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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키요시] 내 청춘わが青春 아오조라문고



  한국에도 '비교적' 많은 번역본이 출간되어 있는 저자분의 글인 만큼(입문철학, 인생론, 잡문&에세이 모음집 등. 인터넷에서 '미키 기요시' 로 검색하시면 결과가 뜰 겁니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미키 선생님의 글은 번역 포스트를 자제하려 합니다.
   



  1. 작년 말, 문득 생각이 나 옛적의 시고詩稿를 뒤져보다《이야기되지 않은 철학語られざる哲学》이라는 제목의 낡은 원고를 찾아냈다. 150매 정도 되는 글로, 오쿠가키(奥書, 역주 : 발문跋文)에는【 1919년 7월 17일, 도쿄 서쪽 교외인 나카노中野에서 탈고. 】라고 되어 있었다. 그 시절에는 9월에 새 학년이 시작되었으므로, 막 대학 2학년을 마친 내가 23세였을 때이다.

  기억을 떠올려보면 그 해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도쿄로 나온 나는 사가라 토쿠조相良徳三와 함께 나카노에 있는 조그마한 집을 임차하여 자취생활을 했다. 지금의 분엔쵸文園町 부근에 거주했다. 위의 원고는 그 때 쓴 것으로, 내가 태어나고 자란 심리적 과정을 고백록告白錄 풍으로 기록한 것이다. 원래부터 남에게 읽히기 위한 것은 아니었으나 다시 읽어보니 내게도 정겹게 느껴지는 것이, 내 청춘시대의 감상과 회의와 꿈이 담겨 있었다.【 진실한 가을 햇살이 비치면 내 모든 진심을 다해 걸어갈 것이다. 】라고 읊은 내가 거기에 있었다. 그 시절 나카노에는 아직 무사시노武蔵野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는 1고를 졸업하여 교토제국대학 문과에 입학하였지만, 교토로 이사한 후에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 무사시노의 풍경이었다. 산이나 바다보다 평야 쪽이 내 마음에 가장 합하지 않았었나 생각한다.

  교토로 간 건 니시다 키타로西田幾多郎 선생님 밑에서 배우고 싶어서였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가장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이 선생님의《선의 연구善の研究》로, 무엇을 할 것인지 아직 망설이고 있던 내가 철학哲学을 하기로 결심하게 해 준 책이었다. 또 하나는《탄이초歎異鈔》로, 지금도 내가 머릿맡에 두고 읽는 책이다. 최근 선禪이 유행하고 있지만, 내겐 아무래도 서민적인 정토진종浄土真宗 쪽이 반갑다. 아마 나는 이 사상을 따라서 죽어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훗날 파리의 하숙집에서 - 29세 때의 일이다. - 《파스칼의 인간 연구パスカルにおける人間の研究》를 집필하던 시기 이후로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건, 이와 마찬가지의 수법으로 신란親鸞의 종교에 관하여 집필해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시절 1고를 졸업하여 교토대학 문과로 진학하는 자는 없었고, 내가 최초였다. 그 후 타니가와 테츠조谷川徹三 / 하야시 타츠오林達夫 / 토사카 쥰戸坂潤 등의 제군들이 계속해서 들어오면서 대단히 시끌벅적해져, 동료 학생들의 기풍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입학하던 시기 교토대학 문과는 고등사범학교高等師範 출신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나 같은 자는 일단 이단자가 되기에 딱 좋은 형편이었다. 상시적으로 철학을 전공하는 학생은 극도로 적어서 우리 반은 나, 그리고 나와 같이 하숙하던 모리카와 레이지로森川礼二郎, 이렇게 두 사람 뿐이었다. 내가 괴짜였다면 모리카와도 괴짜였다. 그는 히로시마의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고 하며,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니시다 텐코우西田天香 씨의 잇토우엔一灯園에 들어간 인물이었다. 괴짜라면 내 고등학교 동급생으로 한 발 늦게 교토대학으로 온 오다 히데토小田秀人 같은 자가 그 중 제일로, 대학 시절에는 열심히 시만 쓰고 있다가 한동안 만나지 못한 사이에 심령술心霊術에 빠져 이윽고 오모토교大本教 신자가 되기도 했지만, 상당한 수재였다. 마찬가지로 1고에서 교토대학 철학과로 입학한 미즈치 오키조三土興三도 괴짜로 나는 그에게서 "가공할 만한 후배" 의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자살해버리고 만 것은 애석한 일이다. 만약 미즈치가 살아있었다면... 하고 지금도 생각하곤 한다.

  현재의 학생들과 비교한다면 우리들의 학창시절은 어찌됐든 낭만적이었다. 시대가 파란으로 가득하지 않아, 청춘의 낭만주의를 자유롭게 해방시킬 수 있을 정도로 평화로운 시대였던 것이다.


  2. 당시 교토제국대학의 문과대학은 일본문화사적으로도 하나의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을 것이다. 철학의 니시다 키타로 / 철학사哲学史의 토모나가 산쥬로朝永三十郎 / 미학美学의 후카다 야스카즈深田康算 / 서양사西洋史의 사카구치 타카시坂口昴 / 중국학支那学의 나이토 코난内藤湖南 / 일본사日本史의 우치다 긴조内田銀蔵 등등, 전국에서 모여든 쟁쟁한 학자들이 그 활동의 최성기를 보내고 계셨다. 거기에다 내가 교토로 간 해에 하타노 세이이치波多野精一 선생님이 도쿄에서, 그리고 다음 해에는 타나베 하지메田辺元 선생님이 도호쿠東北에서 교토로 오셨다. 내가 이러한 시대의 학생이었다는 건 자부심과 감사함 없이는 회상할 수가 없다.

  내겐 나름대로의 감상도, 회의도, 꿈도 있었던 청춘시절이었다. 대학 시절, 나는 약 1년간 시를 쓰는 데 열중한 적이 있다. 시가 완성되면 언제나 타니가와 테츠조에게 보여주고 비평을 받았다. 그 무렵 그는 아리시마 타케오有島武郎를 위시한 시라카바파白樺派에 경도傾倒되어 있었고, 나도 다소는 감염되어 있었다. 이러했던 내가 학생으로서 해야 할 공부를 등한히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위에서 언급한 여러 선생님들의 감화 덕택이다.

  대학 시절, 나는 서책보다 인간으로부터 더욱 많은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점을 대단히 행복하게 생각한다. 당시는 학생 수도 적었기에 교수와 학생들의 관계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친밀했다. 특히 나는 하타노 선생님과 후카다 선생님 댁에서 많은 음식대접을 받았다. 두 분 모두 술을 좋아하셔서, 내가 술에 강한 걸 아시자 그 분들을 뵈러 가면 반드시 술이 나왔다. 그렇게 만들어진 좌담의 자리座談の間에서 나는 교실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하타노 선생님으로부턴 그리스 고전ギリシア古典에 대한 열의를 이어받았고, 후카다 선생님에겐 예술뿐만이 아닌, 일반적인 문화文化 / 교양教養에 대한 의미를 배우게 되었다. 이 두 가지 영향 외에, 제 3의 영향으로서 특별히 기록해야 할 것이라면 사카구치 선생님께 물려받은 영향이다. 선생님이 집필하신《세계의 그리스 문명 조류世界におけるギリシア文明の潮流》라는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감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는 선생님 덕택에 세계사世界史라는 학문에 개안할 수 있었다. 당시의 교토대학은 철학과의 전성시대이면서 사학과의 전성시대였다. 그 후 내가 역사철학歴史哲学을 중심으로 삼아 연구를 진척시켜 나가게 된 것도,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내가 니시다 키타로 선생님께 가장 깊은 감화를 받은 것이야 굳이 기록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 무렵 선생님은《자각의 직관과 반성自覚における直観と反省》을 집필하시면서 처음엔《예문芸文》에, 그리고 이윽고 창간된《철학연구哲学研究》매월호마다 발표를 하셨다. 선생님께서 열심히 공부하시는 모습은 학생들에게도 찌릿찌릿하게 와닿아, 매일 아침 선생님 댁 앞을 지나쳐 학교로 등교하던 우리들은 2층의 문이 아직도 닫혀있는 걸 보고, "어젯밤에도 선생님은 밤늦게까지 공부하셨구나.." 라며 자주 모리카와 레이지로와 이야기하곤 했다.

  졸업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늦가을, 내게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어느 날 밤 교토 역에서 아리시마 타케오 씨를 배웅하고 돌아가는 길에, 오다 히데토와 토론하면서 혼간사 앞을 걷고 있던 나를 자동차가 친 것이다. 하마터면 죽을 뻔 했으나, 대단한 행운이 따라주었기에 왼쪽 어깨가 골절되는 정도로 끝나 1개월 가량 입원하였다. 그리고《비판철학과 역사철학批判哲学と歴史哲学》이라는 논문을 제출하고 졸업하였다. 24세 때의 일이다.

  그 해인 타이쇼 9년(1920)은 세계공황이 일본에도 찾아온 해였다. 평화로운 청춘이 끝나고 내 일생에도 다변한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내 청춘은 사실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쪽이 더욱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 《독서와 인생》쇼와 17년(1942) 6월호에 기고한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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