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관찰자

beholderer.egloos.com

포토로그



《사카모토 료마》'살인마人斬り' 오카다 이조 (2) 역사



  이 글은 1991년에 출간된 (舊)《歷史群像シリ-ズ 23 坂本龍馬》 의 P. 112 ~ 115페이지에 수록된,《료마와 연관된 유신의 군상들 <2> 토사의 중진重鎮과 요우僚友》제 4화인〈오카다 이조岡田以蔵 ~ 동란의 어둠을 피묻은 칼날로 찢어발긴 희대의 암살자의 생애〉를 번역한 글입니다. 필자는 작가 쿠도 쇼코工藤章興 님입니다.


  이조의 장래를 걱정한 료마龍馬의 인애仁愛

  그러던 이조가 마지막으로 암살검暗殺劍을 휘두른 건 분큐 3년(1863) 2월 어느 날이었다고 하는데,《카이슈 일지海舟日誌》1863년 2월 5일자에 이런 기록이 있다.

【 료마, 콘도(近藤, 역주 : 쵸지로長次郎), 신구(新宮, 역주 : 우마노스케馬之助), 오카다(岡田, 이조), 쿠로키黒木 등이 배를 찾아왔다. 오카다 호시노스케岡田星之助가 악의를 품고 있으므로 처단해야 한다고 의결하였다. 】오카다 호시노스케는 인슈 톳토리 번(因州鳥取藩, 역주 : 이케다 가문池田家 32만 5천 석)의 무사로 존왕양이론자였는데, 그의 약전略伝에 따르면【 토슈인(土州人, 역주 : 토사 번 사람. 쿠로키를 제외한 4명은 토사 번 무사였다)과 정사를 논했던 게 화근이 되어 결국 참살당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상세한 건 불명이나 사카모토 료마와 이조가 호시노스케 참살사건에 관여했던 것이라고도 여겨진다.

  이 사실은, 당시엔 이미 료마와 이조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걸 짐작하게 한다. 료마와 이조가 언제 처음으로 만났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료마와 타케치가 호형호제할 정도의 친교親交를 맺고 있었고 이조가 타케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료마와 접촉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렇다 해도 두 사람이 좀 더 깊은 교류를 하기에 이른 건 분큐 2년(1862) 말 ~ 분큐 3년(1863) 초두에 걸친 시기였던 듯하다.《카이슈 일지》에 따르면 이조는 분큐 3년 1월 8일, 카츠 카이슈의 문하門下에 입문했다. 이는 료마의 권유를 따른 것으로, 타케치의 사주를 받아 암살暗殺에 광분하던 이조의 장래를 걱정한 료마의 인애와 정仁愛の情이 작용했던 것이리라.

  이 시기엔 료마와 타케치의 시대인식時代認識과 사상思想은 크게 괴리되어가고 있었다. 그 차이는 이조를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에도 반영되었다.

  타케치는 이조를 하인下僕처럼, 좀 더 나쁘게 말하면 애완견飼い犬처럼 대우했다. 앞에서 기록했던 암살사건들의 진짜 수모자真の首謀者는 타케치였다고 한다. 이조는 타케치가 지시하는 대로 피묻은 칼날을 휘둘렀던 것이다.

  신분차별이 극심했던 토사 번(土佐藩, 역주 : 야마우치 가문山內家 20만 2천 석)에서 태어난 이조로선 이를 따르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최상급 향토무사에서 상급무사 대우를 받기에 이른 타케치와 최하급 아시가루足輕인 이조의 신분격차, 검술상의 사제관계, 거기에다 타케치와 이조의 먼 조상이 이요伊予 지방 출신으로, 이미 그 때부터 타케치 집안은 오카다 집안의 주군主君 가문에 해당하였다는 과거사 경위까지 존재했다. 타케치의 명령에 절대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이조는 타케치에 의해 살인머신으로 만들어졌다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조에게는 잔인한 살인자라는 이미지가 따라다닌다. 살인 그 자체에 남모르는 유열愉悅을 느낀다, 는 식으로 묘사된다는 느낌도 든다. 그러나 이조에겐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의식은 없었다. 암살은 천벌天誅이었고, 정의正義를 위한 살인이었다.

  이조에게도 자신이 근왕지사勤王の士라는 데 대한 강한 자부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에게는 학문적 소양이 없었다. 눌변가訥弁家이기까지 했다. 천하국가를 논하는 자리에 동석해도 자신의 사고를 표현하는 법을 몰랐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천벌이라는 대의명분大義名分 하에 적대자들을 죽였다. 이조에게 암살이란 건 본인의 사상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육체적 언어' 였던 것이다.

  타케치는 이 점을 교묘히 이용했다. 토사 번의 찬연한 스타이자 본인이 심취해 있는 스승이 명령만 내리면, 이조는 망설임도 의심도 하지 않았던 것이리라.


  번외 ① 오카다 이조의 암살 리스트

  이노우에 사이치로井上佐一郞 / 혼마 세이이치로本間精一郎 / 우고 겐바노카미 시게쿠니宇鄕玄蕃頭重国 / 원숭이 분키치猿の文吉 / 모리 마고로쿠森孫六 / 오오카와라 쥬조大川原重藏 / 와타나베 킨자부로渡辺金三郞 / 우에다 스케노죠上田助之丞 / 이케우치 다이가쿠 야스토키池內大学泰時 / 카츠 카이슈勝海舟를 습격하였던 낭인 => 이 사람들에 대해선 을 참조하시라.

  (11) 히라노야 시게사부로(平野屋重三郎, 분큐 2년 10월 9일)

  공경公卿 가문들에 출입하며 돈벌이를 하던 사내로, 노동자들의 급여를 떼먹고 역참 관리인들에게 뇌물을 강요한 죄를 물어 카모 강 강변에 산 채로 결박해 놓았다.

  (12) 센베이야 한베에(煎餅屋半兵衛, 분큐 2년 10월 9일)

  히라노야의 동료. 마찬가지의 이유로 카모 강 강변에 산 채로 결박해 놓았다.

  (13) 무라야마 카즈에(村山加寿江, 분큐 2년 11월 14일)

  나가노 슈젠長野主膳의 애인愛人. 카모 강 강변에 산 채로 결박해 놓았다.

  (14) 타다 타테와키(多田帯刀, 분큐 2년 11월 15일)

  무라야마 카즈에의 아들. 목을 베어 죽였다.

  (15) 오카다 호시노스케(분큐 3년 2월 5일)

  근황지사로 활동하였으나, 실은 막부 옹호파가 보낸 세작スパイ이었다. 오사카 거리에서 살해.

  ● 아시카가 3대 목상木像 효수사건

  분큐 3년(1863) 2월 23일, 교토 토지원等持院에 안치되어 있던 아시카가 3대(足利三代, 역주 : 1대 아시카가 타카우지 / 2대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 3대 아시카가 요시미츠) 쇼군將軍들의 목상 머리부분이 지사들에 의해 잘려나가 시죠 강변四条河原에 효수되는 사건이 터졌다. 이는 천벌天誅의 광풍 속에 이미 암살할 만한 표적도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며, 아시카가 씨의 수급을 현직 쇼군에 빗대어 토쿠가와 쇼군 가문德川將軍家을 위협하는 의미도 담겨진 것이었다. 


  번외 ② 유신 당시 암약한 자객들

  ◆ 세키 테츠노스케(関鉄之助, 1824~1865)

  미토 번(水戸藩, 역주 : 미토 토쿠가와 가문. 25만 석) 무사. 안세이 6년(1859) 8월에 대옥大獄 사건이 터지자 사츠마 번(薩摩藩, 역주 : 시마즈 가문島津家. 77만 석)의 지사들과 회합하여 거병논의를 벌였으나 교토의 사정이 일변한 것을 알고 귀번하였다. 다음 해 칩거閉居를 명 받았음에도 몰래 번을 뛰쳐나가, 3월 3일 사쿠라다 문 밖桜田門外에서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를 요격要擊하여 살해하였다. 그 후 잠행도주를 계속하다 붙들려 처형당했다. 향년 39세(역주 : 42세의 오타?).

  ◆ 타나카 신베에(田中新兵衛, 생년미상~1863)

  카고시마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용맹하고 씩씩한 성격을 가지고 무武를 애호한 끝에 지겐류 유파示現流의 검사가 되었다. 분큐 2년(1862) 7월 20일에 사츠마 번 유지들과 함께 막부 옹호론자 시마다 사콘島田左近을 암살하였는데 이는 '천벌' 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 되어, 이후 그는 '살인마 신베에' 라 불리며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다음 해(1863) 5월 20일 참정參政 아네노코우지 킨토모姉公路公知 살해혐의를 추궁받은 끝에, 일절의 해명을 거부하고 자살하였다.

  ◆ 나스 신고(那須信吾, 1829~1863)

  토사 번 출생. 검술 / 창술 / 포술에 능했으며 사카모토 료마와도 교류하였고, 타케치 한페이타를 따라 토사 근왕당에 가입했다. 분큐 2년(1862) 4월 8일 동지들과 함께 요시다 토요를 암살한 후 쵸슈(長州, 역주 : 모리 가문毛利家. 36만 9천 석)로 탈주했다. 다음 해(1863) 8월 텐츄구미天誅組 거병에 참가하여 군감軍監 신분으로 각지에서 용전勇戰을 벌였다. 9월 24일 와시가구치 전투鷲家口の戰い에서 적병의 저격狙擊을 맞고 전사했다. 향년 35세.

  ◆ 카와카미 겐사이(河上彦斎, 1834~1871)

  쿠마모토 번(熊本藩, 역주 : 호소카와 가문細川家. 54만 석) 출생. 겐지 원년(1864), 공무합체파公武合体派이자 개국론자開国論者인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을 찔러 죽였다. 뒤이어 벌어진 금문의 변禁門の変에선 쵸슈 군에 가담하여 싸웠으나 패배하여 쵸슈로 도망쳤다. 그 후 투옥投獄 -> 임관任官 -> 입경 -> 귀번歸藩에 이르는 우여곡절을 두루 겪은 끝에 메이지 4년(1871)에 음모 혐의를 추궁받아 처형당했다. 향년 38세.


덧글

  • 도연초 2018/06/25 08:46 # 답글

    아무래도 한 방울의 먹물도 없이(검술 단련으로 인생을 바쳤으니 어련하겠습니다만) 단순하게 살인만을 저질러 온 이상 운명은 결국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군요;
  • 3인칭관찰자 2018/06/25 19:08 #

    결국 스승이자 오야붕인 타케치 입장에서도 이조는 쓰고 버리는 패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ㅠㅠ
  • 도연초 2018/06/25 19:31 #

    살인리스트에 여성과 어린이(?) 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잘 넘어가서 잘 살더라도 아마카스 마사히코처럼 살지 않았을련지...(실제로 사건 이후 처벌이 유야무야되었으나 평판은 나락으로...)
  • 3인칭관찰자 2018/06/25 21:27 #

    아마카스가 만주로 갔듯이 이조는 조선이나 대만으로 건너가서 대륙낭인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물론 끝까지 살아남았을 때를 가정한 이야기지만...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통계 위젯 (블랙)

743
480
346749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블랙)

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