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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성 요한 기사단의 몰타 대공성전 (3)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4호(2000년 겨울호) 66~80쪽의 기사인,《몰타 대공성전 ~ 중세의 대미를 장식한 성 요한 기사단의 마지막 싸움 ~》을 번역한 것으로, 아리사카 쥰有坂純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16세기 중엽, 술레이만 대제의 뜻을 받들어 몰타 섬을 침공한 오스만 투르크의 4만 대군에 맞서 본거지 몰타를 지키기 위해 싸운 성 요한 기사단의 활약을 그리고 있습니다.


  16세기의 전쟁

  유럽 세계에서 전쟁과 군대의 양태는【이탈리아 전쟁(1494~1559)】으로 인해 일변하였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실용적인 화기 - 총기銃器와 공성포攻城砲 - 의 보급을 근저로 삼아 이루어진 변모였다.【나폴리 왕국】의 왕위를 요구하며 이탈리아 반도로 진공한 프랑스 국왕【샤를 8세】의 군대 앞에, 이탈리아 여러 국가들의 방비는 그야말로 무력하였다.

 피렌체로 무혈입성하는 샤를 8세의 군대
(출처 : 위키피디아 'Italian War of 1494–1498')


  그렇다고 해도 야전野戰 쪽의 경우엔, 화기의 출현이 반드시 결정적 / 단기적 변화를 일으킨 건 아니었다. 화승총火繩銃의 유효사정거리는 기껏해야 수십 미터에 지나지 않았고 발사속도도 느렸으며, 기동력도 비교적 저열했다. 화력만으로 전장을 지배한 사례는【후스 전쟁(1419~1485)】에서 목격된 특수한 사례를 예외로 친다면 원칙적으로 전무하다시피 했고, 지휘관들은 총병銃兵과 장창병長槍兵, 중기병重騎兵을 적절히 조합하여 상황에 따라 운용을 달리해야만 했다.

  그러한 제병과 연합전술이 정형화될 때까진 실로 오랜 시간과 무수한 실패의 교훈이 필요하였고, 17세기에 접어들어 전술이 확립되면서 드디어 야전의 영역에서도 "군사혁명軍事革命" 이 보급된 것이다.

  한편, 공성전의 영역에서 화기가 미친 실효성은 절대적이었고, 그로 인한 변화 역시 결정적이었다.

  십자군 시대엔 목재木材로 축성되던 성채城砦가, 중세 중엽에 접어들면 석재石材로 건축하는 것으로 일반에 자리잡았다. 수직으로 깎아 오른 외벽을 쌓아올리고, 협간狹間과 탑 등의 방어시설을 구축한, 영화 등으로 익숙해진 "기사의 성" 이다. 도시의 방비도 규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성채의 그것과 차이가 없었다.

십자군 전쟁기의 난공불락 성채 '크락 데 슈발리에'
(출처 : 위키피디아 'Krak des Chevaliers')


  이와 같은 중세식 성채는, 샤를 8세가 가지고 온 대형 공성포의 사격 앞에 조금도 버티지 못했다. 아무런 지지대支持臺도 완충재緩衝材도 없이 높다랗게 쌓아올렸을 뿐 너무나 얄팍했던 성벽은, 착탄着彈과 동시에 간단히 상처를 입으면서 붕괴해 무너졌다.

  그러나 포의 도입에 따른 공격 측의 우위도 그리 오랫동안 이어진 건 아니었다. 옛날부터 군사軍事란 건 언제나 상대적으로, 이때도 전쟁에서 얻은 교훈을 학습한 기술자들이 새로운 전쟁에 적합한 축성술築城術을 뚝딱 개발하여 대응한 것이다.

  이윽고 '이탈리아식 축성술(트러스 이탈리아노)' 이라 불리게 되는 이러한 축성술의 기본개념은, 능보稜寶와 누벽累壁이 중심이 되었다. 요새 본체의 바깥 둘레에 반쯤 독립된 능보가 돌출되어 측방사격側方射擊으로 최대한의 상호지원을 실시한다. 외벽의 높이는 최소한으로 억제되는 대신 극히 두터운 토루벽으로 보강되어, 포탄의 위력을 감쇄시켰다. 능보 앞에는 넓은 해자와 경사진 제방이 설치되어, 근접해 있는 적 보병을 사격할 시계視界를 확보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성곽에서 돌출된 '능보稜堡'의 단면 그림
(출처 : 위키피디아 'Bastion')


  이 이탈리아식 축성술을 이용해 만들어진 요새는 지금까지와 같은 단순한 포격만으로 함락하는 게 불가능했으며, 강습强襲을 감행하는 건 명백한 자살행위였다. 이에 이르자 공격 측도 요새 측과 마찬가지로 대규모의 과학적 토목공사를 그 최대의 무기로 쓰기에 이른다. 즉 해자를 굴삭掘削시켜 근접부대를 방호하고, 갱도坑道를 굴삭ㆍ폭파시켜 방어시설을 파괴하는 등의 전술이다. 머나먼 미래에 벌어진【러일전쟁(日露戰爭, 1904~1905)】의 '뤼순 전투旅順戰' 까지 이어지는 축성술과 공성술攻城術의 대결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위와 같은 사례들 모두가, 전쟁수행에 들어가는 경비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게 했다. 공성포의 가격은 현재의 전략 핵잠수함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였다. 보병용 총기 같은 경우 저렴하긴 했으나 막대한 화약火藥을 항상적으로 조달調達하고 관리管理해줘야 했다. 요새 건설 내지는 공성에 필요한 인원人員ㆍ자재資材의 조달에 이른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전쟁은 드디어 대규모적이고 직업적인 사업이 되어, 군대는 대국大國들의 독점물이 되어 갔다. 십자군 운동十字軍運動의 의의는 망각되고, 기사騎士와 수도회修道會가 실력을 가지고 있던 시대는 끝이 나려고 했다. 몰타 섬에서 벌어진 성 요한 기사단의 전쟁은, 전투집단인 그들 자신의 마지막 전쟁이 되었을 뿐 아니라(기실 "대공성전" 이후 기사단은【레판토 해전】등에 참가하였지만) 군사적인 면에서도, 중세中世의 종언과 근세近世의 도래를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 번외 - 이탈리아식 축성

  이탈리아식 능보축성술은 15세기 말 (프랑스) 샤를 8세의 침략을 계기로 태어났다. 이는 적의 공성포를 견뎌낼 수 있는 축성계획을 지향한 전환이자, 접근해오는 적에 맞서 유효히 화력을 발휘하는 수단을 모색한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능보식 축성술은, 훗날 네덜란드 / 프랑스 / 독일 등을 위시한 유럽 각국에서 채용되었다. 

  1400년 무렵의 전형적인 중세성곽도시 : 높은 석조 성벽을 두른 중세 유럽식 도시. 이러한 구조를 지닌 성곽은 압도적인 위력을 과시하는 공성포 앞에서 줄줄이 파괴당하고 말았다. 이러한 화력에 대항하기 위해 축성술 쪽도 일거에 변모하게 된다.

  1500년 무렵 공성포 출현으로 일어난 변화 : 강력한 공성포가 보급되면서 높은 성벽과 벽탑은 쉽게 파괴당하게 된다. 그렇기에 포탄의 충격을 흡수하기 쉽도록, 응급수리가 간단한 흙으로 성벽을 둘러싸듯이 약점보강을 도모했다. 이것이 '능보' 이다.

  1600년 무렵의 능보요새 출현 : 수비측도 대포로 반격할 수 있게 되면서, 대포 탑재에 불리한 높다란 성벽이 철거되고, 높이는 낮으나 두툼한 누벽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당초에는 응급시설에 가까웠던 능보도 보다 내구성 높은 석조시설로 변모했다. 

  높은 성벽은 포격의 훌륭한 표적이 되어갔던 데다, 포격에 의해 튀어 날아오는 파편은 수비병들에게 커다란 피해를 입혔고, 포상砲床으로 이용하기도 곤란하여 화포의 우위 앞에 서서히 자취를 감추어 갔다. 이를 대신하여 출현한 것이 높이는 낮으나 두툼한 누벽으로, 그 전면에는 적을 소탕할 목적으로 경사면斜提이 축조되었다. 이로 인해 수비 측은 적의 움직임을 샅샅이 감시하면서 방어시설을 온전히 은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기사단의 전비戰備

  몰타 섬 최대의 도시는 내륙에 위치한【임디나】로, 구식 성채가 존재했음에도 기사단은 현명하게도 이곳을 방어중핵으로 삼지 않고 약간의 수비병력만을 주둔시키는 데 그쳤다.

  이 섬이 지닌 전략적 가치의 원천은 천연의 양항良港인 동부의【그랜드하버】에 있었다. 기사단은 그랜드하버 남쪽 해안에 위치한 통칭【갤리 유입구】를 함대 정박지로 정했다. 후미의 동편을 이루고 있는【비르구 반도】에는 도시(오늘날의 '비토리오사')가 있어서, 반도 끄트머리에【성 안젤로 요새】가 축성되었다. 이 요새의 사명은 갤리 유입구와 비르구를 직접적으로 방어함과 동시에, 그랜드하버를 관제하는 데 있었다.

유적지가 된 오늘날의 성 안젤로 요새
(출처 : 위키피디아 'Great Siege of Malta')


  한동안 그 상태 그대로 놓여 있던 섬의 방비 강화가 시작된 건, 1551년에 벌어진 두 개의 사건을 계기로 기사단이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두 사건이란 '트리폴리 실함''드라구트 함대의 몰타 섬 내습' 을 말하는 것이다.

  드라구트는 1540년 이후 "대공성전" 이 개시될 때까지 6회 내지 7회에 걸쳐 몰타 섬을 습격했다. 특히 1551년 습격 때 드라구트 부대는 그랜드하버의 북쪽 해안【스케베라스 반도】에 상륙하여 반도를 남하, 비르구 공격을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스케베라스 구릉지대를 넘어 마르사 평지로 막 진출했을 때, 기사단의 요격을 받고 바다로 퇴각하고 말았다.

  이 전훈戰訓을 따라 기사단은 내곽과 외곽으로 구성된 이중의 유기적 방어체계를 구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우선 갤리 유입구의 서쪽을 형성하는【센그리아 반도】에 두 번째 요새인【성 미셸 요새】가 축성되었다. 성 미셸 요새는 성 안젤로 요새와의 상호지원 하에 방어체계 내곽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스케베라스 반도 끄트머리에 세 번째 요새인【성 엘모 요새】가 세워졌다. 이 요새는 방어체계의 최외곽부에서 그랜드하버 입구의 관제를 더욱 더 확고히 하는 사명을 띠고 있었다.

  방어체계 자체는 대단히 빼어난 계획하에 진행되었음에도 시간ㆍ자재부족으로 인해, 물리적인 방어수단이 반드시 만전을 기한 것이라곤 할 수 없었다. 특히 성 엘모 요새 축성에는 돌관공사突貫工事가 행해졌는데 힘없는 사암(砂岩, 모래바위)과 석회암石灰岩을 다량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내부구조도 상당히 간략화되어 지어졌다. 공사 최종단계에 이르러 급거 증설하기로 결정이 난 서쪽 능보가 준공된 건, 오스만의 함대가 수평선 너머에서 거의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 방비에 기대어 몰타 섬을 지키는 병력은 기사수도회 회원인 기사ㆍ종사從士 약 7백 명과, 몰타 섬 주민 가운데 모병된 민병民兵 약 8천 명이었다.

갑주로 무장한 16세기 초 중기병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Man-at-arms')


  전투요원으로서 기사들은 기본적으론 중세시대 이래의 중기병(man-at-arms)이면서도 노弩와 발달한 화기火器에 대응할 목적으로 이전부다 더욱 튼튼하고 무거운 갑주甲胄를 착용하고 있었다. 온난한 몰타 섬의 환경 하에서 밀폐된 갑주는 때로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불쾌한 기분을 빚어냈다. 물론 그들은 중기병으로서 말을 타고 싸우는 데 그치지 않고 일반적인 세상의 기사들처럼 하마전투下馬戰鬪도 하고 있었고, 로도스 섬으로 본부를 옮긴 후로는 오히려 선박에 승선하여 싸우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한편 몰타 도민들은 과거에 이 섬이 이슬람 해적들의 습격을 여러 번 받아온 내력상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무기 조작법과 전투기술을 숙지하고 있어서, 민병이라고는 해도 적절한 지휘만 받는다면 결코 우습게 볼 수 없는 전력을 발휘하리라 여겨졌으나, 공성전에 대한 경험經驗과 훈련訓練이 부족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총지휘관으로서 '대공성전' 당시 기사단을 지휘하는 건 1557년에 63세 나이로 총장에 취임한【드 라 발레트】였다. 프로방스의 유서 깊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평생을 기사단에 봉헌했으며, 깊은 교양敎養과 통찰력洞察力, 결단력決斷力을 겸비한 1급 무인이었다. 트리폴리 실함으로 침체된 기사단의 사기士氣를 강철의 규율 하에 재정비하고, 돌관공사를 벌여 방비강화를 도모한 건, 그의 크나큰 공적이었다 할 수 있으리라.

드 라 발레트의 초상화. 몰타의 現 수도 '발레타' 는 그의 성을 딴 것.
(출처 : 위키피디아 'Malta')


  그는 28세 나이에 로도스 섬 공방전에 참가했고, 47세 때는 그가 탑승한 선박이 해적에게 나포되는 바람에 갤리선 노예로 전락하는 고난도 겪었다. 이윽고 포로교환이 이루어지면서 귀환할 수 있었으나, 그는 이 시기에 터키어를 배웠고 숙적宿敵 드라구트를 처음으로 만나보기도 했다.

  드 라 발레트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帝都【콘스탄티노플】에 첩자를 파견해 적의 동향을 살피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유럽 각국을 상대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여 몰타 섬 방위를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일반적으로 근세의 요새란 건 그다지 많은 수비병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수비대가 바다 / 육지 쌍방에서 풍부한 전투경험을 갖고 있고, 충분한 양식과 탄환, 화약을 비축하고 있으며, 뛰어난 지휘관의 통솔을 받는다면 금상첨화다. 그 뿐만 아니라 아무리 북아프리카 해적들의 전면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고는 해도, 오스만 본국에서 몰타 섬에 이르는 연락선連絡線은 로도스 섬 전투 때보다 압도적으로 길었다. 다가올 공성전의 귀추는 단순한 병력의 우열이 아닌, 오스만군이 절대적인 제해권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유효한 병참지원을 몰타 섬에 집중시킬 수 있느냐 여부에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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