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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 료타로] 강가를 헤집던 쥬에몬十右衛門 역사



  이 글은 故 시바 료타로 님의 역사 에세이집인《역사의 세계로부터》의 67 ~ 72쪽에 수록된〈강가를 헤집던 쥬에몬〉을 번역한 포스트입니다.


  - 세키가하라, 그리고 오사카 전역大坂ノ役을 거치며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세력이 지상에서 소멸하였기에, 토쿠가와 정권德川政權의 소재지인 에도江戸는 도시로서 폭발적으로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농촌의 차남 이하 자식들이 '도쿄로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토쿠가와 시대 초기 여러 지역에 불어닥치던 에도를 향한 열기는 상당한 것으로, 한밑천 잡기를 꿈꾸던 개척자들이 지방으로부터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에도에는 쇼군將軍과 그 직속신하들뿐 아니라 3백 제후들이 그 가신단을 이끌고 머물렀기에, 무사武家들의 도시라 할 만 했다. 그 인구는 50만 명을 밑돌지 않았다고 하며, 모두가 완전한 소비생활자들이었다. 영지에서 빨아들인 돈과 곡식을 에도에 와서 소비했던 것이다. 에도의 시민들은 그들의 소비생활에 기대어 먹고 살 수 있었으므로, 손재주가 있든가 장사의 재능이 있으면 에도에서 창업하는 데에 그다지 곤란함은 없었다.

  "에도로 가자." 는 건, 패기있는 여러 지방 서민들의 슬로건과 같은 것이 되었다.

  어부들까지 에도로 갔다. 오사카 츠쿠다大坂

  가재도구를 내다팔아 노잣돈을 만들어 에도를 뒤로 했다. 고향인 이세로 돌아갈 심산이었는지, 아니면 오사카로 갈 생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찌됐든 여러 곳의 숙박을 거친 후, 오다와라小田原에 있는 여관旅籠에서 1박하였다. 이 날 오다와라의 역참宿場엔 마침 참근교대(参勤交代, 역주 : 1년 중 절반을 무조건 에도에서 거주하도록 다이묘들에게 강제한 에도 막부의 통제제도)를 수행 중이던 다이묘大名의 행렬이 들어와 있었기에 모든 여관이 북적거려, 쥬에몬은 면식이 없는 어느 노인과 합숙하게 되었다.

  저녁식사 때가 되자, 하녀女中가 밥통을 놔두고 자리를 떴다. 이 때는 연소자가 밥상을 차리는 게 이 무렵의 합숙예절이었다. 쥬에몬도 아마 그렇게 했을 것이다. 쥬에몬의 신세 이야기를 들은 노인은,

  "에도로 돌아가게." 라고 말했다.

  "에도는 앞으로 더욱더 번창할 것이네. 그야말로 보물로 가득한 산이야. 재능이 있는 자만이 그 보물을 쟁취할 수 있다네. 보물이 넘치는 산을 내버리고 내뺄 셈인가?"

  "하지만, 밑천도 없는 시골뜨기가 광대한 에도의 시가로 나와도, 큰 바다를 헤메이는 쓰레기 신세밖에는 될 게 없었습니다. 보물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고요."

  "보물을 찾지 못한 건, 보물을 발견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세. 보물은 그것을 찾으려 하는 자에게만 보이는 법이라네. 굶어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다시 한 번 에도로 돌아가서, 눈에 불을 켜고 거리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그래.)

  그 말을 들은 쥬에몬은 자신이 성급했음을 깨달았고, 그러자 갑자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에도의 하늘이 그리워져갔다.

  다음 날 아침, 쥬에몬은 에도로 돌아가기 위해 누구보다도 일찍 오다와라를 떠났다.

  시나가와品川 역참을 지나칠 때, 엄청나게 많은 오이와 가지들이 해변가로 밀려와 있는 모습을 보았다. 에도 시민들이 버린 야채들이 시나가와 해안으로 흘러왔던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는 깨닫지 못했던 에도 시민들의 막대한 소비력에 놀라는 한편으로, 이것이야말로 노인이 말한 '보물'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길로 곧장 에도로 돌아가서는, 강변과 해변을 뒤지며 시민들이 버린 야채를 주워서 장아찌를 만들어 행상하고 다녔다. 주로 토목공사장의 미장이나 인부들이 고객이었다.

  저렴하기도 했던데다 점심식사 반찬으로 삼기에 적합했기에, 날개돋힌 듯 팔려나갔다. 쥬에몬은 야채를 줍고, 절이고, 그리고 팔고 다녔다. 이를 사 먹는 자들의 꼴이야 뻔한 것이겠지만 쥬에몬으로선 재료원가가 공짜였다. 재미날 정도로 돈이 모여들었다.

  그는 한편으로, 공사장을 출입하는 데 편의를 봐 주던 공사판 책임자에게 떡값을 얹어주는 걸 잊지 않았다.

  책임자도 기뻐하여 그를 총애해주면서, "자네 정도의 재능을 가진 자를 행상으로 썩히기엔 아깝네. 일용자들 관리를 해보지 않겠나?" 라는 권유를 하였고, 만년 장아찌장수로 먹고 살수도 없다 생각한 쥬에몬도 그 호의를 받아들였다.

  쥬에몬은 인부들의 우두머리로 몇 년간 일했고, 그 동안 토목과 건축에 관한 일들을 배워나갔다. 이윽고 독립하여 토목 도급업자 겸 목재상材木商 일을 시작했다.

  메이레키 3년(1657), 그 유명한 후리소데 화재振袖火事가 터지면서 에도는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쥬에몬은 '때가 왔다.' 고 직감했다. 대박의 기회를 움켜잡은 이 때의 영웅적인 모습은 (훗날의) 키노쿠니야 분자에몬紀国屋文左衛門과 닮은 데가 있다.

  에도의 화재가 아직 진화되지 못하던 시기, 쥬에몬은 가산을 모두 털어 키소木曽로 급히 달려가 산의 소유자山主들을 데리고 산 속으로 들어가서는, 건축자재가 될 만한 나무들을 선나무 상태로 싸그리 매점買占하여, 나무마다 도장을 찍은 후에야 에도로 돌아갔다.

  뒤늦게 에도의 목재상들이 우르르 키소로 몰려갔으나,【 이미 남은 나무는 없었다. 】고《야시野史》는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쥬에몬이 부르는 가격에 목재를 사야 했다. 쥬에몬 본인은 목재들을 팔았을 뿐 아니라 많은 다이묘들과 호상豪商들의 저택 건축을 수주받아, 순식간에 에도 제일의 대부호大富豪로 등극했다. 동시에 이 때의 활약을 치하받아 막부를 위시한 여러 다이묘들의 어용상인御用商人이 되었고, 특히 당대의 로쥬老中 이나바 마사노리稲葉正則의 신임을 얻어, 값나가는 공공 건축 / 토목의 대부분을 수주했다.

  나중에는 묘지타이토(名字帯刀, 역주 : 공적이 있는 非 무사계층 인물에게 성씨를 쓰는 것과 칼을 차는 것을 허락하는 특전)까지 허가받아, 카와무라河村라는 성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삭발하여, 즈이켄瑞賢이란 호로 통하게 되었다.

  이후 54세의 나이에 막부의 직속 신하直参로 등용되어, 레이간 섬霊岸島에 저택부지를 하사받았다.

  그 후, 83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카와무라 즈이켄河村瑞賢이 벌인 사업은, 중학교 사회교과서에 실려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에도 / 교토 / 오사카 등지에서 벌인 치수ㆍ매립공사治水埋立工事들만을 열거하려 해도 엄청난 양의 원고지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일본 역사상 최대의 토목업자가 시나가와의 해변에서 오이와 가지를 주운 것을 계기로 입신의 길을 걸은 건 그다지 알려지지 못한 듯하여, 이 글에서 소개하였다.

  겐로쿠 13년(1700) 6월 16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 묘는 카마쿠라 켄쵸사鎌倉建長寺에 있다.



덧글

  • 차가운 도시남자 2018/07/07 23:08 # 답글

    좋은 글입니다만 "오우미 도둑놈과 이세 거지." 라는 속담을 좋게 변호해 해석하는데서 어쩔수 없는 일본인의 특성이 나타나는군요. 그래도 역시 시바료타로 선생의 필력은 참 대단합니다.
  • 3인칭관찰자 2018/07/08 10:44 #

    가능한 한 좋은 의미로 해석해주려 한 것 같네요. 집필된지 이미 수십 년이 지난 글인데도 시바 선생님의 필력은 온연한 것 같습니다. ㅎㅎ
  • 도연초 2018/07/09 09:42 # 답글

    1. 오우미의 상인들은 무로마치 시대에도 명성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높았었는데(한국에서 상인 하면 개성상인을 떠올리듯이) 상업이 극도로 번창하던 에도 시대라면...

    2. 카와무라 즈이켄과 똑같은 인생역정을 살아온 사람이 일본 현대에도 한 분 있죠. 일본의 정주영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는 오오타니 요네타로라는 사람이 있겠네요.

    도야마현의 농가에서 자라다 도쿄로 상경해 지금으로 따지면 상하차까지 온갖 업체의 점원 일을 하다가 스모선수(幕內급)까지 하다가 미국 순회경기가 취소되자 은퇴후 봉급과 퇴직금으로 아주 작은 철강회사를 차렸지만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모든것을 잃자 모아둔 돈을 거둬 일본 전국에서 곡식 등 식재료를 사들여 음식점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밥, 우동, 소바, 밑반찬을 만들어 싸게 이재민들에게 파는 방식으로 길거리에 나앉았던 위기를 넘깁니다.(반나절만에 1924년 당시 돈으로 400만엔을 벌었다니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죠) 그뒤로도 일본 굴지의 기업인으로서 자리매김하죠.
  • 3인칭관찰자 2018/07/10 07:20 #

    1. 오사카, 이세 상인과 더불어 일본 3대 상인 중 하나로 꼽히는 건 거품이 아니죠. 그쪽 사람들 특유의 장삿속을 야유하기 위해 오우미 도둑, 이세 거지란 말이 생겨났을 정도이니...

    2. 오오타니의 경우도 크게 자수성가한 경우죠. 말년이 순탄치 못했던 게 안타깝긴 하지만.
  • 2018/07/09 10:3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07/10 07:4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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