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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료마》신센구미新選組, 파멸의 미학 (上) 역사



  이 글은 1991년에 출간된 (舊)《歷史群像シリ-ズ 23 坂本龍馬》 의 P. 158 ~ 161페이지에 수록된,《료마의 시대 막부 말기를 생각한다》中 〈신센구미新選組 파멸의 미학 - 토쿠가와 가문에 목숨 바친 미부 늑대壬生狼의 투혼〉를 번역한 글입니다.《불씨》,《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간경영》등의 저작으로 대한민국에도 알려진 역사작가분인 도몬 후유지童門冬二 님께서 집필하셨습니다.


  료마의 에조蝦夷 이주계획

  겐지 원년(1864) 여름,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는 스승 카츠 카이슈勝海舟와 함께 교토에 있었다. 카이슈는 이 시기, 막부가 설립한 코베 해군조련소神戸海軍操練所의 소장所長이었고, 료마는 조련소 학생회장塾頭을 맡고 있었다. 오늘날로 치환한다면 카이슈가 국립해군대학 학장 / 료마가 학생위원장을 맡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두 사람은 교토의 상황을 지켜보며 심히 속을 썩이고 있었다. 왜냐하면 분큐文久 / 겐지元治 연간(1861~1864), 교토는 '암살의 계절'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기세를 얻은 양이파攘夷派는 쵸슈 번(長州藩, 역주 : 모리 가문毛利家. 36만 9천 석)을 등에 업고 공무합체파公武合体派 요인들을 계속해서 살해殺害하고 있었다.

  또 하나 문제였던 게, 전국의 양이파 지사들이 일제히 교토에 집결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음에도 그 중엔 함량미달인 자도 많아, 명목상으로만 지사 간판을 걸고서 실제론 유흥 자체를 목적으로 삼은 사람, 고향에 남겨진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보내기 위해 이러한 대열에 낀 사람도 섞여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한 자들은 생활이 궁핍해지기만 하면 교토 상인들의 집에 쳐들어가 협박과 강도행위를 벌이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을 단속해야 할 막부의 치안조직(교토 정무대리所司代이나 시 관청町奉行所)은 겁을 먹고 아무런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섣불리 손을 댔다간 그들 배후에 있는 초슈 번 등의 양이파들이 즉각 개입해오기 때문이었다. 궁궐御所 안에서도 이러한 낭인무사浪士들을 옹호하는 쿠게公家가 허다했다. 교토의 치안력은 그야말로 상실되었다 할 수 있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카츠 카이슈에게 이렇게 진언했다.

  "이대로 가면 앞으로 국가를 위해 공헌할 만한 젊은 생명들이 계속해서 스러져갈 뿐입니다. 결단을 내려 교토에 모여든 젊은이들을 한번 에조(蝦夷, 역주 : 지금의 홋카이도)로 대피시켜, 그들의 힘을 온존시키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군. 자네, 괜찮은 제안을 헀어."라며 카츠도 찬성했다. 그리하여 카츠는 교토에 머무르던 막부의 로쥬老中 이타쿠라 카츠키요板倉勝静를 설득하여 료마의 제안을 실행에 옮겨보려 했고, 이타쿠라도 이를 승낙하였다.

  "에도 성으로 가서 막부의 군함을 빌려, 교토에 있는 자들을 승함시켜 에조로 보내시오."라고 이타쿠라는 지시, 카츠를 대신하여 료마가 에도로 내려가기로 결정되었다.

  료마가 교토를 출발한 게 6월 2일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3일 뒤인 6월 5일. 기온 축제祇園祭의 전야제가 펼쳐지는 그 날, 이케다야 사건池田屋事件이 일어났다.


  이케다야 사건

  교토 땅을 흐르는 카모카와 강鴨川 옆을 흐르는 타카세 강高瀨川. 이곳은 과거 스미노쿠라 료우이角倉了以가 만든 운하運河였다. 이 강에 놓여있는 산죠 소교三条小橋 바로 옆에 이케다야라는 조그마한 여관이 있었다. 6월 5일 밤, 이곳에 30여 명의 양이파 지사들이 모여 밀의密議를 나누었다. 밀의의 내용이란 건,

  ● 열풍熱風이 부는 날 교토京都에 불을 지른다.
  ● 깜짝 놀라 입궐하려는 막부 옹호파佐幕派 나카가와노미야中川宮와 교토 수호직京都守護職 지위에 있는 아이즈 번주会津藩主 마츠다이라 카타모리松平容保를 죽인다.
  ● 그리고 텐노天皇에게 행차御動座하실 것을 주청한다.
  ● 텐노를 봉대하여 일거에 막부 토벌군討幕軍을 일으킨다.
  ● 혼란을 틈타 미부壬生에 있는 신센구미 주둔소를 습격, 잡혀간 동지 코다카 슌타로古高俊太郞를 탈환한다. 는 것이었다.

지금은 이자카야가 들어서 있는 이케다야 부지.(출처 : 한국 위키피디아)


  그러나 이러한 밀모 내용을 신센구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틀 전에 포박한 오우미近江 지방의 지사 코다카 슌타로를 고문하며 다그친 끝에, 코다카로부터 밀의의 내용을 자백받았기 때문이다.

  6월 5일 저녁 무렵 신센구미 대원들은 기온 축제 구경에 나서는 척 하면서 미리 결정된 집합장소인 야사카 신사의 조회소로 향했다. 그리고 오후 8시, 국장 콘도 이사미의 명령을 따라 신센구미는 일거에 이케다야를 습격했다. 그들은 여기서 과격파 지사 7명을 죽이고 나머지 20여 명을 모두 체포했다. 도망친 사람도 있긴 했으나, 이윽고 뒤따라온 수호직ㆍ정무청所司代ㆍ시 관청町奉行所ㆍ공무합체 성향의 번藩들이 보낸 군대에 포위당한 끝에 살해당하거나 자살로 내몰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신센구미의 명성名은 일거에 폭등했다. 츄신구라忠臣藏의 아코 낭인赤穂浪士들처럼 가로 무늬가 그려진 하오리를 입고서 피투성이가 된 채 철수하는 신센구미 대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교토 사람들은 수군댔다.

  "살인마人斬り들이야."

  "미부 낭인壬生浪들은 살인마였어."

  미부 낭인이라는 말은 '미부에 거점을 두고 있는 낭인'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미부 낭인壬生浪의 '浪' 자는 그 날을 기점으로 '狼' 자로 바뀌었다. 이로써 신센구미는 '미부 늑대壬生狼'라 불리게 된 것이다. 사랑받지는 못했다. 교토 사람들이 보기에 신센구미는 살인마들의 집단으로, 공포심만이 늘어갈 뿐이었다. 그러나 국장局長 콘도 이사미近藤勇와 부장副長 히지카타 토시조土方歳三는 그걸로 됐다는 식이었다.

  그 둘은 "이걸로 교토의 치안력은 우리들의 손으로 옮겨졌지."라면서,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변처럼 교토에 출현한 신센구미는, 어떻게 이런 조직을 형성할 수 있었을까?


  신센구미의 사상思想

  신센구미 부대원은 최전성기에는 3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입대하기 위해선 혹독한 시험을 치러야 했다. 그래도 콘도의 방침에 따라 신분은 따지지 않았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은 물론 승려僧인 자조차 꺼리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 입대한 모든 부대원은 엄격한 법도의 속박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명심해야만 했던 사항은【 사도士道에 위배되지 않도록 할 것. 】 이라는 조목. "무사도를 거스르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인데, 그에 대한 제재는 오로지 할복切腹이었다. 이 한 조목에 의해 얼마나 많은 신센구미 부대원들이 숙청肅淸당했는지는,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다.

  이 처절함 때문에 탈주자들이 여럿 생겨났다. 그러나 그들은 붙들리면 즉시 할복을 강요받았다. 이는 법도에 명기된【 조직局을 이탈하는 것을 용납치 않는다. 】는 조목에 근거한 것이었다.

  국장 콘도 이사미는 사농공상 신분을 따지지 않고 한 번 신센구미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무사 대접을 해 주었다. 그러므로 콘도의 기준에선 "농ㆍ공상 신분에 있던 자도 무사 신분이 되어 계층상승을 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는 "그렇다면 무사는 무사답게 무사도를 지켜야겠지. 무사도에 위배되는 부끄러운 짓을 저지를 땐, 깨끗이 자살해라."는 사고로 이어졌다.

  콘도 이사미는 무사시 지방武藏囯 쵸후(調布, 도쿄 도 쵸후 시東京都調布市)의 농민 집안 태생으로, 그는 본래 무사가 아니었다. 이는 부장 히지카타 토시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1번대 대장 오키타 소지沖田総司가 낭인浪人 집안 출신으로, 간신히 무사계급에 속해 있었다.

신센구미 시절 콘도 이사미의 사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검술가 집안에 양자로 들어간 경우이다.


  신센구미의 3대 스타인 콘도ㆍ히지카타ㆍ오키타는 본래 에도의 한 구석에다 콘도가 차린 시에이칸試衛館이라는 3류 도장의 동문同門들이었다. 히지카타와 오키타는 콘도를 대신해 대리사범을 맡기도 했다. 이 도장의 특이한 면이라면, 도장 내에서 문하생들을 가르치는 것보다도 출장 교습에 중점이 놓여졌다는 점이었다. 그건 콘도들의 출신지인 타마多摩 일대 농민들이 열심히 이 검술을 배우려 했기 때문이었다.

  나라의 문호가 열린 후 열강 국가들은 일본에서 생산된 물품들을 열심히 매집했다. 그들이 특히 주목했던 것이 '비단絹'이었다. 그렇기에 양잠養蠶이 활발한 지역이었던 타마는 일거에 호경기를 맞았다. 지금의 국도 16호선은 '비단길(실크 로드)'이라 불리며, 지게에 생사生絲를 짊어진 상인들이 요코하마에 있는 외국인 거류지로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이로 인해 생겨난 부富 때문에 나쁜 사람들이 꼬여들어, 타마 일대의 농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침입을 당해 재물을 도둑맞았다. 이 지역에도 치안력은 저하되어 있었고, 막부 공무원들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스스로 지켜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때깔만 좋은 검법이 아닌, 콘도들의 텐넨리신류 유파天然理心流 검법이 가장 유용했던 것이다.

  이 유파의 검법은 '통나무 검법'이라 불릴 정도로 수수하고 꼬질꼬질했다. 그러나 실전에선 유용했다. 그렇기에 너나 할 것 없이 콘도에게 입문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농사일로 바쁜 농민들이 멀리 떨어진 에도까지 통학할 수는 없으니, 토착 촌주들이 자기 마당에다 (임시) 도장을 꾸며놓고서 동향 출신인 콘도에게 "여기 와서 농민들을 지도해 주지 않겠나?"고 부탁하면 콘도 / 히지카타 / 오키타들이 죽도를 짊어지고 와서 농민들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식이었다.

  가장 난폭한 교습을 하는 건 오키타 소지였다 한다. 모든 농민들이 오키타에게 배우기를 꺼렸다. 그러나 오키타는 왠지 모르게 애교가 있어서, 마을 소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이는 그가 교토로 올라간 후에도 여전하여, 미부 사에서 아이를 돌보던 이 지역의 소녀와 그 보조들이 오키타만 보면 "오키타 씨, 오키타 씨" 하면서 따라다녔다고 한다. 이러한 점은 '미부 늑대'라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살인마 집단' 신센구미가 PR활동을 하는 데 커다란 효과를 가져왔다. 즉 이 지역 사람들과의 인간관계 융화에 오키타 소지는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막부 말기의 사상은, 쇄국이냐 개국이냐, 그리고 텐노 존숭尊皇이냐 막부 옹호佐幕냐로 갈린다. 그리고 양이파는 존황사상과 연결고리를 맺고 '존황양이尊皇攘夷'를 외쳤다. 개국파는 막부 옹호사상과 연결고리를 맺고 '막부 옹호ㆍ개국佐幕開囯'을 외쳤다. 공무합체라는 건 그 쌍방을 모두 아우르며 조정朝廷과 막부幕府가 손을 잡는 양태를 가리킨다. 콘도 이사미를 위시한 신센구미 간부들의 사상은 '존황ㆍ막부 옹호ㆍ양이尊皇佐幕攘夷'였다. 존황과 양이 사이에 막부 옹호 사상이 삽입되어 있는 양태로, 이는 콘도들이 자란 토양인 타마의 특수성에 따른 것이었다. 


덧글

  • 도연초 2018/06/30 09:07 # 답글

    서로 죽이고 해댔지만 실제 성향은 유신세력과 종이 한장의 차이만이 있었군요;

    그것은 바로 토바쿠(討幕)지만.
  • 3인칭관찰자 2018/06/30 10:33 #

    이 당시엔 존황사상은 시대의 대세로 자리잡아 버렸던지라... 유신세력과 마찬가지로 어지간한 막부 옹호 세력 역시 존왕사상을 갖고 있었고 최소한 그런 척이라도 해야 했죠. 요즘 우리나라에 빗대어 보자면 좌빨이든 수꼴이든 그 자체엔 반대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민주주의' 란 단어와 비슷하려나요.

    그리고 (메이지 텐노의 아버지인) 코메이 텐노가 인간적으로 가장 선호하고 둘도 없는 근황의 충신이라며 총애했던 건 토바쿠 쪽 사람이 아닌, 그들과 척을 진 (신센구미의 후원자)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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