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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시마즈島津, 류큐琉球를 침공하다 (3)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108호(2011년 8월호) p.50 ~ 63쪽의 기사인,《시마즈군 류큐 침공 - 17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전쟁을 번역한 것으로, 역사학자 우에자토 타카시上里隆史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 개전開戰 ]

  아마미오 섬 상륙

  1609년(케이쵸 14년) 3월 1일, 약 100척의 군선軍船이 사츠마 야마카와 항구薩摩山川港에 집결하였다. 시마즈군島津軍 선단은 (시마즈) 이에히사家久ㆍ요시히로義弘 부자(역주 : 요시히로 쪽이 아버지, 이에히사가 아들ㆍ당시 시마즈 당주)의 배웅을 받으며 3월 4일에 류큐를 향해 출항했다. 시마즈군은 쿠치노에라부 섬口永良部島을 경유하여 3월 7일에 아마미오 섬奄美大島에 도착했다. 시마즈군은 세 갈래로 갈라져, 카바야마 히사타카樺山久高의 부대가 카사리 만笠利湾의 츠시로미나토津代湊 / 키모츠키 카네아츠肝付兼篤ㆍ이쥬인 히사모토伊集院久元 등의 부대 역시 카사리 만에 있는 후카에쯔深江津 / 히라타 마스무네平田増宗의 부대는 니시코미西古見에 각각 상륙하였다.

아마미 군도의 지도.(출처 : 나무위키 '아마미 군도' 항목)

지도 북쪽의 큰 섬이 아마미오 섬, 북동쪽의 섬이 키카이 섬,
지도 중앙에서 약간 왼쪽에 위치한 게 토쿠노 섬,
지도 남서쪽의 두 섬은 오키노에라부 섬, 요론 섬.


  3월 8일, 후카에쯔에 상륙한 키모츠키 부대는 카사리의 쿠라모토(藏元, 류큐의 지방행정기관)를 아마미오 섬의 군대가 수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어, 이른 아침부터 위력정찰에 나섰다. 그러나 아마미오 섬 군대는 시마즈 군 내습을 알아챈 건지 그들 다수가 산림으로 도망쳐 숨어버렸기에 쿠라모토에 남은 인원은 얼마 되지 않았고, 키모츠키 부대는 이곳을 쉽게 제압하였다. 카네아츠는 현지의 장로들을 소집하여 "주민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는 뜻을 전달한 후 후카에쯔로 귀환하였다. 그리고 카사리마기리笠利間切의 슈리오오야코(首里大屋子, 마기리의 장) 이텐(為転, 우미지로가네思次郞金)은 신속히 항복한 후 차남을 인질로 바쳤다.

  이렇게 아마미오 섬 북부를 제압한 시마즈군은 3월 12일 카사리 만을 출항하여 야마토하마大和浜에 착선했다. 여기는 야키우치마기리屋喜內間切의 슈리오오야코인 모테다루茂手樽가 지휘하는 3천 명의 군대가 방어용 울타리를 구축하여 지키고 있었다. 카바야마는 선상에서 '텟포(鉄砲, 이시히야石火矢 종류?)'를 쏘아 울타리를 파괴토록 한 후, 모테다루를 생포하고 류큐군을 패주시켜 야키우치마기리를 제압했다.

  시마즈군은 이 시점에서 섬 내부의 저항 움직임이 미미한 걸 보고, 당초에는 아마미오 섬에 주둔시킬 예정이었던 키모츠키 부대를 오키나와 섬沖縄島으로 전용하기로 결정하였다.(《키모츠키 가문 문서肝付家文書》) 3월 16일에는 키모츠키 카네아츠 / 이쥬인 히사모토의 부대가 니시코미에 도착, 이쪽의 저항은 선행하였던 히라타 부대에 의해 진압되어 있었는데, 니시코미에서 벌어진 전투의 경우 사료에 남겨진 기록이 없다.

  한편 아마미오 섬과 이웃한 키카이 섬喜界島은 침공경로에서 제외되어 있었음에도, 아마미오 섬의 거점들을 줄줄이 함락시켜 가는 시마즈군의 위세를 보며 불리함을 느낀 것인지 슈리오오야코 칸타루가네勘樽金는 시마즈군을 찾아가 무혈항복을 표명, 키카이 섬도 시마즈군에 의해 제압되었다.

  이렇게 하여 아마미오 섬은 단기간에 제압되었는데 류큐 왕부에서는 시마즈의 침공에 대응하여 토마리泊의 힛샤筆者인 이사가와 시겐쵸伊指川子元長를 아마미로 파견, 정보수집 활동을 벌이도록 하여 3월 10일에【 병선이 오오시마에 착진着津, 섬의 군대가 미약하여 패군했음. 】이란 아마미오 섬 함락 보고(실제론 이때 점령당한 건 카사리 뿐이었음)를 받은 후, 강화사자로 텐류사天龍寺의 선승인 이분以文을 아마미오 섬에 파견하였다.

  3월 16일엔 오키나와 섬 북부 나키진今帰仁에 시마즈군이 상륙했다는 오보가 들어와, 류큐 국내가 대혼란에 빠졌다. 특히 나하那覇 / 토마리泊 등을 비롯한 항만부의 도시에선 시마즈군의 상륙을 두려워한 주민들에 의해 집집마다 가재도구를 말 / 수레에 싣고 나오는 인파가 몰리면서 대혼란이 빚어졌다.


  토쿠노 섬에서의 분전

  니시코미에 있던 시마즈군 후발부대는 토쿠노 섬徳之島을 제압하기 위해 3월 17일에 출항을 시도했으나, 바람과 파도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선박들은 항구로 회항하였다. 이윽고 야키우치마기리 제압을 완료한 카바야마 히사타카의 선단 수십 척이 니시코미에 도착했다. 아마 야마토하마에서 출항해왔으리라 생각된다. 그런 한편, 17일의 출항 당시 시마즈 군선 전체가 니시코미로 회항할 수 있었던 건 아니어서 일부 군선은 바람에 휩쓸려 키모츠키 카네아츠 / 시라사카 아츠토시(白坂篤利, 아츠쿠니篤)가 각각 승선한 선박 2척이 토쿠노 섬 카나마사키(金間崎, 지금의 토쿠노 섬 마치야마町山)에, 카네아츠의 종자들이 탄 선박을 포함한 7척의 선박도 같은 섬의 완야(湾屋, 지금의 아마기쵸 아사마天城町浅間)란 곳에 각기 표착했다.

  류큐 왕부는 이 때 토쿠노 섬에선 어느 정도의 수비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왕부 중앙은 토쿠노 섬의 군사령관으로 '반슈누시토리番衆主取' 를 파견하여, 완야 / 아키토쿠秋德 등의 항만부에는 1천 명 이상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는 재지세력在地勢力들만이 저항했을 뿐인 아마미오 섬과는 질적으로 차이나는 것이었다. '반슈누시토리' 파견이 1608년 겨울 시점에 이미 행해진 걸 보면 왕부도 무위무책無爲無策으로 전쟁에 돌입했던 건 아니며, 나름대로 시마즈군의 내습에 대비하여 사전에 방어체제를 갖추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히데요시秀吉의 침공위기가 고조되던 1592년에도 아마미 지역에 관리들을 파견했던 것처럼, 왕부는 이전부터 아마미(=토쿠노 섬)를 '방파제防波堤' 로 삼아 오키나와 섬에 적군이 도달치 못하도록 저지하겠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었다.

  완야에선 표착한 시마즈 군선 주변에 류큐군 1천여 명이 몰려들어, 선박들을 포위했다. 다음 날 시마즈군은 배에서 내려 해안에 상륙한 후, 화승총 공격鉄砲攻擊을 퍼부어 류큐 부대를 완전히 무너트렸다. 시마즈군은 패주하는 류큐 부대를 무자비하게 추격하여 류큐 장병 50여 명의 목을 베었고, 완야 전투는 류큐 쪽의 참패로 끝이 났다. 병력적으론 류큐 측이 우세했음에도, 대량으로 장비되었던 화승총 운용이 승패를 결정지은 것이다.

  3월 20일엔 시마즈 군선 세 척이 토쿠노 섬 아키토쿠에 도착했다. 여기서도 시마즈군은 방어망을 치고 기다리고 있던 류큐 부대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반격에 나서, 류큐 부대를 곳곳에 몰아넣은 후 2~3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아키토쿠 상륙에 성공한 시마즈 부대를 기다리고 있던 건 오키테(掟, 마을 관리)들인 형 사부로가네三郞金 / 동생 우미고로가네思五郞金 형제가 인솔한 토쿠노 섬의 군대였다. 토쿠노 섬의 관리세력들은 칼 / 창 / 나기나타로 무장하고 있었고, 사부로가네는 거대한 몽둥이棒를 들고 "이 몽둥이로 천 명이든 2천 명이든 한 방에 때려잡아주지!" 라 호언하였으며, 나머지 농민들은 끝이 날카로운 나무몽둥이 내지는, 구멍에다 식칼이나 산도山刀를 부착한 대나무를 쥐고 "때려 죽여버려!" 라는 사부로가네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시마즈 부대에게 돌격했다. 혼고 히사타케本郷久武가 지휘하는 쇼나이 집단庄内衆에 속한 7명이 가장 먼저 전사하였고, 시마즈 부대는 밀리는 기색을 보였다. 용맹과감한 관리 형제들의 분전은 계속되어, 이어서 시치토 집단七島衆의 선장船頭 24명 가운데 6명이 전사하고 말았다.

  고전苦戰을 계속하던 시마즈 부대였으나, 쇼나이 집단의 시부야 탄고노카미渋谷丹後守가 쏜 화승총 탄환이 사부로가네의 가슴을 관통하면서 전황은 역전되었다. 사부로가네는 "폭음과 함께 몽둥이 끝에서 불이 일더니 이렇게 쓰러지고 말았다. 모두 도망쳐라!" 라 외치고 민가로 옮겨진 후 숨이 끊어졌다. 동생 우미고로가네도 해안가에서 죽음을 당했다. 대장을 잃은 토쿠노 섬 군대는 시마즈군의 손에 줄줄이 살해당했고 결국 아키토쿠는 제압당하고 말았다. 시마즈군이 거둔 류큐군 수급은 2~3백 개에 달했다.

  관리 형제의 공격과 동시에 아키토쿠의 각 가정에서는 좁쌀죽粟の粥를 끓여 언덕과 가도로 흘려보내 시마즈군 장병들의 다리에 화상을 입히려는 시도를 했다고 한다. 이 행위는 단순히 시마즈 군 장병들에게 물리적인 대미지를 입히기 위한 게 아니라, 일종의 주술적인 의미 역시 포함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들은 좁쌀죽이 악령을 쫓아내는 영력(霊力, 세지)을 갖고 있다고 믿고 있어서, 예를 들자면 아마미오 섬에서는 마을들의 접경지대가 있는 산등성이 수로마다 악령이 마을에 침입하는 걸 막는다면서 노로(여성 신관)들이 좁쌀죽을 흘려보내는 의식이 행해지고 있었다 한다. 그런 토쿠노 섬의 사람들이 보기에 시마즈군은 그야말로 악령悪霊 그 자체였던 것이다. 류큐에서는 영력(세지)이 실제의 전투력과 동등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관념이 존재하였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토쿠노 섬에서는 무기를 잡지 않은 사람들도 전투에 '참가參加' 했다는 말이 되겠다.

  3월 21일, 토쿠노 섬의 왕부 행정 중심기관이 놓여 있던 카메츠亀津에도 시마즈 부대가 도착, 다음 날인 22일에는 대규모 '산 사냥山狩り'이 행해졌다. 카메츠에 있던 왕부 관리들이 부근의 산림에 잠복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산 사냥에 의해 토쿠노 섬의 류큐군 대장 '반슈누시토리' 가 생포되었다. 그는 삼사관三司官 쟈나 웨카타 리잔謝名親方利山의 사위로, 오우칸(黃冠, 페친親雲上)의 고위 관직을 갖고 있던 자였다. 동시에 토쿠노 섬에 파견된 요나바루 페친 쵸치(与那原親雲上朝智, 쇼코우키向洪基)도 대거 침략해 들어온 시마즈의 군선軍船을 보고 중과부적이라 여겼는지, 전투를 치러보지도 않고 항복하였다.

  3월 23일, 카메츠에 주둔했던 시마즈군은 아마미오 방면으로 향하는 류큐 선박 2척을 발견, 즉각 선박 2척을 보내 추격하게 했다. 아마 이 두 척의 류큐 선박은 강화교섭을 목적으로 아마미오 섬 파견을 명 받은 텐류사의 이분 일행이었을 것이다. 이분이 시마즈군과 교섭을 벌인 흔적은 보이지 않는데다 이후 그의 행적조차 확실치 않은데,《키모츠키 가문 문서》에 따르면【 이분 등은 교섭을 벌이기도 전에 명령을 어기고 도망쳐 자취를 감췄다. 】고 적혀 있다.

  3월 24일, 시마즈 군은 카메츠를 출항하여 오키노에라부 섬沖永良部島으로 향했다. 선발대인 10척의 카바야마 부대가 섬에 상륙하자마자 '오키노에라부 섬의 대장沖永良部島の主' 인 우미카마도思鎌戸는 싸워보지도 않고 곧바로 항복했다. 오키노에라부 섬 주변은 암초지대暗礁地帯로 가득하여 선박이 접안하는 자체가 곤란했다. 그렇기에 오키노에라부 측은 시마즈군이 쳐들어온다손 쳐도 그대로 오키나와 섬으로 향할 것이라 상정하고 있었으나, 불운하게도 바다의 큰 조류는 시마즈군 군선들이 이와세


덧글

  • 차가운 도시남자 2018/08/18 21:18 # 답글

    유쿠인들도 이름을 일본식으로 쓰는 걸 보면 원래 일본의 영향이 더 컸었나 봅니다. 재미있네요. 주술을 거느니 막대기에서 불이나더니 죽게된다느니.
  • 3인칭관찰자 2018/08/19 01:26 #

    중국과 일본 양쪽에 모두 줄을 대야만 했던 탓인지 류큐인들은 중국식 이름과 일본식 이름을 둘 다 가지고 경우에 따라 양쪽 성을 혼용했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전국시대를 겪은 일본과는 달리 화승총에 대한 내성은 없었겠죠. 좁쌀죽을 흘려보내면서 주술적 효과를 기대하는 건 저도 이해가 잘 안 가긴 하지만...
  • 남중생 2018/08/19 22:35 # 답글

    저도 중앙군을 파견한 토키노 섬의 군대에도 화기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는 점이 흥미롭네요.
    오키나와 왕부에는 오히려 일본보다도 먼저 삼안총 등 핸드건 단계의 화기가 전래되었는데도 말이죠...
    어쩌면 왕국의 영토가 여러 섬으로 나뉘어있는 탓에 기술의 전파가 느려서 사츠마 군과 저런 격차를 보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8/08/20 00:12 #

    저자분 첨언에 따르면 류큐 왕국의 방위체계 자체가 류큐 본도, 특히 슈리와 나하를 방비하기 위한 일극집중체계여서(나하에 군사력을 집중하고 해안포대를 적절히 활용하여 시마즈군의 나하 상륙시도를 한번 격퇴하는 덴 성공했다고) 그 외의 도서는 일부 파견군과 관리들을 제외한 나머지 병력들의 무장과 훈련도가 정말로 조악했다던데 그런 영향도 있었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

    800자루 가까운 화승총을 운용했던 시마즈에 비해 류큐 쪽은 개인화기의 질과 양, 그리고 집단적 운용이란 점에서만큼은 대적하기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 남중생 2018/08/20 00:27 #

    군사적으로 실제 격차를 보인 점은 (안타깝지만ㅠ) 이해가 되는데, 지역 병력이라고는 해도 총에 대한 이해가 저 정도였을까? 싶기는 합니다. 설령 그전까지 몰랐더라도 중앙군이 최소한 "불뿜는 지팡이는 피해라"라고 말해줬을 것 같아서요ㅋㅋ

    "화기를 발사하는 소수 병력과 이를 얕본 (어리석은) 재래식 군대"라는 서사가 역사의 많은 일화에 서려있고, 일본사도 여기에 예외는 아니기 때문에 의심을 갖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3인칭관찰자 2018/08/20 19:37 #

    그렇긴 하네요. 설령 아마미 군도 사람들이 화승총에 대한 개념이 없었더라도 중앙군 정도 되면 싸우기 전에 현지 사람들에게 총기에 대한 기본지식 정도는 알려줄 수 있었을거고 또 알려주는 게 인지상정일텐데....

    강력한 화기를 가진 문명국 군대 vs 전근대적 장비로 무장한 미개국 군대라는 도식은 분명 익숙하긴 하지만 후자 쪽에 폭력적으로 작용할 수 있겠네요..

  • 진냥 2018/08/20 11:12 # 답글

    바람이나 조류조차 시마즈 군을 돕는 모양새가 되었네요. 하늘이 류큐를 버리는가~(어디에 이입)
  • 3인칭관찰자 2018/08/20 19:50 #

    도서전이었던 만큼 류큐에도 신풍이 한번 불었으면 여파가 컸을 텐데 말입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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