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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시마즈島津, 류큐琉球를 침공하다 (6)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108호(2011년 8월호) p.50 ~ 63쪽의 기사인,《시마즈군 류큐 침공 - 17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전쟁을 번역한 것으로, 역사학자 우에자토 타카시上里隆史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슈리 성 포위되다

  타이헤이 다리를 지키는 류큐 부대를 격파한 시마즈 부대는 근변을 방화해가면서 슈리 시가지로 밀물처럼 돌입, 슈리 성을 포위했다. 시마즈군은 4월 1일 오후 4시 경엔 슈리를 통과해 나하로 침입, 나하 항구에서도 시마즈의 부대가 상륙할 수 있도록 했다. 류큐의 민중들은 곳곳에 있는 산으로 도망쳤고, 나하는 이미 주민들이 피난하고 없는 무인도시가 되어 있었다. 나하에 상륙한 시마즈 장병들은 텅 비어버린 나하의 민가에다 자기들 마음대로 숙소를 잡았다.

  이 때 나하에선 류큐 측이 약간이나마 저항을 했던 듯하다. 시챠구이(下庫理, 슈리 성 1층 부분) 고반즈메御番詰인 나카자토 니야中里仁屋는 슈리에서 나하로 향하는 도중에 위치한 큰길에서 27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한편, 시마즈 부대에 포위된 슈리 성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던 듯하다.《키안닛키喜安日記》에 따르면 슈리 성을 포위한 시마즈군의 대열은 성 밖의 슈레이몬守礼門 ~ 츄잔몬에 이르기까지 2열로 늘어서 있었는데, 어떤 승려무사가 슈리 성 정문 칸카이몬歓会門의 망루櫓에서 "사츠마 놈들, 쳐들어 와 봤자 별 거 있겠는가. 한 놈 한 놈씩 쏴 죽여주지!" 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왕부王府가 항복한 후 그는 시마즈군에 포박捕縛당하고 말았다.

슈리 성의 정문 칸카이몬오늘날 사진.
(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슈리 성' 항목)


  그리고 슈리 성 서쪽 끝의 시마조에 아자나(島添アザナ, 전망대)에는 일본인인 야마자키 니큐 슈산山崎二休守三이 지휘하는 병력이 농성해 있었다. 야마자키는 에치젠越前 사람으로 류큐로 건너와, 고텐야쿠(御典薬, 의사医師) 신분으로 왕부를 섬기던 인물이었다. 시마즈 병사가 석루를 기어올라오자 야마자키는 방어전을 벌여 이들을 격퇴하였다. 야마자키 역시 전후戰後 포박당하여 처형당할 뻔 했으나, 슈네이 왕이 금품金品을 주어 시마즈 병사들을 매수買收하였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미 모든 책략이 허사가 된 류큐는, 왕의 동생 구시챤 오오지 쵸세이具志頭王子朝盛 / 키쿠인 소우이菊隠宗意 / 삼사관인 나고 웨카타 료호名護親方良豊 등이 나서 강화교섭을 벌이기 위해 나하 오야미세로 향했다. 시마즈 쪽의 대표는 다이지사大慈寺의 류운龍雲 / 이치키 이에마사市來家政 / 무라오 시게아리村尾重侯 세 사람이었다.

  그러나 강화교섭이 막 개시되었을 때, 슈리의 죠카마치城下町 곳곳에 불길火の手이 일어났다. 시마즈군 병사들이 명령을 무시하고 불을 질렀던 것이다. 거의 승패가 결정된 상황을 보고 방화에 나서는 한편, 전리품戰利品을 챙길 목적으로 잡병들은 제멋대로 약탈행위를 벌였다. 시마즈 측은 나하에 있던 이치키 이에마사의 병력을 슈리로 보내어 병사들의 약탈을 제지하게 했다. 아군의 병력을 보내어 억제시켜야 할 정도로 시마즈군은 통제가 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시마즈 병사들이 위와 같이 방화를 저지른 결과, 키코에 오오키미聞得大君의 어전 / 센푸쿠안仙福庵 / 토미구스쿠 웨카타豊見城親方의 숙소를 위시하여 수많은 민가民家가 잿더미가 되었고, 각 가문이 소장하던 일기日記 / 문서文書 / 귀중한 보물宝物들 역시 화마로 소실되었다. 그 외에도 나하의 코곤사 / 슈리의 경당(経堂, 훗날의 벤자이텐도弁財天堂)까지 병화에 소실된 걸 보면, 시마즈군이 슈리 / 나하 일대에서 광범위한 행동을 벌이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4월 2일, 교섭이 이루어진 결과 구시챤 오오지와 삼사관 우라소에 웨카타浦添親方 / 쟈나 웨카타謝名親方가 인질이 되어 나하로 내려갔다. 다음 날인 4월 3일에는 새로운 인질로 사시키 오오지 쵸쇼(佐敷王子朝昌, 쇼호尙豊)가 보내져, 슈네이 왕은 시마즈군에 항복하겠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시키나바루에서의 저항과 슈네이 왕 항복

  4월 3일, 슈네이 왕은 성을 내려가기 위해 슈리 성에 있던 물자를 옮기기 시작했고, 시마즈군에서는 카고시마 집단 장병들이 이를 감독하기 위해 소수의 인원으로 슈리 성에 입성했다.

  왕부는 시마즈군에 항복하기로 결정했으나, 항복에 반대하던 세력들은 슈리 성을 탈출하여 저항을 시도했다. 기록에 따르면 슈리 성에서 20여 명의 성 병사들이 성벽에서 내린 밧줄을 타고 내려가 주변의 산야山野로 도망치려 했던 것을, 카고시마 집단鹿児島衆 장병들이 추격하여 류큐 측의 2명을 따라잡아 교전을 벌였다. 류큐 병사들은 4명의 시마즈 병사들에게 부상을 입히고 산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하였다.

  이와 같이 슈리 성을 탈출한 사람들 중에선 삼사관ㆍ우라소에 웨카타 쵸우시浦添親方朝師의 아들인 마야마토真大和 / 햐쿠치요百千代 / 마마카루真真苅 3형제도 있었다. 우라소에 웨카타는 쟈나 웨카타와 함께 철저항전파로 꼽히던 인물로, 패전 후에는 전범戰犯이 되어 슈네이 왕 일행과는 별도로 사츠마薩摩 지방에 끌려갔는데, 슈네이 왕의 결정을 어쩔 수 없이 따른 아버지 쵸우시와는 달리 혈기왕성했던 형제들은 항복하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들은 슈리 남동부에 위치한 시키나바루識名原에 이르러 호우모토 니에몬法元弐右衛門 / 우메키타 쇼존보 카네츠구梅北照存坊兼次 / 시치토 집단七島衆 등의 시마즈군 추적자들과 전투를 벌였다. 우라소에 형제들은 분전한 끝에 쇼존보와 시치토 집단의 코마츠 히코쿠로小松彦九郞를 죽이는 데 성공했고, 호우모토에게도 부상을 입혔다. 그러나 우라소에 형제들도 힘이 다하여, 셋 다 그곳에서 전사했다. 그들은 고작 20세 전후의 나이에 류큐 젊은이들의 마지막 고집을 보여주었다. 이 때 야기 사토누시 세이츄(屋宜里之子政喬, 토쇼츄東承忠)도 시키나바루에서 26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우라소에 형제들에게 배속되어 있던 사람 중 한 명이었으리라. 참고로 이 전투는 류큐 침공 이래 시마즈군의 부장급이 죽음을 당한 유일한 전투가 되었다.

  우라소에 형제 등의 항전파가 슈리 성을 탈출한 4월 3일 밤, 왕의 동생 쇼코우尚宏가 슈리 성의 슈네이 왕 거처를 찾아가 "왕비님, 여관女官, 신녀神女들에게 멸망의 모습을 보여줄 우려가 있으니" 성을 내려가 항복하자고 권했다. 슈네이 왕은 이 말을 듣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심정으로 이를 응낙했다. 이 일화는 단순한 '여성 배려' 가 아니라 옛 류큐에서 뿌리 깊이 자리잡고 있던 오나리가미 신앙(オナリ神仰, 여성의 영적 우월성을 중시하던 신앙)과 연관되어 있으리라 추측된다.

오늘날의 슈리 성 정전正殿 야경
(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슈리 성' 항목)


  4월 4일, 드디어 슈네이 왕은 슈리 성에서 내려왔다. 슈네이 왕 혼자만이 남여가마腰輿를 탔을 뿐, 왕비를 위시한 여관들은 모두 옷자락을 걷어올린 채 걸었고, 왕자 이하 관인들도 모두 도보徒步로 성 밖을 나왔다. 슈네이 왕 일행은 삼사관ㆍ나고 웨카타의 저택으로 향했으나 이미 시마즈군에게 파괴되어 황폐해져 있었기에 국왕이 머무를 곳은 아니라 생각하고, 이번엔 우라소에 미우돈(浦添美御殿, 슈리에 있던 우라소에 슈 가문浦添尚家의 출장기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슈네이 왕이 슈리 성에서 내려왔다는 소식에, 시마즈군의 약탈행위를 겁내어 피난했던 사람들이 동굴 / 골짜기 이곳저곳에서 다시 돌아왔다. 목숨을 건지긴 했으나 그들은 시마즈군에게 의복衣裝을 약탈당했고 사재私財를 빼앗겼으며, 집까지 방화당한 걸 보고 비탄에 빠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전쟁에선 시마즈 군이 '인간사냥(人取り, 히토도리)' 을 저질렀다는 기술은 확인할 수 없다. 인간사냥 금지가 어느 정도 군규軍規로 자리잡은 것도 한 몫 했었는지, 조선朝鮮과의 전쟁에서 벌였던 것처럼 대규모 인원을 일본으로 끌고 가는 일은 없었던 듯하다. 단지 토카라 7개 섬トカラ七島 중 하나인 쿠치노 섬口之島에서는 "류큐 침공 당시 종군했던 마에다 헤이자에몬前田平左衛門이란 자가 류큐인을 끌고 와 나고(名子, 예속농민)로 삼았다." 는 전승이 그 나고의 자손들에게 전해지고 있으므로, 인간사냥은 일부 행해졌던 걸로 보인다.

  그리고 산야로 피난해버린 건 일반 주민뿐만이 아니었다. 오오사토 아지大里按司 / 이에 아지 쵸츄伊江按司朝仲 / 구스쿠마 웨카타 세이큐城間親方盛久 / 마부니 웨카타 안코摩文仁親方安恒 등은 슈리 성에 농성하는 대신 산야로 숨어버렸기에, 이들은 훗날 슈네이 왕으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임금을 버리고 독자행동을 취했던 그들의 존재는, 본래 권력기반이 취약했던 슈네이 정권이 전쟁의 혼란통에 더욱 더 통제가 되지 않던 상태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덧글

  • 남중생 2018/08/25 13:16 # 답글

    "왕비님, 여관女官, 신녀神女들에게 멸망의 모습을 보여줄 우려가 있으니" 항복을 권했다... 는 것을 오나리가미 신앙의 발현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조선이었다면 "종묘사직"이라고 표현되었을 것이 유구국에서는 여성 신관들(로 이뤄진 신앙 체제)이었다는 거죠.


    확인차 여쭙지만, 슈리의 쵸카마치(城下町)는 저렇게 읽는게 맞는지요?
  • 3인칭관찰자 2018/08/25 15:25 #

    그렇군요. 조선이 저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면 '종묘사직을 보전하기 위해' 란 말이 100% 나왔겠지요. 적어도 동아시아 문화권에선 여성들이 생전에 저 정도의 종교적 지위 내지 영적 권위를 지니는 건 히미코 정도밖에 생각나지 않는데 그건 과연 어떨지....

    '쵸카마치' 는 수정했습니다.
  • 2018/08/27 16:0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08/27 18:2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8/08/28 10:0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8/08/28 14:5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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