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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미하일 카투코프 전기 (完)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53호(2002년 6월호) p.168 ~ 175쪽의 기사인,《카투코프 전기 - 동부전선을 석권한 붉은 선풍赤き旋風을 번역한 것으로, 구 공산권의 군사사를 많이 다루시는 후루제 미츠하루古是三春 님께서 집필하셨습니다.

  참고로 이 글의 주인공인 미하일 카투코프는 훗날 북한이 건국된 후【 소련 군사고문단 】의 주요 인물 중 하나로 파견되어 T-34/85 242대를 위시한 소련 병기들을 북한에 반입(본래 500대 도입될 예정이던 T-34/85의 판매대수를 한반도 지형의 특성을 이유로 절반으로 삭감토록 하기도 했지만)시키고 북한 전차부대의 편성과 훈련에 관여하여 한국전쟁韓國戰爭 초반의 'T-34 쇼크' 에 한 몫 거드는 등 북한군의 조력자 역할을 직간접적으로 수행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란 입장에선 상당히 껄끄러운 인물일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쿠르스크 남부 전구에서 고전하다

  제 1전차군이 쿠르스크 지구에 배치된 건, 1943년 여름에 감행하리라 예상되던 독일군의 쿠르스크 돌출부 대공세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카투코프 부대는 제 6친위군 후방지구에 배치되어, 독일군이 목표로 하는 쿠르스크 돌파ㆍ분단의 진격로가 되는 오보얀 전면부 방비에 임했다. 이 방면에선 명장【 만슈타인 】원수가 지휘하는 독일 남방군집단의 강력한 기갑부대(제 4장갑군 / 켐프 작전집단 등. 전차 2078대와 돌격포 850대 보유)를 선두에 앞세운 격렬한 공세가 벌어졌다.

  쿠르스크 남부 지구에서 이 공세를 막아내던 보로네시 방면군의 기갑전력은 전차 1662대 / 자주포 42대. 제 1전차군은 이들의 38%에 해당하는 631대의 전차와 자주포 17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이 방면 기갑전력의 주력이라 할 만 했다. 그러나 이 당시에 독일 측은 판터 전차와 티거 重전차를 위시한 화력 / 방어력 공히 T-34 中전차를 능가하는 강력한 신형전차를 투입해왔다. 그뿐만 아니라 4호 전차 / 3호 돌격포에도 방어력 강화가 행해지고, 강력하고 긴 포신을 지닌 7.5cm포를 새로이 장비하게 되어 성능 면에서는 소련군의 전차가 독일 전차에 비해 열세에 놓였다. 덧붙이자면 쿠르스크 남부 전구에 한하면 소련 측의 기갑전력은 독일 측의 58%에 불과, 수적으로 봐도 공격측이 우세했다.

독일군 전차 에이스 요한네스 뵐터초기형 티거
(출처 : 나무위키 '6호 전차 티거' 항목)


  카투코프와 그 막료들은 이러한 전차의 성능ㆍ수적 열세를 정확히 인식하고,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 전개하였던 보병 방어진지와 협동하는 기동방어전술을 채용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SS 제 2장갑군단 / 제 48장갑군단 등 독일군 제일의 정예부대의 공격을 정면으로 막아내야 했기에 커다란 출혈을 피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제 1전차군 막하의 전차부대는 7월 6일부터 시작된 독일군의 본격적인 공세 이래, 서서히 오보얀 / 프로호로프카 방면으로 압박당하면서 손상을 입은 전차들까지 따로 긁어모아 땅 속에 묻은 후 토치카로 만들어 저항하는 등, 집요한 방위전투를 전개하여 1주일 동안 전선을 힘겹게나마 유지했다. 기관단총을 손에 든 카투코프와 막료들은 지프차를 타거나 때로는 도보 상태로 최전선을 끊임없이 오가면서 전차병들을 격려했고, 독일군 전차의 포화가 집중되는 가운데 모래와 포연을 맞아가면서도 진두에서 전투를 지휘하기도 했다.

  충분한 엄폐+위장 하에 카투코프 막하의 전차부대는 보병 / 포병의 對 전차화점과 협동, 우세한 독일 전차에 맞서 가능한 한 근거리(200~300m)에서 일제사격을 가하는 매복전투를 벌였으나, 독소전 초기만 해도 화력과 방어력 양면에서 우수성을 발휘했던 T-34 中전차는 강력한 독일군 신예전차 앞에 줄줄이 격파되어갔다.

  예비전력인 스텝 방면군이 급파한【 파벨 알렉세예비치 로트미스토로프 】중장이 지휘하는 제 5친위전차군이 프로호로프카에 도착한 7월 12일엔, 제 1전차군의 전차병력은 거의 다 고갈된 상태였다.

쿠르스크 전투 양상과 주변지역 부대들의 배치상황
(출처 : 위키피디아 'Battle of Kursk' 항목)

  그러나 카투코프 막하 장병들의 분전으로 지연시킨 시간 덕택에 프로호로프카 전면에 신예병력인 제 5친위전차군이 전개된 건 그 후 이 전투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사상 최대의 전차전' 이라 불리는 프로호로프카 전차전은 최근 자료에 따르면 독일 측이 압도적인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이 전투에서 독일 측 주력이었던 LAH 사단의 실질적 손실이 극도로 미미했던 데 비해, 제 5친위전차군은 7월 12일 ~ 7월 14일 사이에 전차 / 자주포 도합 256대를 상실했다.)

  그러나 제 1전차군과 제 5친위전차군이 크나큰 희생을 한 대신, 소련 측이 쿠르스크 남부 전구에서 직면하고 있던 전선붕괴 위기를 벗어나 전략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는 건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어쨌든 구 소련의 공간전사는 로트미스토로프 막하 전차군의 전공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승리의 배경에는 카투코프의 제 1전차군의 활약이 존재했다.


  '불사조不死鳥' 같은 부활

  쿠르스크 북부 전구에서는 7월 후반 이른 시기부터 독일군에 대항한 대규모 반격작전이 개시되었지만, 예상 이상의 커다란 손해를 입은 남부 전구 쪽은 8월에 이르러서도 반격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벨고로드 ~ 하리코프를 향한 공세가 시작된 8월 3일 시점에서 제 1전차군은 542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을 정도로 신속한 전력회복을 성취했다. 이는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부터 병참ㆍ정비ㆍ보수 활동에 재능을 발휘하던 두이넬 소령이 특별 팀을 편성하여 쿠르스크 전장에서 회수한 독일 / 소련 양군의 전차들을 수리해서 제공한 데 따른 것으로, 그 간에 카투코프에게 새로이 보충된 전차는 한 대도 없었다는 점이 놀라운 것이다.

  (1943년 당시) 2년 반에 걸친 독소전의 공방전 가운데, 세 번에 걸쳐 뺏고 뺏기던 공업도시 하리코프를 둘러싼 전투는 치열하기 짝이 없었다. 8월 3일부터 11일에 이르는 1주일에 걸친 SS 제 2장갑군단과 격투를 벌이면서 제 1전차군은 하리코프 서쪽을 향하여 200km의 진격을 수행했다.

드네푸르 강 서쪽으로 독일군을 몰아낸 소련군의 루미안체프 작전
(출처 : 위키피디아 'Battle of Kursk' 항목)


  결국 쿠르스크 전투 개시 이래 하리코프 주변지역의 독일군 부대를 완전해 격퇴한 8월 31일까지 제 1전차군은 도합 1049대의 전차를 상실했으나(전투손실 706대 / 기계적 고장 내지 손상 334대) 두이넬 소령의 특별 팀은 같은 시기 전장에서 1225대의 전차를 회수ㆍ수리하여 전력으로 복귀시키는 데 성공했다.

  독소전 초기 당시 소련 기갑부대는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유리한 전차를 갖고 있었으면서도, 충분한 훈련을 거친 요원 / 보수인원이 결락되어 있었기에 전투손실은 물론, 기계적 고장의 수선도 제대로 되지 않아 수많은 전차를 상실하였다. 카투코프는 이른 시기부터 정비ㆍ보수지원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1941년에 이미 재능으로 가득한 두이넬을 발굴하여 임무를 맡긴 것이다.

  그 성과가 명백히 드러난 것이 1943년 여름 전장에서 제 1전차군이 '불사조' 같이 재생되었던 때였다.


  소련의 기갑전 독트린의 기반이 된 카투코프의 분전

  독소전 말기에 이르기까지 카투코프 전차군(1944년 이후로는 드디어 '친위親衛' 이름을 달고 '제 1친위전차군' 이라 불렸다)이 보인 활약은 더욱 더 빛나는 데가 있었다.

  1944년 초두에 감행된 북부 우크라이나에서의 포위섬멸전 / 1945년 1월 ~ 2월 히틀러를 경악케 한 폴란드 -> 오데르 강변으로의 급속진격 / 그리고 베를린 공방전에서의 활약까지, 도저히 지면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이다.

  카투코프 장군과 그가 지휘한 부대의 역사 자체가 바로 전쟁을 거치며 단련된 소련 기갑부대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으리라. 희생을 수반한 가혹한 실전 속에서 배우고, 지혜를 얻으며, 기갑전투의 정수를 깨우쳐 이윽고 정예 독일 기갑부대도 무색할 정도의 전투기량을 발휘한 - 이러한 전례戰例의 하나하나가 전후 소련군의 기갑전 이론을 완성시키는 데 귀중한 기반이 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머나먼 옛날의 일이 되었으나, 전후 반 세기에 걸쳐 독소전에 의해 단련되고 강대해진 소련의 기갑부대는 동유럽을 제압하고 서유럽을 향해 끊임없는 위협으로 기능했다. 이 위협은 소련의 붕괴와 함께 사라졌으나, 사회주의 체제가 종언을 맞은 오늘날의 러시아 역시 카투코프를 위시한 독소전 승리를 상징하는 영웅들의 공적을 여전히 칭송하고 있다.

  카투코프는 1944~1945년 두 번에 걸쳐 소련 최고의 서훈인 소련 연방 영웅 칭호를 부여받았고, 전차병 원수로서 전후에도 요직에 앉았다. 그리고 사회주의 소련의 힘이 절정기에 달했던 1976년, 그는 조국이 조락하는 모습을 목도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덧글

  • PKKA 2018/11/30 16:07 # 답글

    역시 일본에도 소비에트 군사사 연구자가 있군요. 전반적으로 리처드 N. 암스트롱의 저서 Red Army Tank Commanders의 카투코프 편을 축약한 느낌입니다.
  • 3인칭관찰자 2018/11/30 22:56 #

    저 잡지에도 2016년 말 기준으로 소련 전문 필진 한 분과 현대전사 두루 다루면서 가끔씩 소련 관련해서 기고하시는 고정필진 한 분(근래 아사히신문이 혁신계열 군사전문가로 푸시해주고 있는)이 계셨습니다. 위 글 집필하신 분은 기고 안하신지 좀 오래된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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