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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성 요한 기사단의 몰타 대공성전 (2)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4호(2000년 겨울호) 66~80쪽의 기사인,《몰타 대공성전 ~ 중세의 대미를 장식한 성 요한 기사단의 마지막 싸움 ~》을 번역한 것으로, 아리사카 쥰有坂純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16세기 중엽, 술레이만 대제의 뜻을 받들어 몰타 섬을 침공한 오스만 투르크의 4만 대군에 맞서 본거지 몰타를 지키기 위해 싸운 성 요한 기사단의 활약을 그리고 있습니다.


  성지에서 지중해로

  그런데도 12세기 중반이 되자 이슬람 세계 최대의 영웅 중 한 사람으로,【아이유브 왕조】의 창시자였던【살라흐 앗 딘】(살라딘. 재위 1171~1193)이 나타나 시리아 / 북부 메소포타미아 / 이집트를 통일하자 십자군 국가들의 군사적 약점은 그대로 노출되었다.

하틴 전투 이후 항복을 받는 살라딘
(출처 : 위키피디아 'Saladin' 항목)


【하틴 회전(1187)】에서 살라딘은 십자군 측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혔고, 예루살렘을 위시한 여러 도시들을 손쉽게 함락시켰다. 참고로 말하면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에도 성 요한 기사단원들은 한동안 여기에 잔류하며 수많은 부상자ㆍ투병자들 간호에 종사했다. 이것은 그들의 희망에 따른 것이었으며, 살라딘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그 후 1270년이 될 때까지 성지에 대한 지반회복을 도모한 십자군이 여러 번 일어났으나, 목적이 달성된 적은 없었다. 그리고 1291년, 드디어【맘루크 왕조】의 군대에게 최후의 거점인【아콘】이 함락되면서, 서유럽인들은 시리아 해안가에서 내쫓기게 되었다.

  패잔병이 된 기사수도사들은 바다에 떠 있는 십자군 국가,【키프로스 왕국】으로 도망쳤다. 이 땅에서 세 기사수도회의 운명적 갈림길이 나뉘어져, 그들이 두 번 다시 엮이는 일은 없었다. 우선【튜튼 기사단】은 정식으로 '동유럽 식민운동' 을 추진하는 데 전념하기로 결정, 본거지를【프로이센】으로 옮기고 모든 인원과 자재를 지중해 세계에서 철수시켰다.

십자군 세력의 최후거점 아콘의 함락
(출처 : 위키피디아 'Siege of Acre' 항목)


【신전 기사단】은 계속해서 본부를 키프로스 섬에 두면서도, 성지탈환을 위한 군사행동을 그 이상 시도하는 일 없이 유럽 각지에 갖고 있던 광대한 영지의 경영 / (이전부터) 대규모적으로 벌여오던 금융사업에 몰두하게 된다. 이로써 신전 기사단은 초국가적 군대가 아닌 초국가적 특권신분집단으로 변질, 이윽고 1307년 프랑스 국왕【필리프 4세(재위 1285~1314)】에 의해 폐절廢絶ㆍ접수接收당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성 요한 기사단만이 지중해 세계에 남아 본래의 사명 - 군사행동과 사회산업 - 쌍방을 단호히 포기하지 않았다. 1309년, 기사단은 가쁜 숨을 쉬어대던【비잔틴 제국】으로부터【로도스 섬】의 지배권을 빼앗아 고대 동지중해 세계 최대의 해상도시였던 이곳으로 본부를 옮기고, 전비戰備를 가다듬었다. 이후 "로도스 기사단" 이란 별명으로 불리게 된 그들은 함대를 정비하여, 동지중해에서 크리스트 교도들의 교역을 보호함과 동시에 이슬람교도들을 상대로는 비정非情한 통상파괴전 / 연안 습격 등, 쉽게 말해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한 '해적활동'을 벌였다.

  참고로 16세기에 들어서는 서지중해에서 대제독大提督【바르바로스 하이르 앗 딘(하이레딘)】이 출현한 것을 계기로,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 해적들이 로도스 기사단과 정반대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바르바로스의 후계자【토르고우드(드라구트)】와 기사단은 몰타 섬에서 대결하게 된다.

바르바로스 하이레딘의 초상화
(출처 : 위키피디아 'Barbary pirates')


  이집트, 시리아, 아나톨리아를 연결하는 해상연락선을 관제할 수 있었던 로도스 섬의 전략적 필요성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기에, 쇠퇴해가는 비잔틴 제국을 대신하여 풍부한 실전경험 / 높은 수준의 규율과 기량 / 왕성한 전투의지를 두루 갖춘 기사단이 이 도서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의미는 그야말로 중대한 것이었다.

  로도스 기사단의 활동은 약 두 세기에 달하는데, 15세기에 들어 아나톨리아에서 발흥한 오스만 투르크가 동지중해 연안 바다를 거의 제압하면서, 기사단은 이슬람교도들의 조직적인 대규모 반격을 받게 된다. 우선 맘루크 왕조가 1440년 / 1442년 / 1444년 세 차례에 걸쳐 로도스 섬을 공격했고, 그 뒤를 이어 오스만 제국함대가 1455년 / 1480년에 침공해왔으나 기사단은 숨 쉴 틈도 주지 않은 거듭된 위기를 모두 극복해냈다.

  그러나 1522년,【술레이만 1세(대제大帝. 재위 1520~1566)】가 드디어 친정親征에 나서면서 로도스 섬의 명운도 다하였다. 26세 나이에 즉위하여 전제군주권을 확립하고 오스만 제국의 번영을 추구하던 젊은 술탄에게, 로도스 기사단을 무력화시키는 건 최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안건이었다.

  로도스 섬 구원을 위한 십자군 소집은 실패했고, 섬은 고립무원에 빠졌다. 그러나 기사단은 전의를 잃지 않고 용전감투하여 술레이만 대제가 동원한 바다와 육지의 대군을 상대로 5개월 동안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다. 이 용감한 저항에 경의와 찬탄하는 마음을 품은 대제는, 로도스 기사단장【빌리에 드 릴라당】과 교섭하여 "기사수도사들의 신변안전을 보장할 테니 섬을 넘겨달라." 는 조건을 제시했다. 구원군이 오리라는 희망이 끊겨 있던 기사단은 이를 받아들여, 로도스 섬에서 명예로이 퇴거退去했다.

  로도스 섬이 함락되면서 동지중해의 크리스트교 세력은 거의 일소되었고, 이 바다는 명실공히 "오스만의 바다" 가 되었다.


  서지중해에서의 전투

  로도스 섬에서 쫓겨난 성 요한 기사단은 다시 서지중해로 옮겨가 활동을 계속했다. 즉 1530년,【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카를 5세(재위 1519~1556)】로부터【몰타 섬】,【고조 섬】, 그리고【트리폴리】를 임차한 것이다.

16세기 유럽 역사의 키 맨인 카를 5세초상화
(출처 : 위키피디아 'Charles V, Holy Roman Emperor')


  카를 5세는 예기치 못한 상속을 받아 스페인 / 오스트리아 / 네덜란드를 영유하는 광대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으나, 그는 사방에 존재하는 강력한 적들과 치세 내내 싸워야만 했다. 동쪽에는 오스만 제국. 북아프리카에는【바바리아 해적】. 그리고 유럽에는 같은 크리스트교 국가인【발루아 왕조】프랑스.

  이들 전원이 가해오는 바다와 육지로부터의 위협에 대처하는 데는 카를 5세가 보유한 자금과 군대론 만성적으로 쪼들리는 형편이었다.【파비아 전투(1525)】에서 프랑스군을 괴멸시키고 이탈리아의 상황을 안정시킨 것도 잠시뿐, 서지중해에서 바르바로스 하이레딘이 지휘하는 바바리아 해적이 맹렬한 공세를 시작했다.

  카를 5세 휘하의 가장 유능한 제독인【안드레아 도리아】의 지휘하에 합스부르크 군은 반격에 나서, 이후 수십 년간에 걸쳐 몇 번의 휴전시기를 사이사이에 두고 북아프리카와 서지중해에서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격렬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고양이의 힘이라도 빌리고 싶었을 카를 5세가, 로도스 섬 공방전에서 다시 한 번 용명勇名을 떨친 성 요한 기사단을 그대로 내버려둘 리는 없었다. 황제는 스스로의 금고에서 한 푼도 지출하는 일 없이, 기사단으로 하여금 서지중해의 약한 측면 부분을 지키도록 하려고 생각했다.

  황제의 제안은 본거지를 잃은 기사단으로선 바라마지 않는 것이었다. 땅을 대여받는 데 대한 형식적인 대가로 황제는 "매년 새 한 마리를 바쳐라." 고 기사단에 명령했다. 그러자 "부유한 기사단은 감사의 뜻에서 살아있는 매가 아닌, 순금으로 만들어 고르고 또 고른 보석으로 장식한 매의 조상彫像을 제작하여 황제에게 헌상하려 했으나, 수송과정에서 하이레딘의 함대에게 이를 빼앗겼다." 는 전설은 더셀 해밋의 소설《몰타의 매》로 인해 일약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몰타 섬에 도착한 기사단은 역전의 용사들과 윤택한 자금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방비를 굳히는 데 드는 시간과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청동기 시대부터 이미 고도의 거석문화巨石文化가 개화했으며 카르타고와 로마의 통상기지로 번영을 향유해오던 몰타 섬도, 중세에 들어서는 오랫동안 이어진 지중해 교역의 혼란상에 의해 과거의 그림자가 무색할 정도로 쇠퇴하여 인구는 약 2만 명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 섬에는 요새건설의 구조재로 삼을 만한 적당한 석재가 산출되지 않아, 자재의 대부분을【시칠리아】로부터 수송받지 않을 수 없었다.

프레베자 해전을 묘사한 그림
(출처 : 위키피디아 'Barbary pirates')


  술레이만 대제의 군대는【모하치 회전(1526)】에서 헝가리를 제압하였고,【프레베자 해전(1538)】에 의해 사실상 동지중해東地中海의 제해권을 획득하여, 바다와 육지에서의 전투를 우세하게 이끌어 갔다.

  1545년에 합스부르크 가문과 오스만 제국은 휴전협정을 맺었으나 하이레딘의 후계자 드라구트가 인솔하는 바바리아 해적들과의 싸움은 계속되었고, 6년 후엔 이를 구실삼아 오스만 제국이 공세를 재개했다. 훗날 기사단 총장이 되는【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는 본부참사회에서 몰타 섬의 빈약하기 짝이 없는 방비상황을 거울삼아 "본부를 트리폴리로 옮기자." 고 제안했으나, 그 제안이 실행에 옮겨지기도 전에 오스만군의 포위공격을 받은 트리폴리가 순식간에 함락되어 버렸다. 바라든 바라지 않든, 이제 기사단은 몰타 섬에 기대어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이후 술레이만 대제의 관심은 합스부르크 가문과 동맹을 맺은 이란의【사파비 왕조】와의 전쟁으로 옮겨가 지중해에는 한동안 평화의 나날들이 찾아왔으나, 그런 상태가 언제까지나 지속될 리 없다는 건 누가 봐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오스만 정규군에 의한 몰타 섬 진공위협은, 절박한 상태였다.
   

덧글

  • R쟈쟈 2018/10/13 09:16 # 답글

    로도스도 공방전은 시오노 할머니의 책으로 봤는데 요한 기사단의 몰타섬 전투는 이렇게 처음 접하게 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8/10/13 12:32 #

    어쩌면 저자분이 시오노 할매의 로도스도 공방전 책을 의식하고 이 글을 그 책의 비공식적 뒷이야기 내지 외전격으로 기고하신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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