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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료마》신센구미新選組, 파멸의 미학 (下) 역사



  이 글은 1991년에 출간된 (舊)《歷史群像シリ-ズ 23 坂本龍馬》 의 P. 158 ~ 161페이지에 수록된,《료마의 시대 막부 말기를 생각한다》中 〈신센구미新選組 파멸의 미학 - 토쿠가와 가문에 목숨 바친 미부 늑대壬生狼의 투혼〉를 번역한 글입니다.《불씨》,《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간경영》등의 저작으로 대한민국에도 알려진 역사작가분인 도몬 후유지童門冬二 님께서 집필하셨습니다.


  신센구미의 발생

  텐카비토天下人가 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에도 성과 코후 성甲府城을 전략적으로 중요한 거점이라 내다봤다. 그리고 나카센도中山道 방면에서 적군이 쳐들어와 코후 성이 돌파당하는 경우 / 바다 쪽으로부터 쳐들어온 적군에 의해 에도 성이 습격받아 쇼군將軍이 코후 성으로 피신해야만 하는 경우들을 상정하여, 중간지점인 하치오지八王子에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다. 멸망한 타케다 가문의 유신遺臣 오오쿠보 나가야스大久保長安의 고안에 의해 타케다 가문의 옛 신하 5백 명 + 타마 지역의 현지인 5백 명 = 1천 명으로 이루어진 부대가 만들어졌다. 이로써【 하치오지 센닌다이八王子千人隊 】또는【 센닌도신千人同心 】이라 불리는 조직이 태어났다.

  이들은 평시에는 농업에 종사하나, 비상시에는 무기를 들고 나서는 반사반농半士半農의 생활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 하치오지 센닌다이 】는 에도 성 같은 데서 근무하거나 하면서 남의 발목이나 잡고 / 타인에 대한 험담을 일삼거나 / 닳고 닳아 무슨 일이든 적당히 하는 처세술處世術을 가진 자들과는 다른, 토쿠가와 가문에 대한 순수純粹한 충성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센닌도신 】중에서도 텐넨리신류 유파天然理心流를 배운 사람이 많았기에, 콘도 이사미들은【 센닌도신 】들이 지닌 토쿠가와 가문에 대한 순수한 충성심을 몸에 익히게 된 것이다.

  이에 의해, 콘도 등이 양이론을 주창했음에도 그들의 의식 속에서 토쿠가와 가문에 대한 충성심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던 것이다. 이 '텐노 존숭ㆍ막부 옹호ㆍ양이尊皇佐幕攘夷'라는 사상이 신센구미의 사상적 정체성이었다.

  양이론攘夷論이 득세하여 에도의 죠카마치城下町가 소란스러워지자 막부는 한 가지 책략을 강구했다. "에도에서 설치고 다니는 양이파 낭사浪士들을 전부 교토로 떠넘기자."는 것으로, 때마침 제 14대 쇼군 토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의 교토행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언제 양이를 이행할 것인지 텐노天皇에게 약속을 올리기 위한 입경이었다.

  이 때, 특별경호대特別警護隊 명목으로 나카센도를 통과하는【 로시다이浪士隊 】가 결성되었다. 계획의 주창자는 데와出羽 지방의 지사 키요카와 하치로清河八郎. 키요카와에게는 야망이 있었다. 표면적으론 막부의 특별경호대에 가담하는 척 하다가 교토에 들어선 직후 이들【 로시다이 】를 텐노의 친병親兵으로 만들어버린 후 양이를 실행에 옮긴다는 것이었다. 이 부대에 응모한 낭사는 약 230여 명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콘도를 위시한 시에이칸 일문試衛館一門도 참가해 있었다.

얼마 안 가 막부에 의해 암살당한 키요카와 하치로의 사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콘도는 시세를 내다보면서, "이제부터 정국政局은 교토로 옮겨갈 거야." 라고 예측했다. 청운의 뜻青雲の志이 없었던 건 아니다. 옛날 식으로 말하자면 '일국일성의 꿈一国一城の夢' 같은 건 콘도에게도 있었고, 시에이칸의 문인들에게도 있었다.

  "교토로 가서 이름을 날리자." 같은 공명심功名心이 이 부대에 그들을 참가케 만들었다. 그러나 교토에 도착한 후 키요카와의 책모가 드러나자 콘도들은 이에 이의異議를 제기했다. 키요카와는 조정에 청원서願書를 제출해 허가를 받아,【 로시다이 】를 그대로 텐노의 친병으로 변신시켰다. 그러나 콘도들은 여기에 가담하지 않았다.

  "우리들의 임무는 쇼군 경호이다. 쇼군께서 아직 교토에 머무르고 계신 이상, 그 분을 지키리라."며, 옛날과 같은 충직함을 내보였다.

  키요카와들은 그들을 비웃었다. "그런 소리를 하다 보면 시세時勢에 뒤쳐지게 될 걸." 키요카와들은 에도로 떠났다. 해안방위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남겨진 콘도들은 교토의 치안治安이 너무나 난잡한 데 질려 버렸다. 존황의 마음이 돈독한 콘도 등은 "우리들은 왕성王城을 수호해야 한다. 왕성이 있는 교토의 치안을 유지하는 데 힘쓰자."고 생각하여, 수호직守護職을 맡고 있는 아이즈 번(会津藩,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 23만 석)을 찾아가 "사설경찰부대를 설치하게 해 달라"는 청원을 했고 수호직은 이를 허가했다. 이후 신센구미는 아이즈 번의 비호를 받게 되었고 그 인연은 보신전쟁戊辰戦争까지 이어진다.


  감연히 파멸의 길을 선택하다

  그러나 오해를 해서는 안 된다. 콘도를 위시한 신센구미들이 관철하려 했던 건 어디까지나 '토쿠가와 가문에 대한 충성'이었지, '토쿠가와 막부에 대한 충성'은 아니었다. 콘도는 막부와 같은 거대조직巨大組織을 꺼렸다. 특히 처세술만이 특화되어, 본래의 무사도武士道를 망각해버린 막부의 신하幕臣들에게는 정나미가 떨어져 있었다.

  '이런 놈들은 막부를 좀먹는 벌레들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하치오지 센닌다이 】에 의해 자극받았던 토쿠가와 가문에 대한 충성심은 그들의 가슴 속에 순수배양純粹培養되었다. 그리고 웅번雄藩이라 불리던 일본 서남부의 여러 번들의 동향 역시 콘도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실컷 공무합체파 흉내를 내다 이윽고 막부 토벌파로 돌아선 사츠마 번(薩摩藩, 역주 : 시마즈 가문島津家. 77만 석) 같은 경우 콘도의 눈으로 보면 '침을 뱉어 꾸짖고 싶은' 존재였다. 그들보다는 차라리 쵸슈 번 쪽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쵸슈 번(長州藩, 역주 : 모리 가문毛利家. 36만 9천 석)은 당초부터 막부 토벌討幕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었다. 사츠마 번은 막부와 편을 먹고 쵸슈를 열심히 괴롭혔음에도 나중에는 그 쵸슈 번과 결탁해버렸다. 그 중개仲介를 맡은 인물이 바로 카츠 카이슈勝海舟와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같은 자라고 콘도는 간파했다. 카츠와 료마는 신센구미의 입장에선 하나의 암살목표였다는 건 자명하다. 그러나 카츠는 막부의 고급관료高級官僚이므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신센구미는 최후의 최후까지 싸워나갔다. 왕정복고王政復古에 의해 교토에서 내쫓긴 후에는 후시미伏見에 주둔지를 차렸고, 이윽고【 토바 후시미 전투鳥羽伏見の戦い 】에서 그들이 패배하자 신센구미는 오사카 성大坂城에 농성하여 결전에 임할 의기를 보였다. 총대장인 15대 쇼군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가 적전도망敵前逃亡을 쳤음에도 신센구미는 에도江戸로 돌아온 후 싸우려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코후에서의 전투 -> 시모우사 지방下総国에서의 전투를 거치며 계속해서 그 숫자는 줄어들어갔으나, 살아남은 자들은 아이즈会津에 농성하여 계속 싸웠다. 그 후에는 탈출하여 바다를 건너 에조蝦夷에 상륙했다. 그리고【 하코다테 고료카쿠 전투函館五稜郭の戦い 】에서 패배할 때까지 투쟁을 계속했다. 부장 히지카타 토시조는 이곳에서도 '신센구미'란 명칭을 끝까지 유지하고 있었다.

전사하기 얼마 전에 촬영된 히지카타 토시조의 사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말하자면 신센구미 대원 하나하나가 '토쿠가와 가문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하였다. 대원 하나가 죽으면 다른 대원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렇기에 그 숫자는 갈수록 줄어들었으나 토쿠가와 가문에 대한 충성심만은, 역으로 남겨진 자들의 마음 속에서 더욱 더 커져간 것이다. 이를 상징하는 최후가 바로 메이지 2년(1869) 5월 12일에 벌어진 히지카타 토시조의 전사戰死였다. 신센구미는 마지막까지 토쿠가와에 대한 충성이라는 한 물 간 사상을 아름답게 관철했다. 물론 그것은 그저 '파멸의 미학'에 지나지 않았다.  


덧글

  • 도연초 2018/07/01 21:09 # 답글

    어찌보면 패자이자 '역도'였던 신선조뿐만 아니라 존황파 내부의 숙청작업 덕분에 메이지유신이 이렇게 순조로워 진 게 아닐까 합니다.(실제로 카와카미 겐사이는 외세를 끝까지 거부하는 성향이었기도 하고... 더구나 그와 비슷한 반외세 성향의 인사들이 제법 있었던 걸 생각하면...)
  • 3인칭관찰자 2018/07/01 22:44 #

    당시 일본에선 사농공상을 불문하고 외세를 배척하려는 양이주의자들이 개국파보단 훨씬 많았습니다.

    막부를 쓰러트린 세력들은 사츠에이 전쟁이나 4개국 함대 양이전쟁 등을 거치면서 외세를 거스르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막부를 쓰러뜨리기 위해 민중의 배외감정을 부추겼으나 정작 자기들이 정권을 잡은 후에는 외세에 영합하여 근대화 부국강병을 추진했죠. 보신전쟁 전후해서 메이지 정부 쪽 군인 내지 양이지사 일부가 서양인들을 살상한 사건이 몇 건 있었는데 메이지 신정부는 그때마다 서양인을 살해한 자국민들을 극형에 처했을 정도라서.... (처형장에 유럽 공사들을 입회 목적으로 초청한 경우도 있을 정도의 저자세였다고)

    과거의 동지들이었던 양이지사들 중에 외세 배척성향을 간직한 사람은 대부분 신정권 중핵에서 밀려났고, 말씀하신 카와카미 겐사이 같은 경우 처형당하기까지 했죠. ;;;;
  • 2018/07/04 10:3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07/04 15:4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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