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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미하일 카투코프 전기 (1)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53호(2002년 6월호) p.168 ~ 175쪽의 기사인,《카투코프 전기 - 동부전선을 석권한 붉은 선풍赤き旋風을 번역한 것으로, 구 공산권의 군사사를 많이 다루시는 후루제 미츠하루古是三春 님께서 집필하셨습니다.

  참고로 이 글의 주인공인 미하일 카투코프는 훗날 북한이 건국된 후【 소련 군사고문단 】의 주요 인물 중 하나로 파견되어 T-34/85 242대를 위시한 소련 병기들을 북한에 반입(본래 500대 도입될 예정이던 T-34/85의 판매대수를 한반도 지형의 특성을 이유로 절반으로 삭감토록 하기도 했지만)시키고 북한 전차부대의 편성과 훈련에 관여하여 한국전쟁韓國戰爭 초반의 'T-34 쇼크' 에 한 몫 거드는 등 북한군의 조력자 역할을 직간접적으로 수행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란 입장에선 상당히 껄끄러운 인물일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이 시작된 순간, 제 20전차사단장 카투코프 대령은 키예프 시 적군병원의 병상에 누워 있었다.(막 충수염蟲垂炎 수술을 받은 참이었음) 그는 공습으로 인해 시가지에서 솟아오른 포연을 병원 창문 너머로 목도하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상한 사태를 눈치챘다.

  "비상시에 군인은 본래 있어야 할 장소에 위치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카투코프는 수술 당시 꿰맨 실밥도 아직 풀지 않은 데다 고열로 고생하던 몸 상태임에도 병원을 나와, 노상의 군용차량을 여러 번 갈아타면서 전선에 있는 사단 사령부로 향했다.


  서전에서의 고투苦鬪

【 미하일 예피모비치 카투코프 】의 군력軍歷은 러시아 혁명 이후의 내전기內戰期였던 1919년부터 시작된다.

미하일 카투코프(출처 : 쿼라)


  1900년, 수도 모스크바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볼리셰 우바로프 마을 농가에서 태어난 카투코프는 13세 때 군식구를 덜어내려는 가족에 의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의 공장으로 고용살이를 나가게 되어, 이후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1917년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당(훗날의 소련공산당)의 지지자가 되어 활동하기 시작, 그 해 11월에 부르주아 정부를 타도한 무장봉기武裝蜂起에 참가했고, 1919년에는 노농적군 제 54기병사단에 입대하여 反 혁명군과 싸웠으며, 다음 해인 1920년에는 폴란드 전선을 전전했다.

  러시아 내전이 끝난 후 직업군인職業軍人 신분으로 적군赤軍에 잔류하게 된 카투코프는 내전에서의 전공을 기리는 노래까지 만들어진 정예부대인 제 27적위사단 內 제 81연대학교의 교관이 되어, 적군 병사들의 교육을 맡았다. 1920년대 후반 적군자동차화ㆍ기계화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후, 1931년에는 전차병으로 전과하여 전차중대장, 이후 대대장을 맡았다.

  그리고 적군대숙청赤軍大肅淸의 폭풍을 견뎌낸 카투코프 대령은 키예프 특별군관구의【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로코솝스키 】중장이 지휘하는 제 9기계화군단 막하의 제 20전차사단 지휘관으로 취임하였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출처 : 한국 위키피디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항목)


  적군은 1930년대 후반에 벌어진 대숙청의 후유증으로 너덜너덜해진 조직체제의 재건 / 한번 붕괴되었던 대형 기갑부대大型機甲部隊를 주축으로 삼기 위한 재편성을 도모하던 중에 독일군을 주력으로 삼은 추축군樞軸軍 부대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키예프 특별군관구 지트밀 주변에 배치된 제 9기계화군단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1940년 7월에 막 발족한 참이었으나, 1941년 6월 22일 시점에선 막하의 제 20 / 제 35전차사단과 제 131기계화사단의 전차를 합해도 구식 BT 쾌속전차와 T-26 경전차를 주축으로 삼은 290대에 그쳐, 전차 배비 정원인 1031대에 크게 못 미쳤을 뿐 아니라 T-34 중전차 / KV 중전차 같은 강력한 신형전차는 한 대도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 뿐만 아니라 다수의 전차탑승원 / 지휘관들은 보병 내지 기병 등의 병과에서 막 전출된 자들이 대부분으로, 조종수들의 경우 평균 2~3시간의 실차훈련만을 경험한 데 불과한 미숙련자들이 많았다.

  카투코프 대령이 지휘하는 제 20 전차사단의 사정을 보면 375대의 전차 편성 정원에 BT-5 쾌속전차 30대 / T-26 경전차 6대밖에 없었으며, 정비 / 지원부대가 사용하는 화물트럭이나 수리용 예비부품도 정수의 10~30% 정도밖에 없는 엄혹한 상황이었다. 그 외의 사단 내역은 다음과 같았다.

  ★ 제 35 전차사단 : T-26 경전차 142대
  ★ 제 131 기계화사단 : 122대(대부분이 BT 쾌속전차. 소수의 T-37 정찰전차를 포함)

  준비된 상황은 이 정도로 불충분했으나, 사단은 침공해 온 독일 기갑부대에 맞서 카투코프 대령의 지휘하에 전력을 투입, 기동방어 전투를 벌였다. 소련 대본영大本營으로부터【 독일군을 국경 밖으로 격퇴하라. 】는 강경한 명령을 받고 6월 22일 저녁부터 셰페토프카에서 루츠크로 전진転進한 사단은 6월 24일, 독일 제 13장갑사단과 299보병사단에 맞서 전차를 앞세워 반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36대의 전차는 용전을 벌였음에도, 독일군의 대전차포화와 정교한 전차운용 앞에 6월 26일에 이르러 모든 전차가 파괴당하고 말았다.

  개전 벽두부터 제공권을 상실한 데다 기갑전력도 열세에 빠진 소련군이 유효하게 싸우기 위해선, 독일군이 상시적으로 앞세워 보내는 항공기의 지상공격을 회피하면서 창날처럼 돌진해오는 독일 전차부대의 선봉을 복격伏擊, 그들의 진격템포를 흐트러트리는 수단밖에 없다고 카투코프는 판단했다.

  "이 시기가 내게 있어선 진정한 "전투 학교" 라고 할 수 있었다." 고 훗날 카투코프는 회상하였다.

  카투코프는 압도적으로 정수를 하회하는 자재(전차는 이미 전멸한 상태였다)와 보병으로밖에 싸울 수 없는 전차병, 얼마 안 되는 지원부대(고사포부대 / 대전차포병 / 공병부대 등)를 이용해 독일 장갑부대의 진격로에서 매복공격 전법을 구사했다.

  카투코프의 전법은 기만진지欺瞞陣地를 구축하고 수비부대를 신속히 이동시켜 적의 항공공격을 헛치게 만듬과 동시에, 기습적인 방어포화를 퍼부어 독일 선봉부대에 타격을 집중시키는 것으로, 방어 측은 기갑부대를 앞세운 침공부대에 의해 수세적인 입장에 놓이기 일쑤였으나 카투코프는 어떻게 하면 방어전투에서 능동적인 작전을 전개할 수 있을지를 모색하는데 부심했다.

  독일 전차의 예상진로에 구축된 기만진지에 우선 중기관총重機關銃 등을 장비한 소수의 보병부대를 '미끼' 로 배치하여 독일 공군의 공습空襲과 지상부대의 공격준비포화를 유도한다. 그리고 적의 포화를 끌어들인 후엔 기만진지에 있던 보병부대를 신속히 본 진지로 이동시키고, 기만진지로 진출해 온 독일전차를 원거리 사격이 먹히는 85mm 고사포高射砲로 집중사격하여 손실을 강요하는 전법이었다.

  이러한 전법으로 제 20전차사단이 전과를 거듭해서 올린 데다, 로코솝스키 막하 제 9기계화사단의 여러 부대도 분전하여【 우크라이나 방면에서 우리들 전면을 막아선 소련 부대는 정열적 수완을 발휘한 지휘를 받고 있다... 이로 인해 남방군집단 전구에서의 진격속도는 현저하게 감소했고, 매일마다 전력이 손실되고 있다. 】(독일 국방군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 】대장의 일기) 라고 기록하게 할 정도였다.

  8월에 이르러 카투코프 사단은 2천 명의 병원兵員과 극소수의 포병부대만이 온전할 수 있었기에, 대본영 예비부대에 편입된 후 9월 9일자로 해대解隊되었다. 그러나 이 고전의 시기에 극한까지 소모된 사단을 데리고 독일 기갑부대에 맞선 카투코프 대령의 뛰어난 수완은, 방면군 사령부를 통해 스탈린의 귀에도 들어갔다.

  8월 하순, 적군 참모본부는 카투코프에게 적기훈장赤旗勳章 수여를 고지함과 동시에, 모스크바 소환명령을 내렸다.


덧글

  • 2018/09/03 10:0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09/03 17:0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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