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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두 얼굴의 전사가戰史家 파울 카렐 (1)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131호(2015년 6월호) 85~94쪽의 기사인,《파울 카렐의 두 얼굴 ~ 유명 전기작가의 감춰진 반생 ~》을 번역한 것으로, 오오키 츠요시大木毅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냉전시대 독일의 저명한 전사가로, 세계 각국에서 그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던 파울 카렐Paul Carell의 과거 이력 - 나치로서의 행적 - 을 소개한 글이 되겠습니다. 


  "파울 카렐요? 그가 쓴 책은 역사책이 아니에요."

  단칼에 잘라버리는 대답 앞에 필자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2000년, 포츠담에 있는 독일연방 국방군【 군사사연구국1 】을 방문했을 때 겪은 일이다. 이 기관은 (일본식으로 말하면) '제복조制服組'(자위관, 장교)들과 문관 스탭들이 군사사 연구에 함께 종사하는 곳으로, 학문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무렵부터 이미 파울 카렐의 기술記述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던 관계상, 필자는 이 기회에 필히 프로의 의견을 경청하고 싶은 마음에 연구원들에게 카렐에 대한 평가를 부탁했다. 그러자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전면적인 부정' 이라 할 수 있는 대답을 들려주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필자의 인식이 부족한 것이었다. 그 당시에도 카렐의 기술에 왜곡2과 과장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그렇게 네거티브한 평가를 받고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반면 군사사연구국 역사가들은 아마 선배 연구자들을 통해 귀엣말로 파울 카렐의 정체에 대해 전해들은 게 있었던 모양이다. 그랬던 만큼 필자를 깜짝 놀라게 했을 정도로 지극히 단호한 단정을 내릴 수 있었으리라.

  그런 카렐의 실태가 일반 독자들에게 폭로된 건, 그로부터 5년 후인 2005년의 일이다.


  폭로된 과거

  과거 일본의 전사 팬들 사이에서, 파울 카렐은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바르바롯사 작전バルバロッサ作戦》,《사막의 여우砂漠のキツネ》같은 일련의 저작들은,【 마츠타니 켄지松谷健二 】의 유려한 번역 하에 '압도적으로 우세한 연합군에 맞서 전술과 작전의 묘미를 구사해 용맹과감하게 싸우는 독일군' 이라는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심어주었다.

1971년 일본에 출간된 카렐의《바르바롯사 작전》(출처 : 일본 아마존)


  그 카렐이 나치 시대에 외교관外交官 / 정보장교情報將校3 지위에 있었다는 건 1960년대 후반 ~ 1970년대에 그의 저작이 일본에 줄줄이 번역출판되던 무렵, 이미 마츠타니 켄지의 역자 해설訳者解說에 명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카렐의 나이를 보면 그가 당시 외무성外務省의 고위관료였다고 생각하기가 힘들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눈에 띄는 짓은 하지 않았으리라는 과신이 독일 본국은 물론 일본에도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 독일에서 연구가 진척되면서, 카렐이 독일 외무성 보도국장報道局長 - 고위 관료라 불려도 지장 없는 - 지위에 앉아 있었음이 판명되었다. 히틀러 통치하에서 이 정도로 이례적인 출세를 했다는 건, 카렐의 세계관에 나치와 공명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2005년, 이 자연스런 의문을 둘러싸고 수치스럽기까지 한 대답이 나왔다. 독일의 역사가【 비그베르트 벤츠 】가 최초의 본격적 카렐 평전을 저술하면서 은폐되어 있던 과거를 들춰낸 것이다. 뒤이어 2009년에는 독일의 저널리스트【 크리스티앙 플레거 】가 자신의 박사논문을 기초로 삼은 연구서를 간행. 카렐이 나치의 엘리트였으며, 패전 이후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숨기면서 역사왜곡歷史歪曲을 벌여왔음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지금에 와선 파울 카렐은 공정중립성을 지닌 전사가는 고사하고, "독자들을 본인이 바라는 제 2차 세계대전의 이미지로 유도하려 한 일종의 데마고그(선동가)였다" 는 게 증명되었다.


위의 책이 벤츠 / 아래 책이 플레거의 카렐 평전(출처 : 독일 아마존)


  이러한 이해는 아직 일본에선 일반적으로 자리잡지 못했으나, 본국인 독일에선 이미 상식常識으로 자리잡았다. 우선 이러한 연구서들을 따라 카렐의 진정한 생애를 추적해보기로 하자.


  열렬한 나치였던 카렐

  파울 카렐. 본명【 파울 칼 슈미트Paul Karl Schmidt 】는 1911년 11월 2일에 튀링겐 지방의 마을 겔브라에서 태어났다. 중류층 가정에서 자라난 슈미트는 국민학교(폴크스슈레)를 거쳐 대학진학을 전제로 삼은 고전학교(김나지움)에 진학했는데,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각별한 특징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치즘에 경도되어 있었던 것이다. 김나지움 9학년(최상급생) 재학중이던 19세의 이른 나이에 슈미트는 나치스 당 입당을 신청하여 승인을 받았다. 입당 년 / 월 / 일은 1931년 2월 1일, 당원번호는 420853이었다. 그는 동시에 친위대親衛隊에도 입대하여 대원번호4 308263을 획득했다. 슈미트의 정치적 후각嗅覺은 실로 예리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 날로부터 약 2년 후인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는 정권을 차지하게 된다.

  그 후 슈미트는 군항軍港으로 유명한 독일 북부의 도시인 키르Kiel의 대학에서 수학했다. 재학중에 이미 나치로서 열렬히 활동했으며,【 나치독일학생동맹 】의 간부이기도 했다. 거기다 나치의 하부조직인【 非 독일적 정신에 반대하는 투쟁위원회 】의 회장직도 맡고 있었다. 그들이 내건 12개 테제의 구절 중 "유대인은 유대인적으로밖에 생각할 줄 모른다. 그들이 독일어를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이다. 독일어를 사용하면서도 비독일적으로 사고하는 독일인 같은 건, 배신자에 불과하다!" 는 문장을 보면, 슈미트가 지도한 단체가 어떠한 성격을 가졌는가 하는 것은 명백할 것이다. 그 후 1935년에는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대관구의 학생지도자 대리를 맡았고, 이후 대관구 연설담당관으로 임명되었다.

  1931년 이후【 키르 대학 】에서 국민경제 / 철학 / 교육학 / 국문학(=독일문학) / 심리학을 학습한 슈미트는 1935년에 심리학연구소 조수(신문학&출판 미디어 연구담당) 자리를 얻었고, 1936년에는〈인도 게르만어의 의미형성론에 대한 고찰〉이라는 학위논문學位論文5을 제출하여 박사학위博士號를 취득했다. 이러한 슈미트의 나치즘에 대한 충성심, 매스컴 / 프로파간다에 관한 전문지식, 웅변을 토하는 연설실력은 당과 정부 대물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리벤트로프(왼쪽)와 그를 보좌하는 슈미트의 모습(출처 : 트위터 'Hohenbrückner' 님)


  히틀러의 정권장악을 보좌했고, 훗날 외무대신外務大臣 지위에 올랐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Joachim von Ribbentrop 】도 그 중 하나였다. 1937년 4월 1일, 그는 슈미트를 자신의 사적 외교기관인【 리벤트로프 사무소6 】로 스카우트, 영국을 담당하는 제 10과의 과장으로 발탁했다. 이윽고 리벤트로프가 외무대신으로 취임하면서 슈미트는 이번엔 외무성에 채용되었고, 공사관 참사관參事官 직계職階를 부여받았다. 어떤 나라를 막론하고 정치논리에 따라 임명되는 대사 지위를 별개로 치면, 외무관료들은 전문적인 시험을 통해 선발된 후 직업적인 훈련을 받아야만 채용될 수 있는 게 보통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는 나치 체제 특유의 이례적인 인사였다고 할 수 있으리라.


  1. 우리 나라(역주 : 일본)의 전사총서戰史叢書에 해당하는《독일국과 제 2차 세계대전》시리즈를 위시한 수많은 연구성과를 거두었으며, 국제적인 평가를 얻었다. 2013년【 연방국방군 사회과학연구소 】와 통합, 이후【 연방국방군 군사사ㆍ사회과학센터 】가 되었다.

  2. 필자는 1986년 시점에서, 카렐의 '은빛 여우銀狐' 작전에 관한 기술은 실패의 책임을 핀란드군에 전가할 목적으로 왜곡한 면이 있다고 지적했었다. 졸고〈지구 정상의 전쟁 - 은빛 여우 작전 1941〉(오오키 츠요시 / 시카나이 야스시 공저《철십자의 궤적》, 코쿠사이츠신샤国際通信社, 2010년 수록)

  3. 정보장교였다는 말은 완전한 오류이다. 카렐은 군대에서 근무한 적이 없으며, 병역복무조차 경험하지 않았다.

  4. 정말로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카렐을 변호할 목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슈미트가 가지고 있던 친위대 계급은 고위 외교관에게 주어진 명예계급이다" 는 그릇된 정보가 인터넷 일부에서 유포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기록했듯이 카렐=슈미트는 외무성에 입성하기 전부터 친위대원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938년에는 고급 중대 지도자, 1940년에 상급 대대 지도자로 진급한 바 있다.

  5. 이 논문은 학술전문지인《총합심리학 아르히프》제 104권(1939년)에 게재되었고, 지금도 열람이 가능하다.

  6.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하자 리벤트로프는 외상 지위에 임명되고 싶어했으나, 전통적 보수파들의 아성인 외무성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자 리벤트로프는 자신의 사적 외교기관인【 리벤트로프 사무소 】를 개설, 외무성 권력 잠식蠶食을 도모했다.

덧글

  • PKKA 2019/02/07 19:18 # 답글

    폴(파울) 카렐의 실체에 대해서 일본 잡지에서도 논의하다니 놀랐습니다. 카렐은 자신의 나치 전력을 숨기고 깨끗한 독일국방군 신화가 서구의 일반 대중에게 전파되는데 지대한 기여를 한 사람으로 독일 애호와 국방군 전설이 아직도 강고한 일본에서도 그의 책이 베스트셀러로 판매된 걸로 아는데 2015년에 이런 기사가 역사군상에 실렸었군요.

    http://blog.naver.com/mungia/80103524463

    위 블로거분이 카렐 책을 번역하는데 너무 무비판적으로 소개해 걱정입니다. 이 책의 문제를 알고 있냐고 물어보니 중요한 자료라 생각해서 올리는 거라고 하니 참 난감하군요.
  • 3인칭관찰자 2019/02/07 21:20 #

    요즘 일본에서도 카렐 저서의 영향력은 많이 줄어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카렐 서적 인용하다 태클이 걸리는 경우도 많이 늘었고, 일본에서 좋은 평가 받으면서 꾸준히 팔리던 카렐 저서 일본어 번역본들도 100% 절판되어 버렸지요.

    일본 밀덕들 사이에서 독빠의 세가 죽은 건 물론 아닙니다만 독빠들조차 카렐의 저서를 내세우는 걸 자제할 정도로 카렐에 대한 평판은 나빠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카렐의 책을 번역하고 계시는 분이 있었군요... 7~80년대면 모를까 현재 시점에서 카렐을 재해석하려는 건 제가 보기에도 시대착오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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