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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성 요한 기사단의 몰타 대공성전 (4)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4호(2000년 겨울호) 66~80쪽의 기사인,《몰타 대공성전 ~ 중세의 대미를 장식한 성 요한 기사단의 마지막 싸움 ~》을 번역한 것으로, 아리사카 쥰有坂純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16세기 중엽, 술레이만 대제의 뜻을 받들어 몰타 섬을 침공한 오스만 투르크의 4만 대군에 맞서 본거지 몰타를 지키기 위해 싸운 성 요한 기사단의 활약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스만 원정군

  크리스트 교 쪽의 해적집단海賊集團이라 할 만했던 성 요한 기사단을 상대로 일생 두 번째 원정을 발령한 술레이만 대제는 함선 약 200척 / 약 4만 명의 장병(이들 가운데 육상병력은 약 2만 5천 명)을 동원했다.

최전성기의 오스만 제국을 통치한 술레이만 1세의 초상화
(출처 : 위키피디아 'Suleiman the Magnificent')


  대제의 대리인代理人으로 원정군의 총지휘를 맡은 자는【무스타파 파샤】장군이었다. 아랍의 명문 가문 출신인 그는【이란 전선】과【헝가리 전선】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워온 노장으로, 거칠고 공격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면서 크리스트 교도들에게 커다란 적개심을 품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와 그의 주군 술레이만 대제, 적장敵將인 드 라 발레트 세 사람 모두가 1494년에 태어난 동갑내기란 사실은 흥미롭다. 무스타파 파샤의 입장에서 몰타 섬 공성전은, 그의 기나긴 군력軍歷의 대미를 장식할 만한 전쟁이었다.

  한편 해군부대 지휘는 젊은 제독【피알리 파샤】에게 일임되었다. 1530년 벌어진【베오그라드 공성전】당시 오스만 군대에 거두어진 크리스트 교 측 고아孤兒였던 그는, 술탄의 궁정노예宮廷奴隸로 양육된 후 이윽고 해군장교로 두각을 드러낸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그는 드라구트의 함대와 혐력하여 이탈리아 연해에서 유격전을 벌여 크리스트 교도들에게 심대한 손해를 입히면서, 대제의 총애를 받으며【셀림 왕자】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바 있었다.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될 존재가 바로 제국 해군력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일부一部인 북아프리카 해적을 지휘하는 '제국해군 기지장관'【토르고우드 레이스】, 서유럽에서 '드라구트' 라 부르는 바로 그 사람이었다.

드라구트 레이스의 초상화
(출처 : 위키피디아 'Dragut')


  1485년 아나톨리아에서 태어난 그는【바르바로스 하이레딘】을 섬겼고, 1546년 하이레딘이 죽은 후엔 그 후계자가 되어 크리스트 교도들의 함선뿐만 아니라 연해지역에까지 통렬한 타격을 계속 가하고 있었다. "칼집에서 뽑힌 이슬람의 검" 이라 불리던 그는 논리적인 지성의 소유자로 인심통찰에 능란했으며, 숙련된 뱃사람이자 육지의 싸움에도 능했던 강자로, 그에게 대적하여 싸워 본 크리스트 교 측의 某 제독은 "하이레딘 이상 가는 장재將才를 지녔다." 고 절찬한 바 있다.

  몰타 섬의 긴요함을 누구보다도 정확히 이해하고 있던 드라구트는 여러 번 대제에게 섬 공략을 상표上表한 바 있었고, 결국 이 원정군 출사出師에 참가했던 것이다. 그는 원정군 본대에 합류하진 않았으며 정규 인사발령도 받은 바 없으나, 고급지휘관들은 이 나이 든 뱃사람의 발언 앞에 언제나 한 수 접어주고 있었다.

  육상부대 약 2만 5천 명의 중핵을 이루는 전력은 정예【예니체리】군단의 보병 약 6,300명이었다. 크리스트 교도 소년들만 선발하여 징집하는 유명한 '데우시르메 제도'(강제징용)에 따라 교육받은 이들은, 엄격한 훈련과 규율을 주입받아 고도의 기량技量과 왕성한 전의戰意를 과시하고 있었다.

리하르트 크뇌텔이 묘사한 예니체리
(출처 : 위키피디아 'Janissaries')


  그들의 경탄스런 장비裝備 / 전술戰術 / 지휘통제指揮統制, 그리고 병참시스템 수준은 중세中世의 굴레를 아직도 완전히 벗지 못한 동시대 서유럽 국가들이 보유한 군대에 비해 명백히 한 세기는 진보되어 있었다. 일부 고급장교高級將校를 제외한 거의 전원이 일개 병졸兵卒 신분에서 군력을 시작하며, 능력能力에 따라 승진이 결정된다는 점도 예니체리 군단을 강대하게 만드는 커다란 요인이기도 했다.

  제국 각 주로부터 징모된 정규병인【시파히】군단 중에서도 약 9천 명이 동원되어, 수적數的인 주력을 형성했다. 그들의 명칭은 때때로【경기병輕騎兵】과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나, 이 원정은 공성전 위주였기에 그 태반은 보병으로 종군하였다.

  전투서열에서 주목해야 할 집단은【라야랄】이라 불리는 약 4천 명의 특수부대로, 광신자들 가운데서 선발한 자들에게 마약을 복용시킨 후, 전장에 투입하여 아군의 손해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만을 계속하도록 하는 문자 그대로의 '결사대決死隊' 였다. 공성전의 경우, 방어시설 파구破口에 가장 먼저 강습을 감행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이들 외에도 제국 각지에서 징집된 지방부대, 크리스트 교도 내지 유대 교도에서 전향한 자 내지 망명해온 자 중심으로 이루어진 지원병 부대를 합하여 약 9천 명이 종군하고 있었다.

  화력전火力戰은 오스만군이 특기로 삼는 분야로, 공성전의 진정한 주역이라 할 수 있는 공성포攻城砲를 준비하는 데 그들은 태만하지 않았다. 원정군의 함선에 탑재되어 있던 포탄은 약 8만 발 / 화약은 15,000 퀸틀(1킨틀 = 약 100파운드 = 약 50kg)에 달했으며, 보병용 화기의 화약은 25,000 퀸틀 정도였다. 

 
  상륙과 공성전 개시

  1565년 4월, 원정군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제국해군기지를 출격했다. 성 엘모 요새의 망루에서 그 함대의 위용을 수평선 너머로 확인한 건 5월 18일. 드 라 발레트는 즉시 총원을 부서에 배치시킴과 동시에 쾌속선을 보내 이 급보를 시칠리아 섬에 알렸다.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투르크 함대는 약 200척. 구원을 부탁한다."

  원정군의 총지휘관 무스타파 파샤의 당초 계획은 섬 북부에 상륙하여 남하를 개시, 중심도시인【임디나】를 때리는 데 있었다. 함대는【가인 투피에나 베이】에 일단 정박했으나, 부근에 상륙할 만한 장소를 찾을 수 없었기에 새벽이 되기를 기다렸다 다시 닻을 올려 섬 남쪽으로 향했다.

몰타 섬에 상륙한 오스만군을 그린 그림
(출처 : 위키피디아 'Great Siege of Malta')


  그리고 함대는【마르사 시로코 베이】에 다시 닻을 내린 후, 19일~20일에 걸쳐 병력과 물자를 상륙시켰다. 그리고 마르사 시로코 베이 북쪽에 있는【제이툰 마을】에서 군무장관【드 코피에】가 지휘하는 기사단 정찰부대와 북진하던 오스만군 전위대 사이에 최초의 전투가 벌어졌다. 단시간의 조우전 끝에 오스만군은 기사단 정찰부대를 구축驅逐했고, 그날 내로 마르사까지 진군하여 그랜드 하버 깊숙히 들어왔다.

  기사단은 성 안젤로 요새 전면으로 교묘하게 오스만군 일부를 끌어들여 21명의 전사자를 내는 대신, 적군 약 300명에게 손해를 입혔다. 그러나 무스타파 파샤는 이 서전의 국소적 실패에 아랑곳하지 않고 익숙한 지휘능력을 발휘하여 대군의 부서를 정한 후, 다음 날에 이르러서는 공성진 설영設營을 완료하였다.

  육군 장성陸將인 그는 임디나 공략에 계속 집착하고 있었다. 임디나를 탈취하면 섬 대부분은 저절로 제압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성 안젤로와 성 미셸 양 요새는 느긋하게 장기적인 공성전을 벌여 확실히 함락시킬 수 있다. 그랜드 하버 쪽은 함대의 일부를 쪼갠 분견대를 보내어 봉쇄하고, 또 다른 분견대로 하여금 섬 북쪽 해면에 나타날 시칠리아 섬의 원군을 차단한다. 성 엘모 요새는 방치해 둬도 상관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군사회의 석상에서 피알리 파샤가 해군의 입장에 근거해 이 작전계획에 강경한 반대의견을 냈다. 그는 우선 마르사 시로코 베이가 대형선박이 정박하기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보다 안전한【마르삼세트 하버】를 가급적 신속히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기사단은 소규모이긴 하지만 함대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이 그랜드 하버로 접근하도록 놔두는 것은 대단히 우려스럽다고 경고했다.

이스탄불 해군 박물관에 있는 피알리 파샤흉상
(출처 : 위키피디아 'Piali Pasha')


  도서전투의 열쇠를 거머쥐는 것은 육지가 아니라 바다이며, 그러므로 마르삼세스 하버와 그랜드 하버를 관제할 수 있는 성 엘모 요새를 공략하는 것이 최우선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격론이 벌어진 끝에 피알리 파샤의 안이 채용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오스만군 주력에겐 즉각【스케베라스 반도】를 향해 진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드 라 발레트가 이전부터 걱정하던 대로 요새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절호의 포격지점이 될 수 있는 스케베라스 구릉지대의 능선에 공성포가 배치되었다.

  성 엘모 요새 공격은 24일부터 개시되었다. 오스만군은【바실리스크】란 이름의 160파운드 거포巨砲 1문과 80파운드 포 10문, 60파운드 포 2문을 배치하여 집중사격을 벌였다. 역전의 노병老兵들이 많았던 오스만의 포병들은 방어시설의 어느 부분에 어떤 식으로 포격을 때리는 게 효과적일지를 정확히 숙지熟知하고 있었다. 대략 몇 시간이 지나자 요새 외벽에 균열龜裂이 생겼다. 이러한 포격과 병행하여 교묘한 위장 하에 해자 굴삭濠掘削이 실시되어, 소화기小火器들의 지원하에 복수複數의 방향에서 보병들이 조금씩 조금씩 요새로 접근하였다.

  성 엘모 요새의 조기공략을 확신하고 있던 무스타파 파샤는 포 일부를 이동시켜 25일, 기사단의 본거지인 성 안젤로 요새에 사격을 개시했다.

  성 엘모 요새 수비대의 당초 병력은 약 700명 정도였으나, 성 안젤로 요새와의 연락선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은 호재로 작용했다. 매일 밤마다 보트를 통해 부상자를 후송시키는 대신, 지원자들로 구성된 보충병 부대가 보급품과 함께 스케베라스 반도로 건너왔던 것이다.

  덧붙이자면 15일, 오스만군 전선을 시찰하던 피알리 파샤가 포탄 파편을 맞고 중상을 입어, 당분간 지휘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덧글

  • R쟈쟈 2018/10/21 11:06 # 답글

    입안자의 중상이라....투르크 입장에서는 묘하게 돌아갈듯한 느낌이 드네요.

  • 3인칭관찰자 2018/10/21 14:52 #

    스포가 될 수 있겠지만 리타이어하진 않습니다.

    저자분은 지휘계통 이원화를 오스만군의 약점 중 하나로 지적하시더군요. 무스타파나 피알리 둘 중 하나에게 통괄적인 결정권한이 있는 게 오스만군에겐 나았으리라는 뉘앙스로....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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