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관찰자

beholderer.egloos.com

포토로그



《역사군상》시마즈島津, 류큐琉球를 침공하다 (1)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108호(2011년 8월호) p.50 ~ 63쪽의 기사인,《시마즈 군 류큐 침공 - 17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전쟁을 번역한 것으로, 역사학자 우에자토 타카시上里隆史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1609년(만력 37년 / 케이쵸 14년). 사츠마 시마즈 씨薩摩島津氏의 군대가 류큐 왕국琉球王国을 침공했다. 슈리 성首里城을 포위당한 류큐 국왕 슈네이尙寧는 끝내 항복하여, 몇몇 가신들과 함께 일본 에도日本江戸로 끌려갔다 2년 후에 귀국하였다. 15세기 초두에 오키나와 섬沖縄島에 통일정권을 수립한 후, 아시아 해역세계에서 교역활동을 벌여 번영해 온 독립국가獨立國家 시대는, 이후 커다란 변전을 겪게 된다.

  류큐는 14세기 후반 이후로 중국(中国, 명明)과 조공 - 책봉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시마즈 씨에게 정복당한 후로는 일본의 막번제幕藩制 국가질서에 편입되어 그들의 강력한 정치적 영향하에 속칭 '일중양속日中兩属' 이란 입장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고, 이윽고 1879년(메이지 12년)의 류큐 처분琉球処分으로 근대국가 일본에 병합되면서 왕국은 멸망, '오키나와 현沖縄県' 으로서 오늘날의 체제에 편입되어 갔다.

  지금까지는 시마즈 씨의 류큐 침공은 역사적 배경과 그 요인要因의 해명에 초점이 놓인 반면, 사건 자체의 경과經過는 거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 글에서는 류큐 측과 사츠마 측 양 세력의 기록을 통해 사건의 경과를 따라가기로 하겠다.


  [ 류큐 침공에 이르기까지의 경위 ]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출병과 류큐

  류큐 침공의 발단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천하통일天下統一 과정을 밟고 있던 히데요시는 일본뿐만 아니라 명나라를 위시한 주변 국가들까지 정복하여, 아시아 세계의 지배자가 되기 위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1588년(텐쇼 16년),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사에게 명령하여 류큐 국왕 슈네이에게 편지를 보내도록 했다. 히데요시는 조선朝鮮 / 명나라 / 남만 국가(南蛮国家, 동남아시아) 들이 속속 일본에 조공을 바치고 있으니(이는 사실이 아니다) 류큐도 입공入貢하라고 요구한 후, 말을 듣지 않으면 멸각滅却해 버리겠다고 위협하였다. 유례없는 공갈에 류큐 왕부王府는 동요하여,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슈네이 왕은 일단 다음 해(1589) 교토 쥬라쿠다이京都聚楽第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이를 복속服屬의 사자로 인식하고, 류큐를 시마즈 씨의 요리키与力로 위치지었다.

류큐 왕국과 그 주변의 지도.(출처 : 나무위키 '류큐 왕국' 항목) 
(류큐의 영토는 아마미, 오키나와 본섬, 미야코, 야에야마까지.)


  시마즈 씨의 '요리키'가 된 류큐는 '카라이리(唐入り, 역주 : 중국 정복)' 계획이 구체화되고 있던 1591년(텐쇼 19년), 시마즈 씨로부터 "7천 명이 10개월 동안 먹을 수 있는 병량兵糧을 제공하라 / 히젠 나고야 성肥前名護屋城 공사에 군역軍役을 부담하라." 는 명령을 받았다. 류큐 입장에선 '부모의 나라' 라 할 수 있는 명나라에게 도저히 활을 겨눌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군역을 부담하는 건 류큐에도 상당한 부담이 된다. 턱없는 요구에 국내는 소란스러워졌고, 가신단家臣団의 반란까지 일어났다. 슈네이 왕은 역대의 국왕들과는 달리 슈리 출신이 아닌 우라소에浦添의 분가分家 출신이었던지라, 권력기반이 취약했다. 가신단은 상시적으로 슈리 vs 우라소에 파벌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었고, 저자세로 임한 대응은 국내의 반발을 샀다. 딜레마 속에서 고뇌하던 슈네이 왕은 결국 요구받은 병량 중 '절반過半' 은 공출해 주었으나, 나라가 쇠미衰微해져 있다는 이유를 들어 그 이상의 요구는 묵살했다. 이는 훗날 시마즈 씨가 류큐를 침공하는 구실 중 하나가 된다.

  그러나 류큐도 히데요시의 복속요구에 유유낙낙唯唯諾諾히 따르고 있지는 않았다. 1591년(만력 19년), 명나라인의 후손으로 류큐 왕부의 고관高官이기도 했던 테이도(鄭迵, 훗날의 쟈냐 웨카타 리잔謝名親方利山)가 명나라 상인商人에게 밀서密書를 건네어 히데요시가 대륙으로 침공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다는 걸 명나라에 은밀히 통보했다. 이 소식을 통해 명나라 조정은 처음으로 히데요시의 계획을 알게 되었다.

  류큐는 이후로도 일본의 동향을 명나라에 계속해서 통보했고, 이는 1급 기밀이 되어 명나라의 정책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미쳤다. 류큐는 정보전情報戰이란 형태로 명나라의 대일전쟁對日戰爭 일익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개전결정의 배경

  일본군은 명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우선 조선을 침공하였으나 전황은 늪지대가 되었다. 1598년(케이쵸 3년)에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후 천하의 실권을 잡은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전쟁으로 단절된 명나라와의 국교회복 / 대명무역對明貿易 부활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이에야스는 명나라의 조공국인 류큐에게 중개역할을 맡기려 했다.

  1602년(케이쵸 7년), 류큐의 선박이 무츠 지방陸奥国의 다테 가문伊達家 영지에 표류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에야스는 시마즈 씨를 통해 승선자들을 류큐로 송환해주었다. 시마즈 씨는 류큐에게 "이에야스에게 답례를 올리는 사자(使者, 빙례사聘禮使者)를 파견하라." 고 요구했다. 이에야스는 이 사건을 계기로 명나라와의 국교회복을 류큐가 중개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히데요시 시대 당시 요구에 따라 사자를 파견했다 계속해서 턱없는 요구들을 받아왔던 슈네이 정권은 토쿠가와의 새로운 정권을 경계, 반항적인 자세로 돌아서 있었다. 대일 강경파인 쟈나 웨카타 리잔 등을 삼사관<1>三司官으로 임명하고, 빙례사 파견을 거절하였던 것이다.

  히데요시 사후에 시마즈 가문의 당주가 된 (시마즈島津) 타다츠네忠恒는 이에야스에게 빙례사를 파견하라는 요구에 응하지 않는 류큐에 맞서, 류큐 영토인 아마미오 섬(奄美大島, 아마미오오시마)에 파병하기로 결의했다. 1606년(케이쵸 11년) 6월, 타다츠네는 이에야스로부터 헨키(偏謂, 역주 : 귀인의 이름 중 한 글자)를 내려받아 '이에히사家久' 로 개명했는데, 바로 이 때 "류큐가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면 출병해도 좋다." 는 허가를 받아냈다.

  그러나 아마미오 섬 출병계획은 큰아버지ㆍ요시히사義久의 보이콧을 받아 쉽사리 진척되지 못했다. 이는 당시 시마즈 가문에서 벌어지고 있던 심각한 수준의 대립에 기인했다. 히데요시에게 굴복한 이후 중앙정권에 적극적으로 협력함으로써 시마즈 가문의 존속을 도모하던 (시마즈) 요시히로義弘 vs 중앙정권과 거리를 두려는 (시마즈) 요시히사의 방침 대립으로 인해 가문이 분열되었고, 조선출병 당시의 군역부담과 타이코 토지조사太閤検地로 인한 혼란도 여기에 기름을 끼얹어, 요시히사 / 요시히로 / 이에히사 세 사람을 축으로 파벌派閥이 갈라졌고 이들의 가신단들은 상호 적대시하고 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1605년(케이쵸 10년)에는 영내 향첩鄕帳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잡세諸役와 연공을 징수할 수가 없는 은닉 영지의 존재가 발각되었는데, 은닉지는 시마즈의 총 코쿠다카 중 약 20%. 이로써 시마즈 씨가 가신단을 완전히 파악把握하고 있지 못하다는 게 명백해졌다.

  그리고 에도 성 공사江戸城普請 / 요시히로 수양딸義弘養女의 혼례 등으로 많은 지출이 겹친 것도 한 몫 하여, 시마즈 씨는 경제적 위기에까지 직면해 있었다. 이에야스는 류큐를 영유하라는 의미가 아닌, 어디까지나 명일무역日明貿易의 부활을 목적으로 한 출병을 허가해준 것이었으나, 시마즈 씨는 류큐 침공을 아마미오 섬에 대한 한정적 출병에 그치지 않고 류큐 본토에 대한 본격적 침공으로 선회, 가문 내부의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영토확장전쟁을 벌이는 걸 염두에 두고 있었다. 시마즈 씨는 류큐를 자신들의 '요리키' 로 다시 한번 규정하고, 나중에는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 자신들이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教로부터 류큐를 하사받았다는 '카키츠 부용설嘉吉附庸説' 까지 주장해가면서, 류큐에게 압박을 가하는 것을 정당화하기에 이르렀다.

  1609년(케이쵸 14년) 2월, 시마즈 요시히로는 조선 군역 잔여분을 공출하지 않은 죄 / 빙례사 파견이 늦어지는 죄 등을 열거하며 슈네이 왕에게 명일무역 중개를 요구하는 최후통첩最後通牒을 들이밀었다. 류큐는 이 요구에 일절 응답하지 않았기에, 개전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 슈리 왕부의 실질적인 행정 최고책임자로 3인 제도로 운영되었기에 삼사관이라 불리게 되었다. 별명은 '요노아스타베世あすたべ'. 류큐의 사족士族이 승진할 수 있는 최고 위계이며, 투표제로 '웨카타親方' 칭호를 지닌 자들 중에서 선출하엿다.


핑백

  • 남중생 : (느릿느릿) 유구국의 정치조직 60 & 74 2018-08-21 19:49:23 #

    ... 3인칭 관찰자 님께서 번역/연재 중이신 시마즈의 유구 침공 시리즈 잘 보고 계신가요?저도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유구국의 관직명을 모르겠어서 답답하시다고요? 유구어 발음이 일본어와는 미묘하게 ... more

덧글

  • 남중생 2018/08/12 19:02 # 답글

    우와아아아아앗! (선 리플 후 감상)
  • 3인칭관찰자 2018/08/13 07:43 #

    본래는 좀 더 일찍 포스팅하려 했는데 여의치 않았네요. ㅎㅎ
  • 남중생 2018/08/13 22:05 #

    주석에는 "웨카타"라고 쓰셨는데 본문에는 "웨가타"라고 써있네요.
    "웨카타" 쪽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 3인칭관찰자 2018/08/14 00:16 #

    '웨카타'로 통일했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진냥 2018/08/12 22:26 # 답글

    오호, 남중생님의 유구 만화를 즐겁게 감상하고 있었는데 이 번역까지.. 유구사에 대한 흥미가 높아집니다!
  • 3인칭관찰자 2018/08/13 07:47 #

    뭐 저는 살짝 거드는 정도랄까요. ㅎㅎ 류큐 역사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관심은 갖고 있습니다. 남의 나라 일 같지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으려나요...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통계 위젯 (블랙)

1864
460
346334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블랙)

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