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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무장 인기의 뒷사정》타케나카 한베에의 전설 역사



  본 글은 2008년, 일본출판사 PHP연구소에서 신서본新書本으로 간행된 스즈키 마사야鈴木眞哉 씨의 저서《전국무장ㆍ인기의 뒷사정戰國武將の人氣のウラ事情》제 2장 <과대평가된 명군사들> 중 4편인【 아들조차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곤혹스러워했다? - 타케나카 한베에의 성 탈취 전설 】부분(p. 61 ~ 65)을 번역한 것입니다. 위 책은 현재 종이책으론 절판된 상태이나, 아마존 킨들 등을 통해 일본에서 판매되고 있는 책입니다. 가능한 한 필요한 부분만 번역하겠으며, 절대로 배포나 불법공유 목적으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 명확히 하겠습니다.


  타케나카 한베에(竹中半兵衛, 시게하루重治,, 1544~1579)는 옛날부터 '희대의 대군사稀代の大軍師' 로 대접받아 왔다. 에도 시대 후기에 쓰여진《에혼타이코키絵本太閤記》같은 부류만이 그렇게 묘사하는 게 아니라,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의《한간후藩翰譜》같은 서적에도 그런 식으로 쓰여져 있다. 하쿠세키 선생에 따르면 "한베에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명으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에게 배속되어, 히데요시를 위해 모략謀略을 꾸미며 싸움의 향방을 결정했다. 히데요시가 수많은 무공武功을 세울 수 있었던 건 오로지 한베에의 능력에 힘입은 것이었다." 고 한다.

  한베에의 아들인 타케나카 시게카도竹中重門가 집필한《토요카가미豊鑑》라는 저서가 있는데, 그 아버지의 죽음을 기록하면서【 히데요시가 한없이 슬퍼하던 모습은, 그야말로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잃은 유선(劉禪, 유비의 아들)의 모습과 같았다. 】고 서술하였다. 자기 아버지를 촉한蜀漢의 승상丞相ㆍ공명에 비유한 것인데, 오오타 도칸太田道灌 항목에서 언급하였듯이 '공명=대군사' 설이 우리나라(=일본)에 보급된 건 시게카도 사후死後의 일이므로, 한베에를 군사라 이야기했다기보단 그 정도로 보좌의 공補佐の功이 컸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게임《노부나가의 야망 창조》의 한베에 일러스트.
(출처 : 나무위키 타케나카 한베에 항목)


  그건 그렇고, '한베에=대군사' 설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신봉하고 있다. 그런 반면 역사학자들 중에서는 그 점에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타카야나기 미츠토시高柳光寿 씨도 그런 분들 중 하나로, "한베에는 엄청난 군사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경력 가운데 확실한 공적이라 할 수 있는 건 거의 해명되지 않고 있다."《세이시탄고靑史端紅》에 기록하신 바 있다.

  기실 시게카도는 그 정도로 아버지를 추켜세웠으면서도, 한베에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공적을 세웠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시게카도의 후손이 훗날 막부에 제출한 카후(家譜, 역주 : 족보. 정확히는《칸세이쵸슈쇼가후寬政重修諸家譜》)를 살펴봐도, 한베에가 노부나가에게 복속한 이후의 사적은【 명命을 받들어 토요토미 타이코豊臣太閤에게 배속되어, 요리키 겸 모신与力ㆍ謀臣이 되었다. 】고 적혀 있을 뿐, 그 내용이라는 게 전무하다. 모신이라는 단어에 모든 걸 응축시켰을 수도 있지만, 이래가지고는 너무 허전하지 않나 싶다.

  이 카후에 대해 역사학자 아츠타 이사오熱田公 씨는 "타케나카 가문엔 자랑할 만한 선조의 위업 같은 게 전해 내려오지 않는 것 같다." 고 지적하셨다. "지장智將ㆍ한베에, 라는 이미지는 상당히 값을 깎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게 아츠타 씨의 의견이셨다.

타케나카 한베에의 초상화(출처 : 나무위키 타케나카 한베에 항목)
지금도 그의 시신이 안치된 기후 현 센토사禅幢寺에서 소장 중이다.


  한베에의 사적들 가운데 카후 등에서 특히 강조하는 건, 에이로쿠 7년(1564) 2월, 그가 이나바 산성(稲葉山城, 기후 성岐阜城)을 탈취했다는 건이다. 당시 한베에는 미노(美濃, 지금의 기후 현) 사이토 가문에 속해 있었는데, 가문 내 트러블에 휘말리자 기이한 계략奇計을 고안, 적은 인원들을 이끌고 주군 가문의 성을 탈취하는 데 성공하였다, 는 것이다. 성은 이후 주군 가문에 반납하였다고 하는데, 이 건이 사실이라면 군략가軍略家로서 한베에의 실력은 뒷받침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일화는 일종의 전설에 불과하다.

  뭐니뭐니해도《토요카가미》같은 서적엔 같은 해인 에이로쿠 7년(1564)에【 노부나가가 미노 지방을 정복하여 이나바 산성으로 본거지를 옮기고, 이 땅을 기후라고 개칭했다. 】는 터무니없는 소리가 기재되어 있다. 3년 후에 성사된 노부나가의 이나바 산성 탈취와 부친의 사적을 혼동한 것일 수도 있으나, 카후에서 유일하다시피 대서특필할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 정말 실제로 일어났다면, 아들 되는 자가 이런 착각을 했을 리는 없다.

  한베에는 사이토 가문이 몰락한 에이로쿠 10년(1567) 무렵부터 노부나가를 섬겼으리라 추측되나, 노부나가 관련 기본사료인《신쵸코우키信長公記》를 통틀어도 한베에가 등장하는 기사는 3개밖에 없다. 첫 번째는 텐쇼 5년(1577) 11월, 코데라 칸베에(小寺官兵衛, 훗날의 쿠로다 죠스이黒田如水) 등과 함께 하리마 후쿠하라 성播磨福原城 공격에 참가했다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이게 전부로, "누가 어떤 군공을 세웠는가?" 하는 점은 여기에 하나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두 번째는 다음 해인 텐쇼 6년(1578) 5월에 입경하여 노부나가와 면회, 비젠(備前, 지금의 오카야마 현岡山県) 하치만 산성八幡山城 성주를 아군으로 끌어들인 걸 보고했다는 내용이다. 이 때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에게 황금黃金 100매, 한베에에게도 은銀 100냥을 하사하였으므로, 이 건에 한한다면 한베에도 공로를 세웠다는 걸 인정할 수 있으리라.

  마지막인 세 번째는 텐쇼 7년(1579) 6월, 한베에 본인의 죽음을 기록한 기사이다.【 하시바 치쿠젠羽柴筑前의 요리키로 붙여진 타케나카 한베에가 하리마(지금의 효고 현兵庫県)의 진중에서 병으로 죽었기에, 노부나가의 우마마와리(馬廻り, 친위대원)였던 그 동생 큐사쿠久作가 한베에를 대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는 내용이 적혀 있다. 큐사쿠는 시게노리重矩란 이름을 지닌 자로, 아네가와 강 전투(姉川の戦い, 1570년 발발) 당시 노부나가의 본진에 잠입해 들어온 적 부장敵部將의 목을 베는 등의 무공을 세워 온 자였으나, 군략가로서의 평가는 전무한 인물이었다.

  그런 큐사쿠가 대리로서 직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적어도 노부나가는 한베에를 뛰어난 '군사' 로 평가하진 않았던 것이다. 한베에가 히데요시의 좋은 상담 상대였다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르며, 그가 하리마 지방에서 군막陣屋 근변의 마을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먼 훗날까지 경모敬慕를 받았다는 것도 사실로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일화가 있었다고 해서 그가 걸출한 군략가였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될 수 없다는 건, 자명한 일인 것이다.


덧글

  • 함부르거 2018/07/06 21:49 # 답글

    시바 료타로는 히데요시가 한베에의 지락을 두려워한 나머지 공을 세울 기회를 안 줬다고 묘사하고 있죠. 이게 일반적으로 퍼진 인식 같은데 진실은 또 어땠을 지 모르겠네요. ^^
  • 3인칭관찰자 2018/07/07 13:27 #

    말씀대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한베에의 이미지는 '뛰어난 지략을 가진 군사' 입니다. 물론 1차 사료에서 그의 비중이 별로 없고, 어느 시기부터 '군사' 라는 직책 자체의 지위 / 역할 / 존재 여부가 의심받기 시작하고 있는데다, 한베에가 히데요시의 직속신하가 아니라 노부나가가 감시역으로 히데요시 밑에 파견한 자였다는 건 요즘 거의 확실시되는 것 같습니다. ^^

    단지 이 글이 중점적으로 언급하는 한베에가 '이나바 산성'을 탈취한 적이 있는가 여부는 아직 흑백이 완전하게 가려진 것 같지는 않고 찬반이 갈리는 문제 같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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