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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성 요한 기사단의 몰타 대공성전 (完)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4호(2000년 겨울호) 66~80쪽의 기사인,《몰타 대공성전 ~ 중세의 대미를 장식한 성 요한 기사단의 마지막 싸움 ~》을 번역한 것으로, 아리사카 쥰有坂純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16세기 중엽, 술레이만 대제의 뜻을 받들어 몰타 섬을 침공한 오스만 투르크의 4만 대군에 맞서 본거지 몰타를 지키기 위해 싸운 성 요한 기사단의 활약을 그리고 있습니다.


  구원군 도착과 오스만군의 패주

  그런 한편으로 기사단 쪽의 방비 역시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8월 20일, 공성탑攻城塔과 8천 명의 보병을 투입한 오스만군의 공격을 간신히 격퇴하긴 했으나, 비르구 방벽은 포탄砲彈과 지뢰地雷에 의해 참담할 정도로 파괴되었고, 다음 번의 강습强襲을 막아낼 수 있을 공산은 극히 저조했다.

  기사단 참사회에서는 비르구 시가를 포기하고 성 안젤로 요새 본체로 퇴각하자는 의견이 우세했으나, 드 라 발레트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비르구 포기는 두 반도의 전체적 방어기능 파탄을 불러온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있다. 협소한 요새에는 장병과 비전투원 전원을 수용할 방도가 없다." 고.

  기사단 측은 총장 아래 일원적 지휘통제가 잡혀있는 반면, 오스만군 진영에서는 두 명의 사령관이 격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무스타파 파샤는 몰타 섬에서 겨울을 나면서 공성전을 속행하자고 주장하였으나, 피알리 파샤는 그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으며, 풍향이 유리하게 불 때에 승선하여 제도帝都로 귀환해야 한다며 반대했다.

  격론을 끝장낸 건 보급 결핍이라는 현실이었다. 무스타파 파샤가 고대해 마지않던 북아프리카를 출항한 보급선補給船들이, 한 가득 실은 물자를 가지고 크리스트 교도들에게 나포拿捕당한 것이다. 이슬람 진영에는 이젠 1개월 분의 양식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9월 7일, 시칠리아 부왕【돈 가르시아 데 톨레도】가 친히 인솔한 함대가 드디어 내항하여, 라 발레트의 충고를 따라 섬 북동쪽의【멜리헤아 베이】에 약 1만 명 - 당초에 약속했던 1만 6천 명보다는 훨씬 소수였으나, 이것도 최대한 힘낸 결과였다 - 이 양륙揚陸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오스만군 진영에선, 두 지휘관이 세 번째 의견대립을 벌였다. 돈 가르시아 함대에게 마르삼세트 하버를 봉쇄당할 것을 우려하여 즉각 철퇴를 주장한 피알리 파샤에 맞서 원군 규모가 비교적 소수인 것을 파악한 무스타파 파샤는, 군 주력을 북상시켜 이들을 야전에서 섬멸하려 생각했다.

  결국 무스타파 파샤는 일단 북상하여 크리스트 교도들을 들이친 후【세인트폴스 베이】에서 피알리 파샤의 함대에 승선하여 조국으로 귀항한다는 타협안妥協案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 타협안의 결과, 오히려 그들은 마지막에 호된 타격을 입게 된다.

후퇴하는 오스만군과 교전하는 시칠리아 부왕 휘하의 군대
(출처 : 위키피디아 'García de Toledo Osorio, 4th Marquis of Villafranca')
 

  다음 날인 8일, 오스만군은 포위를 풀고 공성포를 선박에 실은 후, 육군병력만이 북상을 개시했다. 드 라 발레트가 보낸 급보를 받은 상륙부대는 고지대에 포진하여 우세한 적과의 야전을 회피하려 했으나, 이들에게 가담해 있던 기사수도회 회원들이 동지들을 위해 복수를 갈망하던 상황을 억누르진 못했다.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았음에도 중기병대는 돌격을 시작했다. 북동쪽에서 감행된 이 공격에 호응하여(내지는 호응한 것처럼 느껴지는) 임디나의 기사단 분견대도 남서쪽에서 오스만군에게 달려들었다.

  이미 전의를 상실해 있던 오스만군 장병들 다수는 공황상태恐慌狀態에 빠졌고, 전군이 조각조각 토막나려는 위기가 찾아왔다. 무스타파 파샤도 여러 번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으나, 그가 이 상황에서 보여준 의지력意志力과 통솔력統率力은 역시 '용장勇將' 이란 평가에 부끄럽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최후미부대를 맡아 주력부대 퇴각을 원호했다. 간신히 궤멸을 모면한 오스만군은 세인트폴스 베이에 도달했고, 총지휘관(=무스타파 파샤)은 가장 마지막으로 보트를 타고 섬을 뒤로 했다.

  오스만군이 떠나가면서【대공성전】도 끝이 났다.


  승리의 원인과 패배의 원인

  거의 대부분의 공성전이 그렇듯 몰타 대공성전도 적아군 쌍방에 비정하고 터무니없는 출혈을 강요한 싸움이 되었다.

  기사단의 준수한 방비태세와 구원군 도착이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는 건 말할 필요가 없으나,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선 병참兵站과 지휘통제指揮統制, 그리고 심리학心理學이 승패의 행방을 좌우했다.

  오스만군의 동원병력은 거대했지만 앞에서 서술했듯, 책원지策源地와 현장 간의 연락선이 터무니없이 길었고 보급품 추송追送과 겨울을 대비한 준비도 거의 되어있지 않았다.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비교한다면, 무스타파 파샤와 피알리 파샤가 드 라 발레트에게 뒤쳐진다고 단언할 순 없다. 단지 기사단의 사령관이 단 한 사람이었던 데 비해 오스만군에는 두 명의 사령관이 존재하여, 그들이 상호대립하든 상호협력하든 휘하의 군대가 좋은 영향을 받을 리는 없었다.

  그 같은 점은 장병들의 심리에도 영향을 끼친다. 전략ㆍ전술뿐만 아니라 인간심리에도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던 드 라 발레트는 자기 자신과 부하들에게 끊임없이 불가능을 요구했고, 인정情과 이치理를 쥐어짜내 이를 달성시키는 데 성공했다. 물론 이는 기사수도회라는【운명공동체運命共同體 조직】의 특수성에 의해 효과를 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샤를 라리비에르의 '몰타의 포위가 풀리다'
(출처 : 위키피디아 'Great Siege of Malta')


  한편 오스만군은 심리전에서 완전히 패배했다. 애초부터 병사들 개개인의 입장에선 무의미한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을, 무수한 희생이 집적된 결과로 성립되는 공성전에서 부대의 사기와 규율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다 임디나에 주둔한 기사단 분견대의 습격을 받아 본영을 파괴당하며 고급지휘관 본인들조차 일시적이나마 고립의 공포를 체감했을 때, 십중팔구 이 공포감은 순식간에 전군으로 전염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마침내 9월 8일의 패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엘리트 부대인 예니체리 군단만큼은 무스타파 파샤의 지휘하에서 정연한 규율을 유지했다고 하니,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거론할 만한 건 오스만군의 공격목표인데, 가장 방비가 약체했던 성 엘모 요새 공략에 바친 엄청난 희생을 감안하면 임디나와 내륙부 제압을 우선하고 그랜드하버 제압을 뒤로 돌리려던 무스타파 파샤(의외로 드라구트도 이쪽 안을 지지했다)의 제안도 매력적이라 느껴진다. 그러나 원정군의 생명선生命線은 해군력에 있다는 피알리 파샤의 주장도 타당한 것으로, 함대가 놓인 환경을 소상히 파악할 수 없는 이상 단순히 작전계획만을 비교하는 건 의미없다 생각된다.


  그 후의 몰타 섬

  전후 드 라 발레트는 성 엘모 요새에 치명상을 입힌 스케베라스 고지를 중심으로 당대 최신ㆍ최고의 설계를 섭취한 견고한 요새도시 건설에 착수했다. 이윽고 그의 이름을 따【발레타】라 불리게 된 이 도시는, 현재【몰타 공화국】의 수도이자【세계문화유산】이다. 드 라 발레트는 1568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발레타의【성 요한 대성당】에 잠들어 있다.

발레타의 주요 유적 / 관광지들
(출처 : 위키피디아 'Valletta')


  패배소식을 들은 술레이만 대제는 격노하여 친히 몰타 섬을 공격하겠다고 맹세했으나, 다음 해인 1566년에 헝가리 전선에 나섰다 진중에서 사망했다.

  드 라 발레트와 술레이만 대제의 죽음은, 십자군과 기사의 시대가 이젠 완전히 끝이 났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젠 몰타 기사단으로 불리게 된 성 요한 기사단은 이후 2세기 반 동안 몰타 섬에 주둔하였으나, 이교도異敎徒에 맞서는 초민족적 군대다운 정신精神과 능력能力을 상실한, 돈 많은 특권영주신분特權領主身分으로 전락해 갔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새로운 국민국가 시대의 영웅으로 등장한【나폴레옹】의 군대 앞에서, 기사단은 이제 제대로 된 항전抗戰도 해 보지 않고 섬을 양도했다.

  그리고 20세기에 접어들어, 몰타 섬은 연합군連合軍의 요새가 되어 추축군樞軸軍을 상대로【제 2차 대공성전】을 벌였다.

그랜드하버를 공습하는 이탈리아 폭격기
(출처 : 위키피디아 'Siege of Malta (World War II)')


  위의 싸움에서 몰타 섬을 끝까지 사수할 수 있게 한 건 옛날의 적지였던 북아프리카와 이어진 연락선에 힘입은 것으로, 그 땅에서 전개된 작전 중 하나의 이름은【크루세이더十字軍士】였다.


덧글

  • R쟈쟈 2018/11/13 00:28 # 답글

    잘 읽었습니다.

    시오노 할머니의 글을 되새겨 보면 무스타파 파샤는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하는데, 저런 결말이면 처벌이 없다는게 이상할정도네요^^;;
  • 3인칭관찰자 2018/11/13 21:11 #

    제위 올랐을 시절부터 시작된 오랜 주종관계라 제법 너그러웠을지도 모르겠습니댜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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