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관찰자

beholderer.egloos.com

포토로그



《역사군상》시마즈島津, 류큐琉球를 침공하다 (4)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108호(2011년 8월호) p.50 ~ 63쪽의 기사인,《시마즈군 류큐 침공 - 17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전쟁을 번역한 것으로, 역사학자 우에자토 타카시上里隆史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오키나와 섬에서의 전투]

  나키진 구스쿠今帰仁グスク 함락되다

  단기결전을 지향하던 시마즈군은 아마미奄美 군도를 제압한 다음 날인 3월 25일에 신속히 오키나와 섬沖縄島 북부의 부속 섬인 코우리 섬古宇利島에 도착했다. 코우리 섬은 오키나와 섬의 북방 현관문인 운텐 항구運天港의 입구 옆에 위치해 있다.

  3월 27일, 카바야마 히사타카樺山久高 등의 군대가 군선을 타고 나키진 구스쿠를 향해 출항했다. 오키나와 섬 북부 일대를 통괄하는 '산호쿠 칸슈山北監守' 의 거성居城ㆍ나키진 구스쿠는 5대 나키진 아지今帰仁按司인 쵸요우(朝容, 쇼코쿠시向克祉)가 기거하며 지키고 있었으나, 3월 25일 시점에서 철수하여 빈 성이 되어버렸다는 정보가 시마즈군에게 이미 들어와 있었다.

  이 시기, 왕부는 협의를 거쳐 다시 선승禪僧인 키쿠인 소우이菊隠宗意를 강화사자講和使者로 파견했다. 그는 일본에 유학하여 다이토쿠사大徳寺의 주지ㆍ고케이 소우친古溪宗陳의 불법을 계승한, 류큐에서 손으로 꼽을 만한 선승이었다. 카바야마 히사타카와도 알고 지내던 사이였기에, 시마즈군과 강화교섭을 벌이라는 슈네이 왕尙寧王의 명령을 받았을 것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이라면, 강화를 신청한 건 어디까지나 시마즈군에 '정전停戰'을 요구한 것일 뿐, 결코 '전면항복全面降伏'을 의미한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선 아직 류큐 왕부의 정규군正規軍이 건재했고, 류큐의 중핵인 슈리首里와 나하那覇는 아직 공격조차 받지 않은 상태였다. 류큐 측은 시마즈군에게 어느 정도의 양보는 용인하더라도 자신들의 입장을 최대한 확보하면서 시마즈군을 철수시키려 한 것이다.

  키쿠인 소우이 / 삼사관三司官 나고 웨카타 료호名護親方良豊를 위시한 30명의 강화사절단은 나키진으로 가 시마즈군에 교섭을 요청했으나, 시마즈 측은 "강화교섭은 나하에 가서 하겠다." 며 류큐 측의 요구를 일축一蹴했다. 키쿠인 등은 나하로 돌아가야 했고, 나고 료호는 인질로 잡혀 시마즈군에 억류되었다. 시마즈군의 작전방침에 따르면【 류큐 측이 강화를 신청하면 신속히 응낙하라. 】고 되어 있었으나, 당초의 목표인 아마미 군도 점령을 달성한 카바야마로선 이 참에 슈리와 나하를 공략하여 좀 더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으려 했던 것이리라.

  3월 27일 오전 9시 경, 시마즈군은 운텐에 상륙, 시마즈 병사들은 가는 곳마다 방화放火하기 시작했다. 시마즈군은 해안부인 오야도마리親泊를 거쳐 유일한 등성로인 '한타미치ハンタ道' 를 올라가, 텅 빈 나키진 구스쿠를 점령했다. 이 때 카바야마 / 이쥬인伊集院 부대는 구스쿠 내부의 궁전殿舍에까지 불을 질렀던 것 같다. 그뿐만 아니라 시마즈군은 이 근변의 나키진 / 오야도마리 / 시지마志慶真 부근의 마을(村, 시마しま) 곳곳을 방화했을 뿐 아니라 약탈행위乱取り까지 저질렀다. 나키진 부근의 여러 마을들은 시마즈군 잡병雜兵들이 배를 채우는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형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나키진 구스쿠에서 철퇴한 산호쿠 칸슈는 시마즈군이 나키진 구스쿠를 점령한 다음날인 3월 28일, 2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그 사인死因은 불명이지만 정황으로 볼 때 자연사自然死했다고 생각하긴 힘들며, 전사戰死했을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나키진 주변에서 어떠한 전투가 벌어졌으리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시마즈군, 오오완大湾에 상륙

  나키진 구스쿠를 함락시킨 시마즈군은 드디어 류큐의 현관문인 나하를 향해 진군하려 했으나, "이미 나하 항구에 쇠사슬鎖이 쳐졌고 류큐군이 방어를 견고히 하고 있다" 는 정보를 입수했다. 기실 오키나와 섬 주변은 산호초珊瑚礁로 둘러싸여 있어서 아무 데나 선박을 대는 건 불가능했고, 무리하게 접안接岸을 시도했다간 곧바로 좌초坐礁당하고 만다. 거기에다 시마즈군은 도합 1백 척이 넘는 대선단이었다. 이만한 선박들을 안전하게 정박시킬 수 있는 항만은 운텐 항을 제외하면 나하 항구 정도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나하 항구에 강행돌입하려다간 방어태세를 갖춘 류큐군에 의해 커다란 손해를 입을 게 뻔했다.

  그러자 카바야마 히사타카는 7척의 군선만을 해로를 통해 나하 항구로 보내고, 나머지 군세는 중도에 상륙하여 육로陸路를 진군하기로 결정했다.

  시마즈군은 3월 29일 야밤에 운텐 항구를 출항하여 나하 방면을 향해 남하를 개시했다. 도중에 선단은 오키나와 중부의 오오완도구치(大湾渡口, 지금의 요미탄손読谷村 도구치)에 정박, 카바야마 히사타카 부대를 위시한 시마즈군의 주력은 여기에서 상륙하여 슈리를 향해 육로 진군을 개시했다. 오오완도구치는 히쟈 강比謝川의 하류 유역에 위치한 비교적 커다란 하구河口로, 구불구불 이어진 강줄기로 인해 선박 계류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한편 나키진에서 강화를 거절당한 키쿠인 등의 사절은 운텐을 출항하여 29일 오전 4시 경 마키나토牧湊에 도착, 배를 버리고 도보徒步로 슈리로 가는 길을 서둘렀다. 마침 내린 호우로 인해 모두가 하카마袴를 걷어올리고 걸어갔고, 그들의 발에서 나온 피는 모래를 물들였으며 희었던 하카마도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전한다.

  이윽고 키쿠인들이 뒤를 돌아보자 챠탄 마기리北谷間切의 스나베砂辺 곳곳이 불을 뿜고 잇었다. 그 화염은 낮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밝게 불타고 있었다 한다. 오오완에서 상륙한 시마즈군은 주변 민가民家마다 불을 지르며 남하南下하였던 것이다.

  챠탄 구스쿠에는 사시키 치쿠돈 코우도(佐敷筑登之興道, 요케이호雍肇豊)가 농성하고 있었으나 슈리로 가는 길을 서두른 시마즈군은 챠탄 구스쿠를 그냥 지나친 듯하다. 훗날 슈리 성 함락 보고를 접한 코우도는, 비탄에 잠긴 나머지 구스쿠에서 자결하였다.

  키쿠인 등은 마키나토에서 출발, 우라소에浦添의 초소番所에 이르러 휴식한 후, 새벽에 이르러 드디어 슈리 성에 도착했다. 강화교섭이 불발되었다는 키쿠인의 보고를 받은 슈네이 왕과 여러 대신들은 동요動搖를 숨기지 못했다고 하나, 왕부의 소장파 고관들은 "별 것 있겠는가. 빨리 쳐들어 와 봐라. 일전을 겨뤄보자." 고 호언하며 새벽부터 방어체제를 정비할 목적으로 나하로 내려갔다 한다. 류큐 왕국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것은 아니었고, 왕부 내에서는 항전을 외치는 자도 있었던 것이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통계 위젯 (블랙)

749
261
375735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블랙)

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