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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료마》'살인마人斬り' 오카다 이조 (1) 역사



  이 글은 1991년에 출간된 (舊)《歷史群像シリ-ズ 23 坂本龍馬》 의 P. 112 ~ 115페이지에 수록된,《료마와 연관된 유신의 군상들 <2> 토사의 중진重鎮과 요우僚友》제 4화인〈오카다 이조岡田以蔵 ~ 동란의 어둠을 피묻은 칼날로 찢어발긴 희대의 암살자의 생애〉를 번역한 글입니다. 필자는 작가 쿠도 쇼코工藤章興 님입니다.


  동란 속에서 개화한 타고난 검재劍才

  때때로 역사는 피를 요구하면서 살인행위까지 정당화한다. 전시戰時는 물론이고 혁명기革命期에도 그러한 경향은 현저히 두드러져, 정의正義의 미명 아래 암살暗殺이 횡행하게 된다. 막부 말기幕末의 동란기 역시 예외가 아니었으며 왕부王府가 있는 교토京都 땅에도 암살의 피보라가 불어닥쳤다.

  동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암살검暗殺劍을 휘둘러 '살인마人斬り' 란 이칭을 얻은 자로는 사츠마薩摩의 타나카 신베에田中新兵衛 / 나카무라 한지로(中村半次郞, 훗날의 키리노 토시아키桐野利秋), 히고肥後의 카와카미 겐사이河上彦齋... 그들이 등장한 것도 물론 역사의 요청에 부응한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토사의 오카다 이조....

  '살인마 이조' 라는 이명으로 교토 사람들을 벌벌 떨게 했던 이 희대의 암살자도, 시대가 꽃피운 은화식물隱花植物이었다.

  이조는 텐포 9년(1838), 토사 번土佐藩의 하급 향토무사輕格鄕士 집안에서 태어났다. 토사 번 무사계급에 속하긴 했으나 그 지위는 최하급 아시가루足輕에 불과했다.

  당시에 가난한 무사의 사제(師弟, 역주 : 子弟의 오타가 아닐까 추정됩니다.)가 이름을 떨치기 위해선 학문學問의 길이나 검劍의 길 중 하나를 걸어야만 했다. 이조는 검성劍聖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의 명성을 접하고서 검객이 되기를 지망했다. 그러나 토사 번의 신분차별은 엄혹했다. 검술은 상급무사 내지는 상급 향토무사上級鄕士의 전유물로 여겨졌고, 아시가루는 보졸步卒로서의 역할만 할 줄 알면 된다는 게 번의 상식이었다.

  이조에게 문을 열어준 도장道場은 한 곳도 없었다. 그래서 자기식으로 목도木刀를 휘두르며 옥외검술뿐만 아니라 실내검투도 혼자서 수련했다. 이러한 수행은 그를 강건한 체격으로 만들었고, 도장검술만으론 얻을 수 없는 독특한 검술 패턴을 개화시켜, 훗날 암살검을 휘두르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했다.

  목도를 휘두르는 일상 속에서 이조의 앞날에 광명이 비쳤다. 상급 향토무사인 타케치 한페이타(武市半平太, 즈이잔瑞山)가 도장을 차리면서 그의 입문을 허락한 것이다.

  자기식으로 검술을 익힌데다 품성品性에 결여된 점도 있긴 했으나 이조는 입문하자마자 처절할 정도의 검세劍勢를 내비쳤다. 타케치는 그의 타고난 재능天稟の才에 경악하여 이후 이조를 애제자愛弟子로 삼아 어딜 가든지 데리고 다녔다. 이조도 역시 타케치에게 심취하여 언제나 그의 주변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게 되었다. 

  안세이 3년(1856)에 타케치가 검술수행을 목적으로 에도로 유학가게 되자, 이조도 그와 동행하여 에도 3대 도장 중 하나인 모모노이 슌조桃井春藏의 시가쿠칸士学館 도장에 입문, 나중에는 쿄신메이치 유파鏡心明智流의 목록을 딸 정도로 실력을 쌓았다.

  만엔 원년(1860), 이조는 타케치를 따라 보쵸防長 / 큐슈 지방을 유력遊歷한 후, 이어서 무사수행을 계속했다. 이조의 검기는 가면 갈수록 연마되어, 서서히 검명劍名을 떨치게 되었다. '검객 이조' 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살인마 이조' 가 탄생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조를 '살인마' 로 키워낸 건 타케치였다. 물론 타케치도 당초에 그를 그런 검객으로 양성하려고 의도했던 건 아니었을 것이나, 결과적으론 그렇게 되었다. 격동하는 시대상황이, 검객으로서 살아가려 한 이조의 운명에 커다란 변전을 초래했던 것이다.

  분큐 원년(1861) 8월, 타케치를 영수領袖로 삼은【 토사 근왕당土佐勤王党 】이 결성되었다. 다음 해인 분큐 2년(1862) 4월, 참정參政 요시다 토요吉田東洋는 타케치의 의향을 받든 근왕당원 나스 신고那須信吾 등에 의해 암살당하여, 토사의 번론은 공무합체公武合体에서 존황양이尊皇攘夷로 기울어가게 된다.

  이 시기, 이조는 분고 오카 번豊後岡藩에서 검술수행을 하고 있었으나, 토요가 암살되기 직전인 같은 해 3월에 귀번, 토사 근왕당의 58번째 동지로 서명署名 / 혈판血判을 찍었다. 이후 그는 근황지사로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존양파尊攘派의 검객으로서 케이세츠京摂의 땅을 질주하게 된다.


  천벌天誅의 폭풍 속에서 휘몰아치는 암살검

  이조가 처음으로 암살검을 휘두른 건 분큐 2년(1862) 8월 2일, 오사카에서였다.

  희생자는 토사 번의 시타요코메(下橫目, 하급 감찰관리下級偵吏) 이노우에 사이치로(井上佐一郞, 左一郞). 이때 이노우에는 오사카에서 토요를 암살한 하수인을 탐색하고 있었다. 이를 안 이조는 동지들과 짜고 도톤보리道頓堀에 있는 요릿집料理屋으로 이노우에를 초대한 후 떡이 될 때까지 술을 권하여, 만취한 이노우에의 목을 조른 후 와키자시脇差로 확인사살까지 마치고 그 사체를 도톤보리 강에다 던져버렸다.

  이후 이조의 운명은 휘몰아치는 천벌의 폭풍 속에 휘말려, 그 혈인록血刃錄엔 다음과 같은 희생자犧牲者의 이름이 오르게 되었다.


  ◆ 혼마 세이이치로 마사타카本間精一郎正高 : 분큐 2년(1862) 윤 8월 20일 암살

  혼마는 번을 이탈한 에치고越後 출신 낭인으로 존왕양이파였음에도, 이조는 그에게 막부의 간첩혐의를 씌워 교토 산죠 키야쵸木屋町에서 폰토쵸先斗町로 접어드는 골목길에서 그를 참살斬殺하였다. 타카세 강高瀬川에 혼마의 몸통을 걷어차 밀어넣은 후, 그 수급은 다리 언저리에 효수하였다.
 
  ◆ 우고 겐바 시게쿠니宇鄕玄蕃重国 : 분큐 2년 윤 8월 22일 암살

  우고는 친 막부파親幕派인 쿠죠 칸파쿠 나오타다九条関白尙忠의 모신謀臣이었다. 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 당시 지사들을 탄압하였다는 이유로 교토 카와라마치 거리河原町의 마루타쵸丸太町에서 그를 살해하고, 그 수급은 미야카와쵸宮川町 마츠바라 다리에 효수하였다.
 
  ◆ 원숭이 분키치猿の文吉 : 분큐 2년 윤 8월 30일 암살
 
  분키치는 안세이의 대옥 당시 막부 관리들의 밀정으로서 정보수집을 맡으며 지사 탄압에 조력했던 말단 포졸目明し이었다. "개, 고양이나 다를 바 없는 사내를 베면 칼만 더러워질 뿐이다." 라면서 산죠 강변에서 목을 졸라 죽였고, 그 시신을 현장에 효시하였다.

  ◆ 모리 마고로쿠 / 오오카와라 쥬조 / 와타나베 킨자부로 / 우에다 스케노죠 : 분큐 2년 9월 23일 암살 

  모리森와 오오카와라大川原는 교토 히가시쵸東町 행정관청의 포리
  이케우치는 야나가와 세이간梁川星巖 / 우메다 운핀梅田雲浜 / 라이 미키사부로頼三樹三郎 등과 견줄만한 존양파의 기둥 중 하나였으나, 안세이의 대옥 당시 자수自首하면서 그 혼자만 가벼운 처분을 받을 수 있었다. 이를 변절자 / 배신자라 하여 오사카 난바 다리에 있는 은신처隠宅 부근에서 그를 참살하여 수급을 다리에 효수한 후, 그의 두 귀를 잘라 공무합체파 공경들인 산죠 사네나루三条実愛 / 나카야마 타다요시中山忠能 두 사람의 저택에 한 개씩 내던졌다고 한다.

  이조가 관여한 암살은 주된 것만 열거해도 이 정도쯤 된다. 물론 이조 혼자서 저지른 일은 아니며, 모두가 (동지들과 함께) 복수複數의 인원으로 저지른 흉행凶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암살행위에 의해 '살인마 이조' 의 명성은 교토 전역에 울려퍼져, 그는 존양파 지사 사이에서 화려한 스타로 대접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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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인칭관찰자 : 《사카모토 료마》'살인마人斬り' 오카다 이조 (2) 2018-06-24 15:44:51 #

    ... 와타나베 킨자부로渡辺金三郞 / 우에다 스케노죠上田助之丞 / 이케우치 다이가쿠 야스토키池內大学泰時 / 카츠 카이슈勝海舟를 습격하였던 낭인 =&gt; 이 사람들에 대해선 문을 참조하시라. (11) 히라노야 시게사부로(平野屋重三郎, 분큐 2년 10월 9일) 공경公卿 가문들에 출입하며 돈벌이를 하던 사내로, ... more

덧글

  • 차가운 도시남자 2018/06/22 19:41 # 답글

    흙수저가 혼자 고군분투하고 노오력해보았지만 불쌍하게 이용만 당한 케이스지요.
  • 3인칭관찰자 2018/06/22 21:50 #

    정치운동으로 분주하던 하급무사들에게까지 무시당할 정도의 흙수저만 아니었다면 좀 더 나은 일생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도연초 2018/06/23 11:32 # 답글

    막말사대인참이니 뭐니 한다지만 역사적으로는 영향력이 미미한 일개 테러리스트 였을 뿐... 이라지만 드라마틱하고 짧은 인생 덕분인지 비중에 비해 매체화의 좋은 대상이 되는 것일지도?
  • 3인칭관찰자 2018/06/23 17:12 #

    그래도 오카다 이조는 1862~63년 일본 교토 정국을 공포로 몰아넣은 존왕양이파의 테러리즘을 가장 극명하게 상징하는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반 막부 과격파 하급무사들이 정치적 테러를 저지르면서 공포를 조장, 조정과 막부를 쥐고 흔들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 가장 '나댄' 테러리스트가 바로 이조이니. 4대 살인마 중에서도 카와카미와 나카무라 둘은 유명한 특정인물 하나를 죽인 것 외에 연쇄살인은 저지르지 않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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