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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무장 인기의 뒷사정》일곱 자루 창七本槍 역사



  본 글은 2008년, 일본출판사 PHP연구소에서 신서본新書本으로 간행된 스즈키 마사야鈴木眞哉 씨의 저서《전국무장ㆍ인기의 뒷사정戰國武將の人氣のウラ事情》제 3장 <그룹으로 평가받는 인물들> 중 6편인【 일곱 자루 창 - 아즈키자카 / 카니에 성 / 아네가와 강 / 시즈가타케 / 우에다 성 】부분(p. 100 ~ 105)을 번역한 것입니다. 위 책은 현재 종이책으론 절판된 상태이나, 아마존 킨들 등을 통해 일본에서 판매되고 있는 책입니다. 가능한 한 필요한 부분만 번역하겠으며, 절대로 배포나 불법공유 목적으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 명확히 하겠습니다.


  일곱 자루 창이라면 텐쇼 11년(1583) 4월에 벌어진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의 그것이 유명하지만, 이전에도 이후에도 같은 호칭으로 불린 사례가 존재한다.

  시기적으로 가장 이른 건【 아즈키자카의 일곱 자루 창小豆坂の七本槍 】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아버지 노부히데가 미카와 지방 아즈키자카(三河小豆坂, 지금의 아이치 현 오카자키 시)에서 이마가와 군과 전투를 벌였을 때 오다 측에서 특히 분투한 일곱 명의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단지 아즈키자카 전투란 건 텐분 11년(1542) 8월 / 텐분 17년(1548) 3월 두 차례에 걸쳐 벌어졌기 때문에, 일곱 자루 창들이 어느 전투에서 활약한 것인지는 약간 확실치 않은 부분이 존재한다.

  아즈키자카 이야기에 그다지 익숙지 않은 분들도 적지 않으시리라 생각하나, 일단 이름을 거론해보자면 오다 마고사부로 노부미츠織田孫三郞信光 / 오다 사케노죠 노부후사織田造酒丞信房 / 오카다 스케자에몬 시게요시岡田助左衛門重能 / 삿사 하야토노쇼 카츠미치佐々隼人正勝道 / 삿사 마고스케 카츠시게佐々孫助勝重 / 나카노 마타베에 시게요시中野又兵衛重能 / 시모카타 사콘 사다키요下方左近貞清 이상 7명이다. 그러나 각 인물들의 통칭과 실명이 달리 기재된 경우도 존재한다. 오다 성을 가진 자가 2명 존재하는데, 노부미츠는 노부히데의 동생이므로 노부나가의 삼촌이 된다. 반면 노부후사는 같은 성을 쓰지만 노부나가의 가문과는 직접적 연관은 없다.

  다음은【 카니에 성의 일곱 자루 창蟹江城の七本槍 】으로, 코지 원년(1555) 8월, 오다 가문에 속한 성이었던 오와리 지방 카니에 성(尾張蟹江城, 지금의 아이치 현 아마 군 카니에쵸)을 당시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에 속해 있던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의 군대가 함락시켰을 때의 면면들이다. 오오쿠보 신파치로 타다카츠大久保新八郞忠勝 / 오오쿠보 진시로 타다카즈大久保甚四郞忠員 / 오오쿠보 신쥬로 타다요大久保新十郞忠世 / 오오쿠보 지에몬 타다스케大久保治右衛門忠佐 / 아베 시로고로 타다마사阿部四郞五郞忠政 / 스기우라 다이하치로고로 요시사다杉浦大八郞五郞吉貞 / 스기우라 하치로고로 카츠요시杉浦八郞五郞勝吉 이상 7명이 거론된다. 스기우라 요시사다와 카츠요시의 통칭이 혼동되는 면이 있으나, 두 사람은 부자父子 관계이다.

  세 번째는【 아네가와 강의 일곱 자루 창姉川の七本槍 】으로, 겐키 원년(1570) 6월에 벌어진 오우미 아네가와 강 전투에서 토쿠가와 군德川勢에 속하였던 오가사와라 노부오키小笠原信興의 부하들을 가리킨다. '천하 제일天下一' 항목에서 다루었던 와타나베 킨다유 테라스渡辺金太夫照를 필두로 몬나 사콘우에몬 토시마사門奈左近右衛門俊政 / 다테 요헤에 후사자네伊達与兵衛房実 / 후시키 큐나이伏木久内 / 나카야마 제히노스케中山是非之助 / 요시와라 마타베에吉原又兵衛 / 하야시 헤이로쿠林平六가 그 멤버들이다. 와타나베 항목에서 언급했듯이 그들 대다수는 훗날 타케다 가문武田家에 복속하였고, 토쿠가와 가문에 잔류한 몬나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는 기구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그 다음이 시즈가타케 전투인데, 일단은 지나친 후 다섯 번째인【 우에다 성의 일곱 자루 창上田城の七本槍 】을 먼저 언급하도록 하자. 이쪽은 케이쵸 5년(1600) 9월, 이에야스의 아들인 히데타다가 인솔하는 토쿠가와 군이 사나다 마사유키가 농성한 신슈 우에다 성을 공격했을 때 생겨난 그룹이다. 듣기에는 좋으나, 그 실체는 마사유키의 도발에 넘어가 멋대로 공격을 가한데 불과한 인물들로 그 어떤 실익도 가져오지 못했고, 이후 군령위반을 이유로 8명이 질책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그 멤버는 토다 한페이 시게토시戸田半平重利 / 츠지 신타로 히사마사辻新太郞久正 / 미코가미 텐젠 타다아키御子神典膳忠明 / 아사쿠라 토쥬로 노부마사朝倉藤十郎宣正 / 나카야마 스케로쿠 테루모리中山助六照守 / 시즈메 이치자에몬 코레아키鎮目市左衛門惟明 / 오오타 진시로 요시마사大田甚四郎吉正이며, 오오타를 대신해 사이토 큐에몬 노부요시斎藤久右衛門信吉가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오오타는 전투 중에 입은 부상으로 창을 쓰지 못하고 왼손으로 활을 쏘았기 때문에 '창槍' 에는 포함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들 8명이 돌출행동에 나섰기 때문에, 이후 칩거명령을 받았다. 이들 가운데 미코가미는 훗날 검객으로 이름을 날린 오노 지로자에몬小野次郎左衛門의 이전 이름이다.

코에이 게임 속의 미코가미 텐젠(출처 :《신장의 야망 창조 PK》갤러리 모드)


  이제 가장 유명한【 시즈가타케의 일곱 자루 창賤ヶ岳の七本槍 】으로 돌아가자. 이들은 히데요시의 진중으로 돌출하였던 시바타 측의 별동대가 철수하였을 때 그들을 추격한 히데요시의 측근 무사들로, 시바타 카츠마사柴田勝政가 지휘하는 부대와 접전을 벌인 자들이다. 강담講談이나 시대소설 등에서 화려하게 묘사되는 경우가 많으나, 실상은 그와는 좀 달랐던 듯 "그들이 정말로 '창槍', 즉 본격적 접전격투를 벌이긴 했나?" 하는 의문은 그 당대부터 존재했다는 듯하다.

  그래도 일단은 '창' 으로 인정을 받아 히데요시로부터 감사장이 내려졌고 가봉도 받았는데, 이 때 대상이 된 자는 7명이 아니라 9명이었다. 이름을 거론하면 후쿠시마 이치마츠 마사노리福島市松正則 / 카토 토라노스케 키요마사加藤虎之介清正 / 카토 마고로쿠로 요시아키加藤孫六郞嘉明 / 히라노 곤페이 나가야스平野権平長泰 / 와키자카 진나이 야스하루脇坂甚內安治 / 카스야 스케에몬 타케노리加須屋助右衛門武則 / 카타기리 스케사쿠 카츠모토片桐助作且元 / 사쿠라이 사키치 이에카즈桜井左吉家一 / 이시카와 나가마츠 요리아키石河長松頼明까지다. 이시카와는 그 때 전사해버린 형 효스케 카즈미츠兵助一光를 대신해 은상을 받은 경우이다.

  어쨌든 9명이 동등하게 '이치방야리一番槍' 로 인정받아 포상을 받았다. 이치방야리가 9명이나 나왔다는 자체가 이상하긴 하지만 이들을 '아홉 자루 창九本槍' 이라 하지 않고 '일곱 자루 창' 이라 부른 이유도 의문스럽다. 그 이유에 대해선 다양한 설이 있으나 '아즈키자카의 일곱 자루 창' 이란 전례가 있다 보니, 자연스레 사쿠라이와 이시카와가 빠지고 7인 체제로 정착한 것 같다.

  이들 7명은 5천 석을 하사받은 후쿠시마 마사노리 외에는 모두 3천 석을 하사받아 거의 같은 선상에서 출발했으나, 그 후 그들이 맞이한 운명은 제각각으로 영달을 이룬 자와 이루지 못한 자, 유명세를 얻은 자와 그러지 못한 자로 나뉘어진다.

《불멸의 이순신》덕에 일본보단 한국에서 더 유명하다는 와키자카의 초상화.
그의 후계자들은 끝까지 다이묘 지위를 유지했다. 로쥬老中가 된 후손도 있고...
(초상화 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와키자카 야스하루 항목)


  후쿠시마 마사노리 / 카토 키요마사 / 카토 요시아키 같은 경우 영달하는 데 성공했고 지명도도 높은 경우이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영달의 정도와 지명도 쌍방에서 위의 세 명 만큼은 못하나, 평타 정도는 친 경우다.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처우 면에서는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으나, 그 이름은 후세에도 알려져 있다. 영달도 / 지명도 모두 시원찮았던 인물은 카스야 타케노리 / 히라노 나가야스 두 사람이다.

  두 사람의 앞길이 시원찮았던 데는 히데요시가 그들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었는가 하는 점도 영향을 끼쳤다. 카스야는 본래 하리마 벳쇼 가문播磨別所家에 속해 있다가 나중에 히데요시를 따랐다. 분로쿠 3년(1594) 무렵에 1만 2천 석을 영유하며 고향인 하리마 카코가와 성播磨加古川城의 성주를 지냈다고 하니 어쨌든 다이묘 급大名格이 된 셈이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하였기에 몰락했다. 훗날 막부의 신하가 되어 미미한 녹小錄을 받았고, 자손들은 '카스야槽屋' 로 성을 고쳤다.

  히라노의 경우는 시즈가타케 이후로도 계속 활약했음에도 녹봉은 오랫동안 3천 석으로 묶여 있었다. 분로쿠 4년(1595)이 되어서야 5천 석의 녹봉을 받았고, 케이쵸 3년(1598)에는 토요토미 카바네豊臣姓를 하사받긴 했으나 영지는 가봉받지 못했다. 오제 호안小瀬甫庵의《타이코키太閤記》(1625)에는【 심성이 거칠어, 때때로 히데요시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고 적혀 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히데요시도 버릇 나쁜 부하는 경원敬遠 하였다는 말이 된다. 

  히데요시에게 귀여움받진 못했으나 그 본인은 토요토미 가문에 대한 충성심을 간직했던 듯하다.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가담하였기에 안태安泰할 수 있었으나, 오사카 전쟁大坂の陣이 시작되자 병을 핑계로 참진하지 않았다고도, 내지는 오사카 성에 있는 자식을 데리고 돌아오겠다는 구실을 만들어 오사카 성에 입성하려다가 이에야스의 제지를 받았다고도 한다. 아들이 오사카에 있던 것도 사실이었고, 히라노의 둘째 형은 오사카에 있다 성이 함락될 때 전사하였으므로, 이쪽이 진실일 수도 있다.

  이에야스에 의해 오사카 입성을 저지(?)당했기 때문에 히라노는 그대로 토쿠가와 진영에 잔류했다. 그 자손은 야마토 지방(大和囯, 지금의 나라 현) 내 5천 석 영지를 영유하는 하타모토旗本가 되었으나, 다이세이호칸(大政奉還, 1867년. 역주 : 토쿠가와 막부가 메이지 텐노에게 정권을 반납한 사건) 이후 실제 코쿠다카가 1만 1석이 넘는다는 것을 인정받아 다이묘가 되었다.
  
 

덧글

  • 차가운 도시남자 2018/08/12 00:08 # 답글

    거품이 많은 닝겐들이지요. 자기세력이 없던 벼락출세자 히데요시가 본보기로 삼아 출세시켜주면서 나를 따르면 이것들처럼 출세할 수 있다고 선전하기 위해 더 내세운 감이 다분합니다.

    시점부터가 시바다와 싸울때 공을 세운 이들이니 실력도 그렇지만 운이 좋은 행운아들이죠.
  • 3인칭관찰자 2018/08/12 09:00 #

    말씀대로 실제 활약에 비해 거품이 많이 낀 케이스죠. 공개적으로 젊은 측근 내지 소장파 심복들 띄워주고 키워주려던 히데요시의 선전적 의도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 함부르거 2018/08/16 11:25 # 답글

    히데요시는 후다이(譜代) 가신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에 준하는 집단을 만들 필요가 있었고 대표적인 게 시즈카다케 칠본창이죠. 이시다 미츠나리도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 그의 사후 대립하면서 자기 가문을 멸망으로 끌고 갔다는 게 히데요시의 한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8/08/13 10:46 #

    미래의 후다이들을 키우기 위한 목적이 컸을 것 같습니다. 이시다나 오오타니 같은 경우도 그런 목적으로 육성되었을 것이고요.. 자기가 키워낸 심복들이 나중에 대립하여 토요토미 몰락에 기여한 데는 히데요시 본인의 업보가 크다곤 하지만 1명을 제외한 7본창 전원이 세키가하라 당시 이에야스 편에 가담한 걸 보면 조금은 안습함이 느껴지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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