 사랑한 일본인에게 ~ 도널드 킨 문호들과의 70년 ~"(NHK온디맨드, 유료 영상)
[26]《도널드 킨 나의 일본어 수행》p.140~141(도널드 킨, 카와지 유카河路由佳 저, 하쿠스이사)
[29]《도널드 킨 나의 일본어 수행》p.46~47(도널드 킨, 카와지 유카河路由佳 저, 하쿠스이사)
[27]《도널드 킨 자서전 - 증보신판》p.70~71(도널드 킨 저, 카쿠치 유키오 번역. 츄오코론신사)
[주석 8] 이때의 심문은 동료였던 오티스 켈리가 주로 행하였다[30].
[30]《도널드 킨 나의 일본어 수행》p.143(도널드 킨, 카와지 유카河路由佳 저, 하쿠스이사)
[28] 도널드 킨 "내가 일본인이 된 이유"(PHP온라인 중지衆知)
그 후 오티스 켈리(훗날의 도시샤대학 명예교수)와 함께 애투 섬 전투에 참가하는 부대와 동행하여, 최초의 실전경험을 했다. 애투 섬에서 격렬한 저항을 하다 결국엔 집단자결로 죽어버리는 일본병들을 보며 킨은 당혹해 했다[주석 9][14][32][33]. 그는 이어서 코티지 작전에도 참가했으며, 키스카 섬 상륙부대의 일원에 포함되었다. 실제론 키스카 섬 철수작전에 의해 일본군은 이미 섬을 떠난 상태였으나, 킨에게 들어온 "표식"이 대소동을 일으켜, 대량의 혈청을 보내달라는 긴급전이 본국에 타전되었다. 그 간판엔 일본어로 '페스트 환자 수용소'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32][34]. 이것이 일본군 군의관의 장난이었다는 걸 킨이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다[32].
[주석 9] 훗날 "그 복잡기괴한 카라쿠리와 병사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하며 오다 마코토小田實의《옥쇄》를 번역했다[31].
[14] NHK 스페셜 "내가 사랑한 일본인에게 ~ 도널드 킨 문호들과의 70년 ~"(NHK온디맨드, 유료 영상)
[32]《도널드 킨 자서전 - 증보신판》p.71~79(도널드 킨 저, 카쿠치 유키오 번역. 츄오코론신사)
[33]《도널드 킨 나의 일본어 수행》p.142(도널드 킨, 카와지 유카河路由佳 저, 하쿠스이사)
[34] <패전으로의 서장>《아사히크로니클주간 20세기 일본인의 백년 78=1943년》p.7 (아사히신문사)
[31]《등불 아래 홀로이 = Sitting alone under the lamp : 도널드 킨 추도문집》p.235(도널드 킨 기념재단)
1945년(쇼와 20년)에는 오키나와 공략작전에 종군했다. 오키나와 본섬으로 향하는 도중, 탑승하고 있던 수송선이 카미카제 특별공격대의 표적이 되었으나, 특공기가 돌입 직전 다른 배의 돛대에 걸려 바닷속으로 추락하면서 목숨을 건졌다. 상륙 첫 날에 접촉한 현지주민들과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고, 오키나와에서 지내면서 이곳의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어 화자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날 늦은 시각에 일본어를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소년을 발견하여, 그를 통역으로 삼아 가마(자연동굴)에 숨어있던 주민들에게 투항을 권고했다[35]. 육군 제 96 보병사단이 어학장교를 모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거기에 지원[35]해, 주로 후텐마에 머무르면서 포로 심문을 담당했고 전선에선 스피커를 사용해 투항을 권고했으나, 승산이 없는데도 일본병들과 민간방위대는 자폭공격을 가해 오고, 여성과 아이들은 자살하는 모습을 목도해야 했다[주석 10][36]. 오키나와에서의 군무는 7월까지 계속되었고[37], 종전 옥음방송은 괌의 수용소에서 일본인 포로와 함께 들었다[38].
[35]《도널드 킨 자서전 - 증보신판》p.92~97(도널드 킨 저, 카쿠치 유키오 번역. 츄오코론신사)
[주석 10] "포로가 된 여성은 강간당하고, 아이들은 살해당한다"고 쓰여진 일본군 문서를 오키나와에서 목도한 킨은 이것이 바로 원인 중 하나였구나 하고 생각하며, "그렇기에 죽지 않아도 되었을 사람들까지 목숨을 끊었다. 일본군이 저지른 짓은 용서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36].
[36] "67년 전, 나는 전장에 있었다 일본국적을 취득한 도널드 킨 씨"(아사히신문 디지털 2018년 10월 25일 기사)
[37]《등불 아래 홀로이 = Sitting alone under the lamp : 도널드 킨 추도문집》p.16(도널드 킨 기념재단)
[38]《도널드 킨 자서전 - 증보신판》p.91~97(도널드 킨 저, 카쿠치 유키오 번역. 츄오코론신사)
일본의 포츠담선언 수락 후 킨은 일본에 부임하고 싶어했으나, 평소 사이가 나빴던 상관에 의해 이 청원은 수리되지도 않았고, 제 6 해병사단의 일원으로 중국 파견이 결정되었다. 부임지인 칭다오에선 당초 현지의 일본군인들과 양호한 관계를 쌓아갔으나, 얼마 안 가 혼란에 편승한 부패와 밀고가 난무하면서 전쟁범죄 취조에 염증을 느낀 킨은 귀국청원을 넣어 원대복귀 명령서를 받고서 이 땅을 등졌다[6][38].
[6] 도널드 킨 센터 카시와자키(사이트 홈페이지)
[38]《도널드 킨 자서전 - 증보신판》p.91~97(도널드 킨 저, 카쿠치 유키오 번역. 츄오코론신사)
귀로에 아츠키 비행장을 경유한 킨은, 처음으로 방문하는 일본을 돌아다니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원대의 현재지가 요코스카라고 '잘못' 보고했다. 요코스카 사령부에 출두해 자신이 '오해'를 했다고 신고할 때까지, 1주일에 걸쳐 일본에 머무르며 갓 전후가 된 일본 땅을 마음껏 활보하였다.[주석 11][6][39]
[주석 11] 군대에서 근무하면서 지금까지 알고 지내게 된, 포로를 위시한 일본인들이 무사히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그 가족들과의 만남을 시도한 후, 번역국 동료였던 일본계 2세와 함께 닛코 토쇼 궁 등을 방문하였다[39].
[6] 도널드 킨 센터 카시와자키(사이트 홈페이지)
[39]《도널드 킨 자서전 - 증보신판》p.98~105(도널드 킨 저, 카쿠치 유키오 번역. 츄오코론신사)
연구자로서
전쟁이 끝나자, 먼 미래에도 일본이 강대국의 지위를 되찾을 가능성은 없다는 생각은 일반적인 것이 되었고, 어학장교로 일했던 자들 중 다수는 일본어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한편 이전 직업이 없었던 킨 같은 경우는, 장래의 보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질적으로 부합한다고 느끼게 된 일본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복원병원호법 제도를 이용해 콜롬비아대학으로 돌아가 대학원에 입학, 다시 츠노다 류사쿠에게 사사했다[6][40]. 킨의 바람은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는 것이었으나 GHQ가 걸어둔 제약 등으로 인해 이뤄지지 못했고, 그 대신 중국으로 갈까 하고 생각하며 중국어회화 수업을 받았으나, 급우들로부터 중국의 불온한 정세를 전해듣고 단념했다[40]. 1947년(쇼와 22년)에 츠노다 밑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6][7].
[6] 도널드 킨 센터 카시와자키(사이트 홈페이지)
[40]《도널드 킨 자서전 - 증보신판》p.111~114(도널드 킨 저, 카쿠치 유키오 번역. 츄오코론신사)
[7] 일본에서의 도널드 킨 약년보 1922-1977(키타지마 후지사토北嶋藤鄕, 케이와가쿠인대학 연구기요)
같은 해 가을, 하버드대학교로 편입해 해군어학교 시절의 친구였던 조셉 레벤슨과 함께 공부를 계속하여, 에드워드 올드파더 라이샤워와 윌리엄 훙의 훈도를 받았다[주석 12][6][41].
[주석 12] 당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학자였던 세르게이 엘리세예프의 강의를 들었으나, 강의내용과 그의 스탠스는 킨을 실망시켰고, 훗날 킨은 교편을 잡았을 때 그를 반면교사로 삼았다[41].
[6] 도널드 킨 센터 카시와자키(사이트 홈페이지)
[41]《도널드 킨 자서전 - 증보신판》p.115~121(도널드 킨 저, 카쿠치 유키오 번역. 츄오코론신사)
1948년(쇼와 23년)부터 5년 동안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공부함과 동시에, 같은 대학의 강사로 일했다[주석 13][주석 14][6][7]. 케임브리지대학에선 버트런드 러셀의 총애를 받아, 술친구로서 교류했다. 이 시기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 그리고 자신이 일본어와의 연결고리를 갖게 만든 계기가 된《겐지 이야기》의 영역자 웨일리와도 교류했다[6][43]. 그 사이인 1949년엔, 콜롬비아대학 대학원 동양연구과 박사학위과정을 수료했다[44].
[주석 13] 1952년엔 '일본문학'에 관한 5회 연속강의를 열였으나, 250인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교실에 고작 10명밖에 들어오지 않는 걸 보고 좌절한 킨은 일본문학 연구를 포기하고 러시아어를 배우려 했으나 습득에 실패하고, (자신에겐) 일본어가 가장 잘 맞는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후 일본문학 연구를 계속했다[6][7].
[주석 14] 조선인 포로로부터 배웠던 경험을 살려 조선어 강사도 겸했는데, 이 때의 수강자 중에는 훗날 런던대학에서 한국어의 권위자로 통하게 된 윌리엄 스킬렌드가 있었다[42].
[6] 도널드 킨 센터 카시와자키(사이트 홈페이지)
[7] 일본에서의 도널드 킨 약년보 1922-1977(키타지마 후지사토北嶋藤鄕, 케이와가쿠인대학 연구기요)
[43]《도널드 킨 자서전 - 증보신판》p.124~140(도널드 킨 저, 카쿠치 유키오 번역. 츄오코론신사)
[44] "일본문학 연구가 도널드 킨 씨 별세, 96세"(니혼게이자이신문 2019년 2월 24일 기사)
[42]《도널드 킨 나의 일본어 수행》p.21(도널드 킨, 카와지 유카河路由佳 저, 하쿠스이사)
1953년(쇼와 28년),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출석하기 위해 영국을 찾았다 케임브리지를 방문한 아키히토 코우타이시明仁皇太子의 가이드역을 맡았다[45]. 같은 해, 포드 재단의 연구장학금을 받아 도쿄대학 대학원에 유학했다[7][46]. 도쿄 시 히가시야마 구 이마쿠마노의 하숙집 '무힌쥬안無賓主庵'[주석 15]에서 알고 지내게 된 나가이 미치오永井道雄와는 평생의 벗이 되었고, 나가이의 소개로 시마나카 호우지嶋中鵬二와도 친구가 되었다[48][49].
[45] (2페이지) 도널드 킨이 이야기하는 "죠우코上皇ㆍ죠우코고上皇后 두 폐하의 민낯"(후진코론 2019년 4월 23일 기사)
[7] 일본에서의 도널드 킨 약년보 1922-1977(키타지마 후지사토北嶋藤鄕, 케이와가쿠인대학 연구기요)
[46]《도널드 킨 자서전 - 증보신판》p.141~165(도널드 킨 저, 카쿠치 유키오 번역. 츄오코론신사)
[주석 15] 이 하숙집은 오티스 켈리가 킨에게 소개해준 곳이다. 현재는 도시샤대학 이마데가와 캠퍼스로 이축되었다[47][48].
[48] "킨 씨가 사랑한 "세계 최고의 집", 하숙 중에 운명의 만남을"(오오무라 하루오大村治郞, 아사히신문 디지털)
[49]《도널드 킨 자서전 - 증보신판》p.175~183(도널드 킨 저, 카쿠치 유키오 번역. 츄오코론신사)
[47]《도널드 킨 자서전 - 증보신판》p.368(도널드 킨 저, 카쿠치 유키오 번역. 츄오코론신사)
1955년(쇼와 30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콜롬비아대학 조교수[주석 16]가 되었다. 이후 같은 대학 교수를 거쳐, 1978년에는 케임브리지대학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992년(헤이세이 4년)엔 같은 대학 명예교수가 되었다.(1987년=쇼와 62년에서 1989년=헤이세이 원년까지의 2년간은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교수도 겸임했다)[51]
[주석 16] 케임브리지대학이 유학연장을 승인해주지 않았기에, 콜롬비아대학으로 다시 이적한 상태였다[50].
[50]《도널드 킨 자서전 - 증보신판》p.184(도널드 킨 저, 카쿠치 유키오 번역. 츄오코론신사)
1982년(쇼와 57년)에서 1992년(헤이세이 4년)까지 아사히신문사 객원편집위원을 맡았다[51]. 1986년(쇼와 61년)에는 콜롬비아대학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널드 킨 일본문화센터'가 설립되었다[51]. 1998년(헤이세이 10년)엔 와세다대학으로부터 명예문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51]. 1999년(헤이세이 11년)부터 '도널드 킨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51]. 2006년(헤이세이 18년) 11월 1일, '겐지 이야기 천년기'의 발기인이 되었다[51].
[51] 일본에서의 도널드 킨 약년보 1978-2014 <2>(키타지마 후지사토北嶋藤鄕, 케이와가쿠인대학 연구기요)
2008년, 외국인 학술연구자로선 역사상 최초로 문화훈장을 포장했다[51]. 2014년(헤이세이 26년)엔 교토 명예 관광대사로 위촉되었고, 2017년(헤이세이 29년)부턴 타하라시박물관 명예관장이 되었다[52][53].
[51] 일본에서의 도널드 킨 약년보 1978-2014 <2>(키타지마 후지사토北嶋藤鄕, 케이와가쿠인대학 연구기요)
[53] "(아이치) 도널드 킨 씨, 타하라시박물관 명예관장이 되다"(아사히신문 디지털 2017년 4월 4일 기사)
동일본대지진과 일본국적 취득
킨은 뉴욕과 도쿄를 반 년씩 교대로 거주하는 생활을 약 35년 간 계속해왔으나, 2011년(헤이세이 23년) 3월 11일 터진 동일본대지진을 계기로 일본국적을 취득해 일본에 영주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54]. 같은 해 9월 1일 영주 목적으로 일본을 찾은 킨은,
[54] "도널드 킨 씨가 일본국적 취득, 영주하기로"(요미우리신문사 2011년 4월 16일 기사, 링크 깨짐)
"기이하게도 와카나 모노가타리에는 옛부터 지진과 쓰나미 이야기가 조금도 나오지 않습니다. 자연의 무자비함을 한탄하면서도 폐허 그 자체를 놓아두지 않고, 몇 번이나 이전 이상의 것을 다시 건설해 온, 그것이 일본인입니다."
"미의식만 마음 속에 있다면, 형태를 갖춘 것을 상실한다 해도 반드시 재건할 수 있습니다."라며 토호쿠 지방에서 강연활동을 하였다[주석 17][57][58][59]. 2012년(헤이세이 24년) 3월 8일 귀화가 승인되어, 정식으로 일본인이 되었다[60][61].
[주석 17] 킨은 국적취득을 결의한 당시의 심경에 대해,
"제 생각은 지금까지 받아왔던 친절에 화답하려는 감사의 뜻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애의 마지막을 저에게 가장 깊은 애착을 갖고 계신 분들과 함께 보내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외국인이 일본에서 도망치고 있다는 뉴스에 낙담하였던 저는, 지금이야말로 가장 솔직한 모습으로 일본의 여러분들과 하나가 되어야겠다, 는 심정을 표명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라고 매듭짓고 있다[55].
한편, 킨과 친교가 있었던 터푸츠 대학의 찰스 이노우에는
"킨 씨는 계속해서 일본의 좋은 점을 언급해왔습니다만, 이제는 조금 더 나쁜 점 역시 말해야 하지 않나 하면서도 미국인의 입장에서 그렇게 말하는 건 곤혹스러워서 안 된다고. 사랑하는 일본을 외국인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게 아니라 일본인이 되어 쓴소리를 하고 싶었던 겁니다."라고 하였는데,
국적을 취득한 후인 2014년 이노우에에게 송신한 메일에서 킨은 "내가 걱정하고 있는 건, 일본인들은 내가 얼마나 일본을 사랑하는가, 하는 점만 들으려고 한다는 것이다."라고 서술했다[56].
[57]「"토호쿠는 분명 부흥한다" 일본영주를 위한 방일, 도널드 킨 씨 인터뷰」(요미우리 신문 2011년 9월 3일 기사)
[58] "도널드 킨 씨 사진특집"(시사닷컴)
[59] "토호쿠에 용기를 주고 싶다. 도널드 킨 씨, 센다이에서 강연"(아사히신문 2011년 10월 19일 기사)
[60] "도널드 킨 씨가 일본국적을 취득"(니혼게이자이신문 2012년 3월 8일 기사)
[61] <고시>《관보》5755호(국립인쇄소, 2012년 3월 8일자)
[55]《도널드 킨 자서전 - 증보신판》p.361~366(도널드 킨 저, 카쿠치 유키오 번역. 츄오코론신사)
[56] 도널드 킨 씨의 숨겨진 메시지(야부우치 쥰야籔內潤也, NHK 뉴스 웹 2019년 10월 4일 기사)
2013년(헤이세이 25년) 1월 24일, 키타구립중앙도서관 1층에 킨이 기증한 서적과 그림을 공개하는 '도널드 킨 콜렉션 코너'가 개설되었다[62].
[62] 키타구립도서관 중앙도서관 '도널드 킨 콜렉션 코너'(키타구립도서관)
같은 해 9월 21일, 과자 제조회사 부르봉이 니이가타 현 카시와자키 시에 킨의 업적을 소개하는 기념관 '도널드 킨 센터 카시와자키'를 오픈하였다[63].
[63] 설립취지(부르봉요시다기념재단)
2019년(헤이세이 31년) 2월 24일 6시 21분, 심부전을 일으켜 도쿄 도에 있는 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96세. 일본을 각별히 사랑했던 문학자의 죽음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주석 18][1][3][5][66][67][68]. 종 3위 관위가 추서되었다[69].
[주석 18] 킨의 사후 니혼카이신문은 "킨 씨는 일본문학과 역사를 세계에 소개하며 다대한 공적을 세웠다. 킨 씨에 따르면 바쇼는《오쿠노호소미치》에서 중국 시인 두보杜甫의 "국파산하재國破れて山河あり..."를 인용하며, 산하조차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가? 그것은『인간의 언어, 사詞』라고 (킨 씨는) 말한다. 깊은 통찰로부터 태어난 언어가 사람을 끌어당긴다."고 한 칼럼을 게재하였다.[64][65]
[1] 도널드 킨 별세, 96세(NHK 뉴스, 링크 깨짐)
[66] "일본문학 연구자 도널드 킨 씨 별세, 96세"(아사히신문 디지털 2019년 2월 24일 기사)
[67] "도널드 킨 씨 별세, 96세. 일본문학 연구자. 번역으로 국제화에 공헌"(마이니치신문 2019년 2월 24일자 기사)
[68] "96세로 별세한 도널드 킨 씨 양자인 조루리 샤미센 연주자 세이키 씨가 추도한다"(산케이뉴스 2019년 3월 28일자 기사)
[69]《관보》7179호(헤이세이 31년 4월 2일)
[64]《등불 아래 홀로이 = Sitting alone under the lamp : 도널드 킨 추도문집》p.215(도널드 킨 기념재단)
[65] '해조음海潮音'(카도나가 류이치門永隆一, 니혼카이신문 2019년 4월 27일 기사)
2020년(레이와 2년) 1월 8일, 양아들인 킨 세이키(양자 항목을 참조하라)는 도널드 킨의 기일인 2월 24일을 '킨 키黄犬忌'라 명명하고, 킨을 현창하는 이벤트를 매년 열겠다고 발표하였다[70]. 자택 근처의 절에 있는 비석에도 그가 유소년기에 길렀던 황색 애견의 일러스트와 함께 '킨黃犬'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37][71].
[70] "도널드 킨 씨의 기일은 '킨 키黃犬忌'. 자료도 공개한다"(아사히신문 디지털 2020년 1월 8일 기사)
[37]《등불 아래 홀로이 = Sitting alone under the lamp : 도널드 킨 추도문집》p.16(도널드 킨 기념재단)
[71] "특집 와이드 : 이런 시대이니만큼 문학을. 킨 키黄犬忌를 앞두고 양아들 세이키 씨와 함께 추도"(마이니치신문 2020년 2월 20일 기사)
덧글
가슴 깊이 애도하며 이제 영면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