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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미하일 카투코프 전기 (2)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53호(2002년 6월호) p.168 ~ 175쪽의 기사인,《카투코프 전기 - 동부전선을 석권한 붉은 선풍赤き旋風을 번역한 것으로, 구 공산권의 군사사를 많이 다루시는 후루제 미츠하루古是三春 님께서 집필하셨습니다.

  참고로 이 글의 주인공인 미하일 카투코프는 훗날 북한이 건국된 후【 소련 군사고문단 】의 주요 인물 중 하나로 파견되어 T-34/85 242대를 위시한 소련 병기들을 북한에 반입(본래 500대 도입될 예정이던 T-34/85의 판매대수를 한반도 지형의 특성을 이유로 절반으로 삭감토록 하기도 했지만)시키고 북한 전차부대의 편성과 훈련에 관여하여 한국전쟁韓國戰爭 초반의 'T-34 쇼크' 에 한 몫 거드는 등 북한군의 조력자 역할을 직간접적으로 수행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란 입장에선 상당히 껄끄러운 인물일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제 4전차여단의 편성

  모스크바의 적군 기갑국총감機甲局總監【 야코브 니콜라예비치 페드렌코 】중장 집무실에 출두한 카투코프 대령은 새로운 전차여단戰車旅團을 편성하여 그 지휘관으로 취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카투코프는 당초 이를 사단장師團長 -> 여단장旅團長으로의 강등인사로 보고 섭섭心外하게 생각한 듯 싶으나, 기실 이는 곧 들이닥치리라 예상되는 모스크바의 위기에 대응하여 스탈린이 준비한 비책秘策의 일환이었다.

  카투코프는 9월 3일 스탈린그라드에 있는 트랙터 공장에 도착, 공장의 책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GKO(국가방위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귀관貴職으로부터 50대의 T-34 中전차를 제공받아, 새로운 전차여단을 현지에서 편성할 것입니다. 가급적 신속한 협력을 부탁드리겠소."

  당시 서전緖戰에서 전차병력(+그 기간基幹이 되는 경험 있는 장병)의 거의 대부분을 소모한 적군赤軍은, 정수定數 50대 이내로 구성된 소규모 전차여단戰車旅團 편성에 착수했다. 대규모 기계화군단을 지휘하기엔 지휘관들의 숙련도도 부족했고 무선자재 등의 물질적 뒷받침도 많이 부족했기에, 미숙한 전차지휘관의 입장에서도 이 정도가 알맞았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독일군의 공격에 의해 전선 곳곳에서 생겨나는 '구멍穴' 을 메울 목적으로 긴급히 투입되기에도 적절한 규모였다.

  카투코프는 각지의 격전에서 살아남은 전차병 / 지휘관들을 긁어모아 거느림과 동시에, 새로이 동원된 장병(트랙터공장 노동자+집단농장에서 트랙터를 조종하던 인원들)들을 이들과 배합하여 제 4전차여단을 편성하게 되었다.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1개 대대 분량의 T-34 21대를 공장으로부터 넘겨받은 여단은 곧바로 전투훈련을 개시했다.

  "기갑훈련에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숙련熟練이다. 특히 우리 군은 서전의 경험을 봐도 알 수 있듯 방어전투의 기량器量이 현저히 열세하다. 그 수보로프(러시아 역사상의 명장. 제정 러시아 근대병학의 시조) '훈련에서 고생할수록 전투가 편해진다.' 고 말한 바 있다."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수보로프의 초상화
(이미지 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카투코프 대령은 스탈린그라드시 교외에 있는 연습장에 소집된 전차여단 장병들에게 가장 먼저 이렇게 훈시訓示했다. 1930년대 초부터 전차부대에서 쌓은 경험에다, 제 20전차사단장 입장에서 서전을 벌인 독일 기갑부대의 뛰어난 전술기량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리란 건 말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카투코프가 방어전투의 중요성을 지적한 점은 1930년대 후반 적군대숙청 이후 득세했던 적군 보수파(【 보로실로프 】/【 부됸니 】등 러시아 내전 이래 스탈린의 측근이었던 지휘관들)들의 "상승常勝 적군의 적극적인 공격작전", "침략을 받으면 즉각 공격작전을 벌여 대항, 적의 영토를 전장으로 삼아야 한다." 는 공상적인 전술론과 명확히 선을 긋는 것이었다.

보로실로프(오른쪽 인물)가 그려진 포스터. 왼쪽은 스탈린.
(이미지 출처 : 나무위키 '클리멘트 보로실포프')


  9월 중순부터 개시된 훈련은 초기의 실전경험에 기반한 실제적인 내용으로 진행되어, 특히 철저한 전차포戰車砲 사격훈련이 행해졌다. 이는 서전에서 발휘되지 못했던 T-34 中전차의 위력을 이끌어내어, 이후의 전투에서 제 4전차여단이 커다란 전과를 올리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제 4전차여단 편성 / 훈련 도중에 카투코프 대령은 두 명의 중요한 일재逸才를 발굴했다. 병참 / 정비 담당 책임장교인【 파벨 그리고로에비치 두이넬 】대위와 작전참모【 마트베이 티모피예비치 니키친 】대위였다. 두이넬 대위는 이후 "마법魔法" 과 같은 수완을 발휘하며 전차부대의 전력회복을 성취, 카투코프 전차부대를 몇 번이나 구해냈다. 그리고 니키친 대위는 카투코프로부터 "언제나 정세를 적확的確하게 이해하며, 참모장교 업무에 완벽할 정도로 정통精通하다." 는 절찬을 받았다. 이 젊은 장교 두 사람은 독소전쟁이 끝날 때까지 카투코프의 양 팔이 되어 활약했다.

  정세는 카투코프 대령과 그 장병들에게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9월 후반에 접어들어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는 독일 중앙군집단과 남방군집단의 협공을 받아, 6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보유한 소련 남서 방면군 전체가 포위당하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동쪽으로 진로를 잡은【 구데리안 】장군의 독일 제 2장갑집단이 모스크바를 향해 파죽 같은 진격을 개시하려 하고 있었다.

1941년 6월 ~ 12월까지의 동부전선 추이
(출처 : 위키피디아 '모스크바 전투' 항목)

  편성정수를 꽉 채워야 했을 T-34는 고작 21대밖에 공급되지 못했고 KV-1 重전차 4대가 가세했으며, 부족하던 1개 대대 분량은 구식 BT-7 쾌속전차 20대로 자리를 메워, 제 4전차여단은 전선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구데리안의 기갑부대를 요격하다

  철도를 통해 이송된 제 4전차여단은 10월 4일 이른 아침, 툴라 시 전면에 위치한 소도시 무첸스크에 도착했다. 이 시점에서 구데리안 대장이 지휘하는 독일 제 2장갑집단의 선봉인 제 24장갑군단은 모스크바 남쪽 날개南翼의 방비를 맡고 있던 브리얀스크 방면군의 전선前線을 손쉽게 돌파하고 오룔 시에 무혈입성한 상태였다.

독소전 첫 해(1941) 7월에 찍힌 하인츠 구데리안의 사진.
(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하인츠 구데리안' 항목)


  모스크바 남부 전선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는 사태에 맞닥뜨린 소련 대본영은 급히 무첸스크 시를 흐르는 즈샤 강변에 방어라인을 구축할 목적으로【 디미트리 다닐로비치 렐류셴코 】소장이 지휘하는 제 1친위군단을 현지에서 편성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카투코프 대령의 제 4전차여단이 그 제 1진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카투코프 여단이 막 도착한 시점에서 현지와 독일 전차부대 사이에 존재했던 건 (독일군에게) 격파당하고 후퇴하는 중이었던 NKVD(내무성)의 오합지졸 국경경비대 + 극소수의 군 학교軍學校 학생들로 이루어진 보병부대 뿐이었다. 이곳을 공격하려는 독일 제 4장갑사단은 신속히【 에벨바하 】대령이 지휘하는 션견부대를 발진시켜 소련군의 전초선前哨線과 소규모 전투를 막 벌이려 하고 있었다.

  카투코프 대령은 도착 직후 위력정찰 그룹을 2파二波에 걸쳐 모스크바 - 민스크 가도를 따라 전진시켜, 독일군 선봉과 접촉을 개시토록 했다. 이로써 훗날 유명해진 수 차례에 걸친 기갑부대 간의 전투가 무첸스크 전면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10월 6일 이른 아침, 독일 제4장갑사단의 주력인 100대의 전차가 오룔 시를 발진하여 안개가 내린 모스크바 가도를 따라 무첸스크로 진격하였다.

  이윽고 가도 위에 구축된 NKVD 부대의 저지진지에서 대전차포가 발사되자 독일 전차들도 맹렬한 답례를 퍼부어 소련군 진지는 포연으로 뒤덮였다. 이때, 관목 그림자 속에서【 쿠카린 중위】가 지휘하는 T-34 中전차 부대가 독일군의 측면에 달라붙었다.

1941년형 T-34/76 中전차(출처 : 나무위키 'T-34' 항목)


  "류브시킨, 쏴라!" 쿠카린 소대장의 T-34가 600m 거리에서 독일군의 3호 전차 측면을 향해 76.2mm 전차포를 발사했다. 화르륵 불타오르는 동료전차의 모습에 놀란 독일 전차부대는 갓길에 멈춰선 채로 포탑만을 회전시켜 진흙탕 같은 가도 바깥을 선회하는 T-34 몇 대를 향해 닥치는 대로 발포했다.

  그러나 T-34에 명중한 독일 전차의 5cm / 7.5cm 철갑탄으론 T-34의 두터운 경사 장갑판에 손상을 줄 수는 있어도 치명상을 입힐 수가 없었다. 역으로 연약한 지반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지 -> 주행 -> 사격동작을 자유자재로 행하는 쿠카린 중위의 T-34가 그 76.2mm 주포로 적확한 사격을 하면서, 독일 전차 16대를 불태우고 나머지도 격퇴시키고 말았다.

  이 전투 후 현장으로 달려갔던 독일 제 2장갑군(집단을 다시 '군軍' 으로 승격시킴) 사령관 구데리안 상급대장은, 전후에 집필한 저서《전격전》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에벨바하(저명한 전차장교이자 제 24장갑군단 선봉부대 지휘관)는 이 혹독한 작전 속에서 처음으로 '졌다..' 는 절실한 패배감을 맛본 듯했다. 그는 육체적으로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동요하고 있었다. 우리 군의 우수한 장교들이 최근의 전투에서 이렇게나 커다란 쇼크를 받은 건 그야말로 놀랍다 할 만했다.", "우리들의 전차들이 입은 손해는 유례없이 많았다. 이에 비해 소련 전차의 손해는 경악스럴 정도로 적었다."

  이후, 무첸스크 시를 둘러싼 전투가 10월 11일까지 계속되었다. 그 동안 수 차례에 걸쳐 독소 양군의 전차전이 이어졌는데 카투코프 대령이 지휘하는 T-34 中전차와 KV-1 重전차는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로 인해 10월 초 구데리안 막하의 독일 전차부대가 오룔 시를 급습할 때까지는 하루 130km의 거리를 진격한 적도 있었음에도, 모스크바까지 고작 100km를 남겨놓은 시점에선 일주일을 투자해도 25km밖에 전진하지 못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그 동안 제 4전차여단도 경미한 손실을 입긴 했으나, 병참ㆍ정비책임자인 두이넬 대위 등의 분투에 힘입어 기본적인 전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공식기록에 따르면 133대의 전차 / 화포 49문 / 항공기 6기 / 견인차 15대를 파괴하고 약 1개 연대에 달하는 독일군 보병을 살상했다고 한다.

  이후 제 4전차여단은 소비에트 최고간부회의의 결정에 따라 '친위親衛' 라는 칭호를 수여받게 되어, 제 1친위전차여단으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10월 후반부터는 모스크바 북쪽 날개에 펼쳐진 방어전선을 구성하던 제 16군(로코솝스키 중장 지휘)에 배속되어 볼로코람스크 지구 공방전에서 활약을 계속했다.

  무첸스크 ~ 모스크바 공방전 내내 보인 활약으로 인해 '명전차지휘관 카투코프 대령' 의 용명은 전의고양의 목적으로 선전되어, 소련 장병들과 시민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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