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관찰자

beholderer.egloos.com

포토로그



《역사군상》시마즈島津, 류큐琉球를 침공하다 (2)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108호(2011년 8월호) p.50 ~ 63쪽의 기사인,《시마즈 군 류큐 침공 - 17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전쟁을 번역한 것으로, 역사학자 우에자토 타카시上里隆史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시마즈군의 군단구성軍団構成과 장비裝備

  류큐를 침공한 시마즈군의 진용은 다음과 같았다.
  (◆는 산보우三方. 즉 시마즈島津의 가신집단. ■은 잇쇼 집단一所衆이라 불리는 도자마外樣 독립영주들)

  ◆ 류큐 침공군 대장 : 카바야마 히사타카樺山久高
  ◆ 류큐 침공군 부장 : 히라타 마스무네平田増宗

  ◆ 카고시마 집단(이에히사의 가신단)
   - 카바야마 히사타카(이에히사의 가로家老. 침공군 대장 겸직)
   - 혼다 치카마사本田親政
   - 이치키 이에시게(市來家繁, 전투 지휘관1武頭)
   - 무라오 시게아리村尾重侯
   - 하세베 사네즈미(長谷部実純, 병기 담당자兵具奉行)
   - 야마가 시게유키(山鹿鎮幸, 선박 담당자船奉行)
   - 시라사카 아츠토시(白坂篤利, 아츠쿠니篤国라고도) 등등

  ◆ 코쿠분 집단(요시히사의 가신단)
   - 히라타 마스무네(요시히사의 가로家老. 침공군 부장 겸직)
   - 이쥬인 히사모토(伊集院久元, 전투 지휘관)
   - 사타 타다마스佐田忠増
   - 토고 시게하루東郷重治
   - 코다마 토시마사児玉利昌 등등

  ◆ 카지키 집단(요시히로의 가신단)
   - 카와카미 나오히사(川上直久, 전투 지휘관)
   - 사이고 이키노카미西郷壱岐守
   - 우메키타 카네츠구梅北兼次
   - 호우모토 지에몬法元治右衛門 등등

  ■ 키모츠키 집단(사츠마 키이레薩摩喜入)
   - 키모츠키 카네아츠(肝付兼篤, 가문 당주. 침공군 부장 대우2)

  ■ 쇼나이 집단(휴우가 미야코노쇼日向都城)
   - 혼고 히사타케(本郷久武, 가문 당주인 혼고 타다요시本郷忠能의 대리인)

  ■ 타네가시마 집단(오오스미 타네가 섬大隅種子島)
   - 타네가시마 로쿠로에몬(種子島六郞右衛門, 가문 당주인 타네가시마 히사토키種子島久時의 대리인)

  ◎ 시치토 집단(토카라 열도トカラ列島)3
   - 우두머리(선장船頭) 24명과 그 배하의 250명

  1. 집단의 반장組頭을 의미.
  2. '후진의 대장後陣の大將'으로 아마미오 섬(奄美大島, 아마미오오시마)의 점령을 담당
  3. 류큐로 가는 길 안내역嚮導役을 담당
 
  대립하는 산보우三方 가신단을 그대로 한 부대로 묶고, 거기에다 독립성 강한 잇쇼 집단一所衆을 참가시킨 편성은 기본적으론 조선출병 시기와 달라지지 않아, 시마즈 씨 권력이 재지영주在地領主들의 연합이란 성격에서 탈각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히사 / 요시히사 / 요시히로 각자의 가신(산보우三方)들로 이루어진 군대 + 거물급 도자마 가신인 키이레 키모츠키 씨 / 혼고 씨 / 타네가시마 씨 등 잇쇼 집단一所衆 + 토카라 열도의 시치토 집단七島衆이 합쳐진 혼성부대였다. 대장은 이에히사의 가로인 카바야마 히사타카, 부장으로는 요시히사의 가로인 히라타 마스무네가 기용되었다. 그리고 잇쇼 집단의 키모츠키 카네아츠가 '후진의 대장'이 되어 아마미오 섬 제압전을 명 받았다. 그 외에 종군승려陣僧인 다이지사大慈寺의 류운龍雲, 야마카와 집단山川衆, 도구 관리자들御道具衆, 사쿠라지마 섬桜島의 선박 도편수船大工, 보노츠坊津ㆍ아가타(県, 미야코노쇼?)의 도편수大工들까지 포함하여 총 숫자 3천 명의 군대가 되었다.

  조달된 무기를 보면 화승총鉄砲 734자루, 탄환ㆍ화약 37,200발, 활 117자루 뿐만 아니라, 낫 397자루, 도끼ㆍ손도끼鉈 등을 비롯한 도구道具 398점도 준비되었다. 이는 적지에서의 카리타苅田, 즉 식량 현지조달을 벌이기 위함이라 생각된다. 류큐 침공에 앞서, 이에히사는 카바야마 히사타카에게 다음과 같은 5개 조 작전방침을 전달했다.

  류큐琉球 측이 강화講和를 요청한다면 신속히 응낙할 것.
  강화가 성립된다면 7월 정도까지는 군대를 철퇴撤退시킬 것.
  작전에 성공했을 경우 류큐 왕부王府의 수뇌진들을 사츠마로 끌고 오고, 류큐의 조세租稅ㆍ과역課役은 시마즈 측이 규정할 것.
  국왕이 장기농성長期籠城에 들어갔다면 성 주변을 방화한 후 전군은 철퇴, 점령占領을 단념하라. 단 주변 열도에서 인질人質을 확보한 후 귀환할 것.
  병량미 징수는 본래의 류큐 연공부담보다 적게 할 것.

  이와 같이, 시마즈군의 방침은 '단기결전短期決戰'이었다. 이는 '산보우''잇쇼 집단' 등으로 구성된 혼성부대인 시마즈군이 류큐와 싸우기 전에 내부대립으로 무너질 수 있다는 위험성을 잉태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역전의 용사들도 섞여 있던 시마즈군이었으나, 최대의 아킬레스건이 자군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던 상태였다.


  류큐 왕국의 군제軍制와 군비軍備

  그럼 시마즈군을 요격하는 류큐 왕국의 군사력은 어떠했을까?
  (□ : 삼사관三司官의 통제를 받는 히키ヒキ / ○ : 마기리군間切軍)

  ◇ 슈리 친군(首里親軍, 슈리오야이쿠사) : 국왕(国王, 아지노나카노아지世の主)이 지휘

   □ ㅇㅇ코오리(??のこおり, 丑日番) : 세이야리토미히키勢遣富ヒキ / 세다카토미히키世高富ヒキ / 우키토요미히키浮豊見ヒキ / 쿠모코토미히키雲子富ヒキ or 아마에토미히키安舞富ヒキ
   □ 니시노코오리(北のこおり, 巳日番) : 쟈쿠니토미히키謝国富ヒキ / 시마우치토미히키島内富ヒキ / 오시아케토미히키押明富ヒキ / 요츠기토미히키世次富ヒキ
   □ 난바라노코오리(南原のこおり, 酉日番) : 세치아라토미히키勢治荒富ヒキ / 후사이토미히키相応富ヒキ / 요미치토미히키世持富ヒキ / 쿠모코토미히키雲子富ヒキ or 아마에토미히키安舞富ヒキ

  (역주 : 위 12개의 '히키ヒキ' 읽는 법을 아시는 분은 댓글로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게시글에 히키들의 명칭을 반영했습니다. 정보를 제공해주신 남중생 님께 감사드립니다.)


   ○ 남부 각지의 마기리군
    - 도미구스쿠豊見城 / 코친다東風平 / 구시찬具志頭 / 시마시오오사토島添大里 / 사시키佐敷 / 치넨知念 / 타마구스쿠玉城 / 시마지리島尻의 마기리군

   ○ 중부 각지의 마기리군
    - 요미야마読谷山 / 코에쿠越来 / 구시카와具志川 / 카츠렌勝連 / 챠탄北谷 / 나카구스쿠中城 / 우라소에浦添의 마기리군 

   ○ 북부 각지의 마기리군 : 산호쿠 칸슈(山北監守, 오키나와 섬 북부를 통괄하는 장관)가 지휘
    - 쿤쟌国頭 / 하네지羽地 / 나키진今帰仁 / 나고名護 / 킨金武의 마기리군


  근래까지 류큐라면 '무기 없는 나라' 라는 이미지가 일반적으로 정착되어 있어서 으레 시마즈 군에게 쉽사리 패배한 이유로 통용되고는 했으나, 현재에 이르러선 이 '비무장설非武裝說'은 완전히 부정된 상태이다.

  당시 류큐에는 슈리 왕부 아래 편성된 수천 명 규모의 군사조직이 존재하고 있었다. 중앙中央에는 히키ヒキ라 불리는 12개의 직할부대가 있었고, 마기리(間切, 왕국의 행정단위)에도 개개의 군대가 편성되어 있었다. 이 '히키''마기리군'을 합친 왕국의 정규군을 '슈리 친군'이라 불렀다.

  그리고 '히키'는 군사조직임과 동시에 왕부의 행정조직이었다. 그 장관은 '선장船頭'이라 불리며, 항해할 일이 생기면 이 '히키' 단위로 선박에 승선하여 무역활동을 벌이는 유연성을 갖춘 조직이었다. 사냥조직에서 비롯되어 행정ㆍ군사조직과 사회조직을 겸하기에 이른다는 점에서 퉁구스계 민족 주르친(女真, 滿洲)의 팔기제도<2>八旗制度와 유사한 조직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일본의 무사武士처럼 군사軍事를 업으로 삼는 조직을 류큐에선 얼핏 봐선 확인할 수 없는 건, 이와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1522년(가정 원년) / 1554년(가정 33년)에 정해진 군제에 따르면, 유사시에는 '히키''지방 마기리군'을 세 그룹으로 나누어 이들로 하여금 슈리 성首里城 / 나하 항구那覇港口 북쪽 해안 / 나하 항구 남쪽 해안을 수비토록 한다는 규정이 세워져 있었다.  왕도 슈리 / 항만도시 나하를 중점적으로 수비하는 체제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나하 항구에는 왜구대책의 일환으로 16세기 중반에 야라자모리 구스쿠屋良座森城 / 미이구스쿠三重城라는 이름의 포대가 구축되어, 바다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류큐의 군장軍裝을 살펴보자.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류큐인 만큼 중국식으로 무장했으리란 이미지가 강하나, 중국 양식의 갑주는 사료 / 발굴조사 어느 쪽에서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기실 류큐의 군장은 일본식 무장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1605년에 저술된《류큐오라이琉球往來》에 왕부의 고관이 소유하고 있었다는 군비軍備가 기록되어 있는데, 시게토 활重藤弓, 누리고메토 활塗籠藤の弓 등의 일본식 활이 500자루 / 크고 작은 테히야(銃, 手火矢)가 200자루 / 모矛를 비롯한 온갖 형태의 장창병기, 태도太刀, 협도脇刀, 투구兜, 갑주甲胄가 300벌 / 그 외에도 화살막이(母衣, 호로)와 부채(扇, 오우기), 깃발旗 등이 갖추어져 있다고 기록되었다.

  류큐의 갑주는 무로마치 시대의 오오요로이大鎧 / 도우마루胴丸 / 하라마키腹巻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일본에서 수입한 게 아니라 류큐에서 독자적으로 생산한 물건들이었다. 슈리 성에서 출토된 투구에 달린 쿠와가타(鍬形, 투구뿔)는 일본 본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상을 띠고 있으며, 일본에선 아직 얼굴 전면을 방호하는 면구面具가 일반화되지 않은 15세기에 류큐에서는 채용되어, 소우멘 양식総面樣式으로 도금鍍金까지 되었다. 그리고 본래 도우마루에는 갖춰지지 않았던 쇼우지노이타(障子の板, 역주 : 투구와 갑옷 사이의 빈틈을 메워주는 방어구) 같은 오오요로이용 방어구가 류큐에선 부속되는 등, 류큐의 독자적 발전이 이루어진 바 있다.

  류큐는 전국시대 전란을 경험한 일본과는 달리 방어력이 떨어지는 이전 시대의 도우마루 / 하라마키를 그대로 사용하여, 일본 전국시대 말기에 사용되던 토우세이구소쿠当世具足를 17세기 초가 된 후에도 채용하지 않고 있었다. 말하자면 일본에 비해서 장비가 1세기 정도 뒤쳐져버린 것이다.

  활도 일본 양식과 같으나, 사용방법은 상이했다. 류큐에서는 일본 양식의 장대한 활을 지면에 바싹 갖다댄 후 시위를 당겼다고 한다.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진 않고 있으나, 류큐 독자의 궁술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그리고 주목해야 할 점으로는 화기(火器, 텟포鉄砲)의 사용을 들 수 있다. 류큐는 1450년 시점에서 이미 '카토우(火筒, 화통)'란 화기를 도입한 바 있었다. 이는 화승총 이전 시기의 '테즈츠(手銃, 핸드 캐넌)' 형식이라 추정되며, 류큐에서는 '히야火矢'라 불렸다. 영화《모노노케히메もののけ姫》에서도 등장했던 '이시비야石火矢' 라 불리는 중국식 화기였다. 앞에서 거론했던 나하 항구의 포대엔 '오오이시비야大石火矢'라 불리는 대형 화기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쪽도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병기였다.


  <2> 모든 여진인(=만주인)들은 군사조직인 8개의 깃발(旗, 구사) 중 하나에 소속되어야 했기에, 팔기는 사회조직이고, 또 행정조직이기도 했다. 깃발에 소속된 기인旗人들은 평시에는 농경ㆍ수렵에 종사해가면서 요충지 경비나 병역의무를 부담했다.


핑백

덧글

  • 2018/08/17 18:4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남중생 2018/08/17 19:09 #

    히키의 이름은 각각 다음과 같습니다.
    勢遣富(セイヤリトミ)、世高富(セダカトミ)、浮豐見(ウキトヨミ)、謝國富(ジャクニトミ)、島內富(シマウチトミ)、押明富(オシアケトミ)、勢治荒富(セヂアラトミ)、相應富(フサイトミ)、世持富(ヨミチトミ)、雲子富(クモコトミ)、世次富(ヨツギトミ)、安舞富(アマエトミ)

    출처는 오카모토 히로미치(岡本弘道)의 "古琉球期の琉球王国における「海船」をめぐる諸相" 마지막 페이지(248)입니다.
    https://ci.nii.ac.jp/els/contentscinii_20180809213326.pdf?id=ART0008849337
  • 2018/08/17 22:0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진냥 2018/08/17 22:51 # 답글

    오오... 전투 장면이 기대됩니다!
  • 3인칭관찰자 2018/08/17 23:20 #

    네. 다음부터 전투 파트가 시작됩니다. 내일 내지 모레까진 다음 포스트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 슈타인호프 2018/08/18 17:56 # 답글

    오오오 감사합니다. 그럼 류큐 왕실이 지방세력의 반란을 우려하여 모든 무기를 왕성에 보관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낭설에 불과한 건가요?
  • 3인칭관찰자 2018/08/18 19:50 #

    근거 없는 낭설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한때까지만 해도 금무정책에 의해 무기가 몰수되어 슈리 성 창고에 봉인되었다는 주장은 일반적인 정설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근래 금무정책 재해석이 이루어지면서 무기 몰수설 대신 그저 단순히 슈리 성 내부에 무기를 많이 비축한 데 불과하다는 설이 힘을 얻어가고 있는 걸로 압니다. 최소한 류큐로서도 '히키'와 류큐 왕국 각지의 '마기리군'을 유지하기 위한 무장은 소홀히 하지 않았을 것 같고 실제로그들은 무장을 갖추고 시마즈군에 대항해 맞서 싸웠으니 말입니다.

    이윽고 포스팅할 내용에 토쿠노시마의 토착 관리 형제가 농민들 동원해서 시마즈군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때 이 하급관리와 토착민들은 몽둥이나 마개조한 죽창을 들고 싸우더군요. (그보다 신분이 높은 관리들은 칼과 창, 나기나타로 무장하고 있긴 했지만요) 추측에 불과하지만 민초들에게 무기를 쥐어주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은 듭니다. ㅎㅎ
  • 슈타인호프 2018/08/23 17:24 #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통계 위젯 (블랙)

056
325
435345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블랙)

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