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관찰자

beholderer.egloos.com

포토로그



《역사군상》시마즈島津, 류큐琉球를 침공하다 (完)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108호(2011년 8월호) p.50 ~ 63쪽의 기사인,《시마즈군 류큐 침공 - 17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전쟁을 번역한 것으로, 역사학자 우에자토 타카시上里隆史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어째서 류큐는 패배했는가

  지금까지 시마즈군의 류큐 침공 경과를 살펴보았다. 3월 7일 아마미오 섬奄美大島에 상륙한 이후 고작 1개월도 지나지 않아 류큐 왕부琉球王府는 항복했고, 왕부 고관들을 포함해 수백 명 이상에 달하는 커다란 인명손실을 입었다. 어째서 류큐는 이 정도로 단기간에 패배하고 말았는가?

  류큐에는 군사조직이 존재하긴 했으나 전국시대 일본과 같은 격렬한 전란을 경험하진 못했다. 표면상으론 국력에 합하는 군사조직軍事組織 / 병력兵數 / 장비裝備를 그럭저럭 갖추고 있었지만, 용병用兵 면에서 크게 뒤쳐졌으므로 시마즈군의 움직임에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실전実戦에 대응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는 것이다.

  거기에다 시마즈군에 맞서 철저한 항전태세를 관철하지 못한 것도 패배의 커다란 요인이었다. 시마즈군의 당초 작전방침에는 "전투가 장기화될 때는 오키나와 섬 점령을 포기하고 철수하라." 고 되어 있었다. 류큐 측이 슈리 성에서 농성전을 벌이거나 게릴라전으로 돌입했다면 혼성부대인 시마즈군의 내부대립이 현재화되면서 스스로 무너질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류큐 왕부 역시도 항전파抗戰派 / 강화파講和派로 분열되었던 데다, 달아나는 왕부 고관들이 나오는 등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노선대립과 혼란은 전쟁 이전부터 존재했던 슈 왕가 내부(尙王家內部, 슈리 슈 왕가 vs 우라소에 슈 왕가)의 대립對立이 영향을 끼친 면도 있다. 왕부는 아마미(奄美, 토쿠노 섬徳之島)를 오키나와 섬의 '방파제防波堤' 로 삼아 슈리 / 나하를 방어하려는 체제를 만들었으면서도 최종적으로는 강화교섭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침으로 임했으며, 철저항전파가 주류를 점하는 데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이는 시마즈군의 손해도 결코 적지 않았다. 분명《큐키자츠로쿠旧記雑録》에는 이 전쟁에서 전사한 자로 우메키타 쇼존보梅北照存坊 / 시치토 집단七島衆의 코마츠 히코쿠로小松彦九郞 두 사람밖에 거론되지 않았으나, 여기에 기록된 전사자는 어디까지나 이름 있는 '부장部將' 급 인물들로, 일반 잡병들이 한 명도 산입되지 못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전후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발급한 문서(《이신코우고몬누키가키惟新公御文抜書》)에 따르면【 특히 아군의 손실이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잡병 1~2백 명 정도가 전사했을 뿐으로, 이렇게 다른 나라를 복종시킨 전쟁에서 이 정도 전사자가 나온 건 경미하다 생각한다. 】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전쟁에서 잡병 2백 명 정도가 전사했다는 것은 확실하며, 전사자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 가는 부상자들도 나왔을 것이다. 요시히로는 자군의 손해가 '경미輕微' 하다고 기록하였으나 시마즈군의 약 10%가 손해(전사자+전상자)를 입은 건 결코 손상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수치이다. 이는 류큐 측이 실제로 응전해 싸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나라는 패하고... 류큐의 그 후]

  슈네이 왕의 일본행

  항복한 슈네이 왕은 1609년 5월 15일에 수행원 1백 명과 함께 시마즈군 선단을 따라 나하를 출항, 사츠마 지방으로 연행되었다. 이 때 시마즈군은 슈리 성내에 있는 막대한 양의 보물들도 약탈하여 사츠마로 가지고 돌아갔다.

  슈네이 일행은 8월 16일에 슨푸 성에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대면했고, 9월 12일에는 에도 성에 있던 쇼군 (토쿠가와) 히데타다秀忠와도 대면했다. 슈네이 왕은 포로가 아닌, 일국의 국왕으로서 정중한 예우를 받았다. 이에야스가 요구했던 빙례聘禮가 드디어 실행에 옮겨진 순간이었다. 다른 나라의 왕이 일본에 붙들려온 건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일로, 조선출병朝鮮出兵의 실패 이후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토쿠가와 정권이【 무위武威 】를 떨친 최초의 대외전쟁이었다. 시마즈 씨의 '쾌거快擧' 는 다이묘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

  슈네이 왕은 2년 후 류큐로 귀국할 수 있었으나, 이에 앞서 가신들과 함께 "말대末代에 이르기까지 시마즈 씨를 거스르지 않는다." 는 취지의 기청문에 서명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유일하게 서명을 거부했던 쟈나 웨카타謝名親方는 처형(処刑, 역주 : 팽형烹刑)당하고 말았다. 쟈나는 사츠마에 억류되어 있을 때 일본에 체류하던 명나라 사람을 통해 명 조정에 구원을 요청하는 밀서를 보냈으나, 이 밀서는 친親 사츠마 파 류큐인들에 의해 중국에서 가로채임을 당하여 결국 명 조정에 도달하지 못했다.

슈네이 왕(1564~1620)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슈네이 왕' 항목)


  시마즈 씨는 류큐에 토지조사檢地를 실시하여 코쿠다카 제도石高制에 의한 막번제幕藩制 국가제도의 영지체계를 이곳에 이식하려 했고, 매년 의무적으로 공납貢納을 바치도록 규정했다. 아마미 군도는 시마즈 씨에게 할양되어, 류큐의 코쿠다카에서 제외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1611년(케이쵸 16년)에는 류큐 통치의 지침이 반영된〈법도 15개조〉가 포달布達되어, 류큐 왕부의 정치적 권한이 제한되기에 이르렀다.


  對 명나라 교섭은 좌절되다

  시마즈 씨는 류큐를 통해 이에야스가 원하던 명일강화교섭日明講和交涉을 개시했다. 1612년(케이쵸 17년 / 만력 40년)에는 류큐의 사절단이 시마즈 씨의 가신인 중국인 카쿠 코쿠안郭国安이 기안한 문서를 가지고 명나라로 건너갔다.

  이보다 전, 류큐는 명나라에【 왜란(倭亂, 시마즈군의 침공) 】을 보고하고 슈네이 왕이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전했으나,【 침공은 일과성에 그쳤고, 왜국은 자비로우며 국왕도 곧 귀국할 수 있다고 합니다. 】라면서 일본측을 옹호하는 논조를 띠고 있었다. 그 배후에는 시마즈 씨의 압력이 존재했으며, 명나라의 경계를 풀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었으리라 보인다.

  그러나 이례적이었던 이번 사절파견은 명나라 조정에서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 규정된 조공 기간(2년 1회)을 위반하였을 뿐 아니라 임검臨檢을 무시하고 상륙했으며, 조공품朝貢品에 수많은 일본산 물품들이 포함되어 있었던데다, 칼을 찬 '왜인(倭人, 사츠마 쪽 사람)' 들이 사절들 속에 섞여 있었기 떄문이다.

  애당초 이 서간에 기록된 일본측의 강화조건도 명나라 입장에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변경의 섬 내지 류큐 어딘가에서 무역을 개시하든가, 양국이 서로 사절단을 파견하여 무역을 할 것인가를 택일하라. 거부한다면 명나라에 군대를 파병할 것이다." 라는, 공갈恐喝 그 자체인 서간의 내용 때문이었다.

  명나라는 류큐가 일본에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사절의 북경행을 허가하지 않았으며, 조공품들도 반환했다. 그리고 "전화를 입은 류큐의 국력이 회복되길 기다리겠다." 는 명목으로 2년 1회였던 조공 기간을 10년 1회로 변경시켰다. 사실상 조공을 중단시키는 처치를 내린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는 일본의 우산 하에 편입된 류큐와의 조공관계를 완전히 끊지는 않았다. 명나라로서도 류큐에 원군을 보내지 않아 패하게 내버려 두었다는 데 부채의식이 있었던 데다, 조공관계 자체가 사라지면 류큐가 완전히 일본에 삼켜져 명나라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가졌기 때문이었다. 조공관계 자체는 유지시켜 류큐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면서도, 류큐를 이용하는 일본의 무역중개는 저지하기 위해 10년 1회의 조공을 제시한 것이다.

  교섭에 실패한 이에히사는 다음엔 자신의 브레인인 난포 분시南浦文之로 하여금 앞의 서간과 거의 흡사한 내용인〈대명 복건군문에 보내는 문서〉를 기초케 하여, 류큐에게 이를 명나라에 전달하게끔 시켰으나 슈네이 왕이 거부했다. 결국 토쿠가와 정권이 원했던 명일강화日明講和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만 것이다.

  對 명나라와의 교섭 좌절이 명백해지자 막부는 일본을 중심으로 삼은 새로운 국제체제(일본식 화이질서日本式華夷秩序) 구축을 모색하였고, 이는 이후 '쇄국(鎖國, 해금海禁)' 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주요 참고문헌>

  - 우에자토 타카시上里隆史《류일전쟁 1609 - 시마즈 씨의 류큐침공》보더잉크(2009年)
  - <류큐의 화기에 대해서>(《오키나와 문화》91호, 2000年)
  - 우에자토 타카시ㆍ야마모토 마사아키山本正昭 <슈리 구스쿠에서 출토된 무구자료에 대한 일고찰>(《기요紀要 오키나와 매문연구》2호, 2004年)
  - 우에하라 켄젠上原兼善《시마즈 씨의 류큐 침략》요쥬쇼린(榕樹書林, 2009年)
  - 우다가와 타케히사宇田川武久《일본의 미술 390 텟포와 이시히야》시분도(至文堂, 1998年)
  - 카미야 노부유키紙谷敦之《막번제국가의 류큐 지배》아제쿠라쇼보(校倉書房, 1990年)
  - 키리노 사쿠진桐野作人 <사츠마 인국지 (112) 슈네이 왕의 항복과 부닌슈無人衆> 미나미니혼신문 2009년 6월 22일자
  - 사키다 미츠노부先田光演 <사츠마군 류큐 침공 당시 토쿠노 섬 전투>(《토쿠노 섬 향토연구회보》26호, 1991年)
  - 요네타니 히토시米谷均 <'전절병제고全浙兵制考''근보왜경近報倭警' 으로 보는 일본 정보>(《8~17세기 동아시아 지역의 사람 / 물자 / 정보교류 上권》카켄보고서(科研報告書, 2004年))


덧글

  • 남중생 2018/08/26 18:21 # 답글

    명청교체가 아니라, 유구 침공 후 전후처리 과정에서 새로운 일본 중심의 쇄국적 화이질서가 나타났다고 분석하는 부분이 흥미롭네요.
    저 "강화교섭"에 대해 좀더 상세히 적혀있었으면 좋으련만... 아무래도 우에자토 선생님의 책을 읽어봐야겠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8/08/26 20:28 #

    화이질서 자체를 뒤엎으려 했던 히데요시의 중국 침략 시도도, 막 복속시킨 류큐를 앞세운 이에야스의 대명강화도 성공하지 못해서 중화제국 중심의 전통적 화이질서에 못 녹아들고 있었던 만큼 어쩌면 독자노선을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겠지만 제 뇌피셜의 영역을 넘지 못하는지라.. ^^;;; 명나라의 쇠퇴와 멸망이 일본 중심 화이질서가 만들어지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으리란 거야 확실하겠지만요.

    아마존에서 훑어보니 우에자토 선생님 책도 제법 많이 나와 있네요.《류일전쟁 1609》와《바다의 왕국 류큐》가 품절되고 없는 건 아쉽긴 하지만. 우에자토 선생님 본인은 이 책 후기에서 우에하라 켄젠의《시마즈 씨의 류큐 침략》과 카미야 노부유키의《류큐와 일본, 중국》을 추천하셨습니다.
  • 남중생 2018/08/26 20:45 #

    앗! 류일전쟁 품절이군요 ㅠㅠㅠ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통계 위젯 (블랙)

5284
536
344125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블랙)

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