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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두 얼굴의 전사가戰史家 파울 카렐 (2)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131호(2015년 6월호) 85~94쪽의 기사인,《파울 카렐의 두 얼굴 ~ 유명 전기작가의 감춰진 반생 ~》을 번역한 것으로, 오오키 츠요시大木毅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냉전시대 독일의 저명한 전사가로, 세계 각국에서 그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던 파울 카렐Paul Carell의 과거 이력 - 나치로서의 행적 - 을 소개한 글이 되겠습니다.


  젊은 엘리트 관료

  1939년 2월 15일 외무성에 입성入省한 슈미트는 보도국報道局7에 배속되어 국장대리局長代理에 임명된 직후부터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리벤트로프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이 보스의 뒷배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며 세력확대를 도모했다. 이를 위해서 슈미트는 라이벌 조직이었던 정부보도국政府報道局 / 괴벨스의 선전성宣傳省과 알력을 벌이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슈미트의 보스이자 뒷배였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출처 : 위키피디아)


  결과적으로 그가 1940년 10월 10일 1등 공사8로 진급함과 동시에 보도국장報道局長에 취임했을 때는, (외무성) 부임 당초 일곱 명의 부원들밖에 없어서 "폐병영廢兵營" 이라는 험담을 듣던 보도국이 거대한 조직9으로 부풀어올라 있었다.

  슈미트는 이 부국部局을 자기 의도대로 조종했을 뿐 아니라 (거의) 매일 오후 1시부터 개최되는 기자회견을 스스로 주재했다. 이를 통해 슈미트는 기략機略을 과시할 수 있었으나, 동시에 그 자신이 대단한 야심가野心家라는 것도 드러내게 되었다. 이 기자회견에 참가한〈스웨덴 일간신문〉의 베를린 특파원【 알비드 프레도볼그 】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 그[슈미트10]는 대단히 영리할 뿐 아니라 임기응변에 능하고 기지가 풍부하며, 신랄한 답변으로 응수한다. 그는 도덕 외의 어떤 가책呵責도 느끼지 않으며, 언제 어떠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리벤트로프의 뜻에 가장 부합하는 성명을 낼 수 있는 자이다. [중략] 자신에게 지위地位가 제공되는 한 그 어떤 체제에도 찬동할 자임이 명백하다. 잇속에 밝은 권력의 노예다. 】

  국방군 최고사령부의 대외 대변인인【 마르틴 H 좀머펠트 】도 슈미트를 "빈틈이 없고, 경이로울 정도로 기민하다." 면서도 "직설적이고 거친 행동을 즐긴다. 소小 히틀러라 할 만 하다." 고 평가했다. 전후 미군米軍의 조사기록에서도【 외무성 정례기자회견의 공식 대변인을 담당하면서 수많은 베를린 주재 특파원들과 알게 되었음에도, 대체적으로 호감을 사진 못했다. 】고 적혀 있어, 머리는 비상하나 야심을 숨기지 않는 사나이로 정평이 나 있었던 듯하다.

  이러한 기자회견들을 통해 인상이 알려졌기 때문인지, '파울 카렐' 을 자처한 이후 슈미트는 자신의 사진을 일절 공표하지 않았다. 얼굴사진을 실어 버리면 자신이 '나치 엘리트' 슈미트였다는 게 드러나는 만큼,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독일 외무성 정치문서관 】등에 보관되어 있던 그의 사진 몇 장을 발굴 / 게재할 수 있었다. 아마 일본에서는 처음 공개되는 것이리라.(역주 : 지금 제게 스캐너가 없어 이 기사의 사진을 포스트로 옮기지 못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당시 독일 외무성엔 동성동명同姓同名이자 계급도 똑같은(1등 공사) 또 다른 '파울 슈미트'(단지 이쪽은 미들 네임이 '오토' 다)가 존재했다. 그 역시 외무성 관방장官房長이라는 요직에 앉아 있었고, 히틀러의 통역11을 맡은 중요인물이었던 만큼 두 사람을 구별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보도국장 슈미트는 '보도 슈미트' 내지 '파울 슈미트 프레제(=보도)'. 관방장 슈미트는 '통역 슈미트' 라 불리고 있었다.  


《지그날》정보

  그러나 전후 파울 카렐로서의 행동과 연동할 때 더욱 중요한 건, 슈미트가 선전지《지그날》의 편집에 관여했다는 점이다. 이 잡지는 외무성 / 선전성 / 국방군 최고사령부가 공동으로 벌인 사업으로, 독일군의 위업과 나치즘의 의의를 해외 각국에 호소할 목적으로 1940년 창간된 클럽잡지였다. 처음에는 영어 / 프랑스어 / 이탈리아어 / 독일어 4개 국어로만 발간되었으나, 1943년에 와서는 20여개 국의 언어로 판본이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창간호 당시 13만 6천 부였던 부수는 최성기엔 250만 부에 달했다. 전후에 여러 종의 복각판이 출판된 바 있으므로, 독자분들 중에 읽어보신 분도 계시리라 생각한다.

시칠리아 섬 팔레르모에서 다른 잡지들과 함께 진열된 지그날(출처 : 위키피디아)


  1983년《지그날》잡지에 관여했느냐는 질문을 받은 슈미트는 보도국, 그리고 자기 본인이 이 잡지에 행사한 영향은 "극히 미미한 정도" 였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그 후의 연구에 의해 실제론 슈미트가《지그날》편집부에 심복腹心을 앉혀 놓았다는 것이 폭로되었다. 이 잡지 편집부에 속속들이 답지하는 전선으로부터의 르포르타주들은 당연히 슈미트 자신도 접하였을 것이다.

  사실《지그날》에 게재된 기사제목만을 봐도, 훗날 파울 카렐로서의 저작물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반 볼셰비즘 전선 - 동맹군同盟軍, 지원병부대志願兵部隊, 무장친위대武裝親衛隊의 의용부대 】,【 유럽의 방패ヨーロッパの盾 - 독일군인의 정신적 기반 】,【 물량에 대항하는 사나이들 - 7인의 공병工兵과 그들의 중대장 】.....《지그날》의 편집방침은 "독소전쟁을 유럽의 反 볼셰비즘 십자군으로 위치짓고, 독일군의 영웅적이고 기사도적인 싸움을 강조하는 데" 있었다. 슈미트. 훗날 카렐이 된 그는 이 목적을 위해 '가공' 된 정보를 축적해 간 것이다.

  일본의 전사연구가들 중에서는 카렐의 저작을 "지금으로선 얻을 수 없는 당시의 귀중한 정보를 기반으로 쓰여진 만큼, 여전히 중요한 문헌이다." 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색안경을 낀 '정보' 에 적어도 한 다리를 걸친 저작을 그렇게 순진하게 신용해도 될지 모르겠다. 이후 지면에서 이를 다시 한 번 논하도록 하겠다.

  어찌됐든, 이와 같은《지그날》의 정보, 그리고 외무성 보도국장으로서 접한 기밀정보 덕택에, 슈미트 자신도 예기하진 않았겠지만 훗날 파울 카렐이 되기 위한 토대12를 구축하고 있었단 말이 되겠다.


  7. 정확한 명칭은【 뉴스ㆍ보도국 】이나, 여기서는 통칭을 따르겠다.

  8. 이 경우의 '공사' 는 직명職名이 아닌 외교관의 직계職階이다. 이 때 슈미트는 29세로, 독일 외무성의 최연소 1등 공사였다.

  9. 1945년 패전을 맞이하기 직전 시점에서, 외무성 보도국은 대략 200여 명의 다세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10. [] 사이에 들어가는 단어는 필자의 보충주석이며, 앞으로도 마찬가지.

  11. 자비출판이라 입수하기 힘들긴 하지만, 그의 회상록은 일본에도 번역되었다.(파울 슈미트,《외교무대의 조연》나가노 아키라長野明 번역, 1998년 출간)

  12. 슈미트가 편저한 책으로, 1940년에 간행된《지중해의 혁명 - 이탈리아의 생존권을 둘러싼 투쟁》이 있다. 슈미트가 '파울 카렐'로서 내놓은 최초의 저작은《사막의 여우》이나, 전쟁 도중에 위 책을 편찬한 경험 역시 훗날의 작품에 일부 반영되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덧글

  • 2018/12/31 13:4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12/31 17:1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9/01/01 23:1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9/01/02 09:1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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