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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두 얼굴의 전사가戰史家 파울 카렐 (3)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131호(2015년 6월호) 85~94쪽의 기사인,《파울 카렐의 두 얼굴 ~ 유명 전기작가의 감춰진 반생 ~》을 번역한 것으로, 오오키 타케시大木毅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냉전시대 독일의 저명한 전사가로, 세계 각국에서 그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던 파울 카렐Paul Carell의 과거 이력 - 나치로서의 행적 - 을 소개한 글이 되겠습니다.


  홀로코스트에 자발적으로 관여하다

  한편 나치 시대의 슈미트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반드시 언급해야 할 요소가 또 하나 존재한다. 홀로코스트에도 관여 - 그것도 자발적으로 가담 - 하였다는 것이다.

  1944년 3월, 독일군은 쿠데타를 일으킨 헝가리 친독파들과 함께 헝가리를 점령하여 지배하에 두었다. 이를 계기로 헝가리 유대인들의 강제이송이 개시되었다. 헝가리 점령 후 독일 전권대표로 헝가리에 부임한【 에드문트 페젠마이어 】는 이 유대인 정책이 국제적인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하여, 매일 상부에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 기만책을 헌책한 사내가 바로 슈미트였던 것이다. 그가 기초한 1944년 5월 27일자 각서를 아래에서 인용하겠다.

앞쪽 우측이 나치 보도국장 시기의 슈미트.(출처 : 트위터 '管区指導者' 님)


【 헝가리에서 계속되고 있거나 기도되고 있는 다양한 對 유대인 행동에 대해 검토한 결과, 6월엔 부다페스트에 있는 유대인들을 상대로 대규모 처치가 취해질 것이라 소관은 판단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계획되고 있는 행동들은 그 스케일로 볼 때 외국의 주목을 받고 격한 파장을 야기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적은 "인간사냥" 운운하는 쇳소리를 내면서 이를 잔학행위라 보도하며 자국은 물론 중립국의 여론도 선동하려 하겠지요. 그렇기에 본 행동에 대의명분을 부여하여 동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예정된 사태를 예방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하에 이하와 같은 제안을 드립니다.

  예를 들자면, 유대인 집회소나 시나고그에서 폭발물을 발견했다든가, 파괴조직이 존재한다거나 정부 전복계획이 있었다든가, 경관이 습격당했다느니, 헝가리의 통화체제를 침식할 목적으로 거대한 외화 밀거래가 있었다는 식의 이유를 위조하자는 것입니다. 】

  이 각서는 오래 전부터 경제방면에서 히틀러의 상담역을 맡으면서 당시에는 외무성 특무차관 지위에 있던【 빌헬름 케플러 】에게 제출되었다. 케플러는 슈미트의 제안을 무시하지 않고 오랜 친구였던 페젠마이어에게 사본을 송부했다. 여기까지는 밝혀진 사실이나, 슈미트의 각서가 어느 정도까지 현실의 헝가리 對 유대인 이송정책에 반영되었는지는 현재 남아 있는 사료가 빈약하여 재구성하기가 곤란하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슈미트가 보인 적극성이리라. 그는 주체적으로 나치즘을 추진하여 대략 20만 명에 달하는 헝가리 유대인들의 강제이송과 살육을 정당화시키려 했고, 이를 조장하기 위한 정책을 제시했던 것이다.


  '파울 카렐' 이란 가면

  순풍에 돛을 단 듯한 인생을 살아온 슈미트도 1945년, 최초의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그가 불멸하리라 믿었던 독일 제 3제국이 전쟁에 패하여 멸망한 것이다. 5월 9일, 슈미트도 독일로 진공해온 미군에게 체포되어 이후 2년 동안 억류생활을 보내게 된다.

뉘른베르크 재판을 받는 괴링 / 헤스 / 리벤트로프 / 카이텔(출처 : 한국 위키피디아)


  취조를 받는 동안에 슈미트는 아연할 정도로 무절조함을 보였다. 군사법정에서 검사의 심문을 받자 "나는 일개 통역관에 불과하다."고 뻔뻔하게 진술했다. 앞에서 언급한 동명이인과 동일인물인 척 하여 혐의를 면하려 한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 거짓말이 폭로되자 "사실 나는 나치즘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리벤트로프에게 벌을 받은 적도 있다."는 주장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독일 외무성의 기밀을 알고 있는 입장인데다, 나치 체제하에서 민주적인 보도 자유를 옹호해왔다고 자처하는 이 인물은 미군 입장에서도 이용가치가 있었다. 슈미트는 전범재판에 검찰 측의 증인으로 출석한 후, 석방되기에 이르렀다.

  자유를 얻은 슈미트는 곧바로 문필가로서 활동을 개시했다. 1940년대 말 ~ 1950년대의 독일 매스컴은 적지 않은 수의 전직 나치들과 슈미트의 옛 동지들이 지도적 입장을 점하고 있었기에, 그의 사회복귀는 무난하게 이루어졌다. 슈미트는 곧장【 디 차이트 】,【 디 벨트 】,【 데어 슈피겔 】등, 독일을 대표하는 신문잡지에 기고하게 되었다. 그가 집필한 논고엔 이 시기부터 이미 제 2차 세계대전의 개전책임이 독일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거나, 나치 범죄13 왜소화를 도모하려는 주장이 나타나고 있었다.

  '파울 카렐'이란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대였다. 처음에는 'P. C. 홀름'을 위시한 몇 가지의 필명을 사용했다가 서서히 파울 카렐로 통일되기에 이른다. 파울 슈미트란 이름은 독일에서는 흔해빠진 성명이긴 해도, 실명을 걸어서【 보도 슈미트 】였던 과거를 드러나게 해선 불리할 것이란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러나 파울 카렐이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한 슈미트에게 위기가 닥쳤다. 1965년 페르덴 지방검찰국은 헝가리 유대인 학살에 관여한 용의자인 슈미트 수사에 들어갔다. 앞에서 언급했던 그 각서가 시발점이 되어 당국이 움직인 것이다. 그러나 검찰 측은 그를 기소하는 데 실패했다. "문제가 된 각서는 분명 본인이 작성한 것이나, 이를 받아 본 페젠마이어는 관할 밖의 인간이 보내온 쓸데없는 제안이라 결론짓고 이를 각하했다."고 슈미트는 주장했고, 이 주장을 뒤집을 만한 증거도 증언도 없어서 1971년까지 이어진 수사는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하여 슈미트는 나치 엘리트였다는 과거를 일반인들에게 드러내지 않고 '파울 카렐'로 계속 행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를 정치적으로 왜곡하다

  본고에서도 이제부턴 (파울 슈미트 대신) '파울 카렐'로 그를 부르기로 하겠다. 힘겹게 형사소추를 면한 카렐은 잡지연재분을 정리한 후 가필한 원고를《사막의 여우》(1958)라는 제목으로 출간, 이어서《그들은 왔다》(1960)14를 간행하였다. 그러나 앞의 두 서적 이상으로 호평을 모은 책은《바르바롯사 작전》(1963)과《초토작전》(1966)이었다. 이들 책은 카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우파 재계인【 악셀 슈프링거 】가 경영하는 출판 콘체른의 전면적인 후원을 입고 100만 단위의 판매량을 자랑하는 베스트셀러로 등극했으며, 해외 십수 개 언어로 번역되기에 이르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다룬 카렐의 저작《그들은 왔다》(출처 : 미국 아마존)


  단, 카렐의 저작이 환영을 받은 것이 전적으로 슈프링거의 뒷배에 의한 것이었냐면 물론 그렇지 않았다. 그의 논술은 독일인의 입장에서 통쾌한 것이었다. 독일의 저널리스트【 오토 켈라 】의 말을 빌리자면, 카렐은 독소전쟁을 "영웅적인 독일인은 있었으나 독일인에 의한 대학살은 없었던" 전우애戰友愛로 굳게 뭉친 "청결한 전쟁"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냉전이 한창이던 시대적 수혜를 받아 이 책은 독일인 이외의 서유럽 국민들에게도 "압도적인 소련군에 맞서 용기와 뛰어난 작전으로 맞서 싸운 독일군"이라는 이미지를 크게 어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카렐의 저작이 내걸고 있던 테제에는 노골적인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었다.【 대소전은 스탈린이 계획하고 있던 독일 침공에 맞서 선수를 친 예방전쟁으로 히틀러도 국방군도 바라지 않는 것이었으며, 독일뿐만 아니라 전 유럽인들이 참가한 反 볼셰비즘 십자군이었다. 물론 히틀러의 판단미스, 그 이상으로 소련의 스파이들에 의해 정보가 새어나간 데다, 물량의 격차가 있었기 때문에 독일 국방군은 패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탈린그라드에게 패배한 이후에도 기동방어 전술로 소련군에 다대한 출혈을 입힘으로써 정전협정을 맺는 것이 가능했다.... 】그 어느 주장도 오늘날의 역사학 수준에서 보면 도저히 지지할 수 없는 주장들이다. 

  그 이상으로 간과되고 있는 건 주민학살 / 약탈 / 유대인 강제이송 등에 협력한 국방군의 범죄에 대해 카렐이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아버렸다는 점이리라. 그의 기록은 대소전을 미화하고 독일 국방군을 현창하기 위한 의도에 기반해 있었기에 자연히 그 저작도 진실과는 거리가 먼 '영웅 이야기' 이상은 되지 못했다. 훗날 독일 역사가【 크리스티앙 슈트라이트 】가 평했듯 "과거의 나치 외무성 보도국장은 절멸정책에 대해선 완전히 침묵"했던 것이다.

  물론, "그 어떤 역사도 완전히 객관적으로 쓰여질 순 없다."고 반론하며 카렐을 지지하는 쪽도 존재한다. 그 주장 자체는 옳은 말이다. 아무리 전직 나치가 집필한 책이라고 해도 올바른 수순을 밟은 사료비판 / 저술이 행해졌다면 그를 역사가로 평가하고 자료로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그러나 카렐은 과거를 숨기고 자기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는 역사적 이해로 독자들을 유도하려는 의도를 감추고서 자신의 저작을 '공정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논픽션'인 것처럼 가장했다. 여기에 가장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파울 카렐의 저서가 거의 전면적인 부정에 가까운 대접을 받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13. 예를 들면,【 1933년에 일어난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은 네덜란드인 공산당원 마리누스 판 데어 루페가 저지른 단독범행으로, 나치는 여기에 관여하지 않았다. 】는 주장을 들 수 있다. 물론 이 사건의 진상은 학문적으로도 아직 정설이 확정되지 않았다.

  14. 일본에서는 마츠타니 켄지가 번역한 이 제목이 정역이 되어 있으나, 원제인 'Sie kommen!' 은 영어로 번역하면 "They are coming!" 으로(독일어에는 현재진행형에 해당하는 시제가 없다), '놈들이 온다!' 정도의 뉘앙스이다.


덧글

  • PKKA 2019/02/07 19:25 # 답글

    번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트랙백하겠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9/02/07 21:22 #

    네. 트랙백해 주신 글 감사히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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