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관찰자

beholderer.egloos.com

포토로그



[사토 하루오] 아쿠타가와 상과 사람들芥川賞の人々 아오조라문고





  나는 제 1회 이래 아쿠타가와 상芥川賞 전고위원詮考委員을 맡고 있다. 그게 언제부터였더라.. 어쨌든 20년도 더 된 옛날 일인지라 어지간한 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제 1회였기 때문일까, 이시카와 타츠조(石川達三, 1905~1985. 대표작《살아있는 병사》,《인간의 벽》등) 가 당선된 그 때만큼은 몽롱하게나마 기억하고 있다.

  회장은 료고쿠両国 근처 어딘가로, 커다란 강을 응시하면서 선고가 진행된 건 초여름 내지는 늦여름이었을 것이다. 키쿠치(菊池, 역주 : 키쿠치 칸菊池寛. 1888~1948)와 쿠메(久米, 역주 : 쿠메 마사오久米正雄. 1891~1952)가 적극적으로 의견을 교환하던 것을 제외하면 다른 누구도 그다지 활발한 발언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 제 1회 아쿠타가와 상 결정은 키쿠치와 쿠메 두 사람이 내린 것과 같았다. 특히 키쿠치가 이시카와의 작품에 꽤나 마음이 동해 있던 것은 잊을 수가 없다. 본인은 후보에 오른 작품들도 모두 읽지는 않았을 정도라, 열심히 참가하지 않았었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애초부터 분게이슌쥬文芸春秋를 학문적 결사라기보단 '당파를 이루어 문단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정치적 단결체' 와 같이 생각하며 반감을 품고 있었고, 상대편도 이를 민감히 감지하여 서로 화합하지 못했으므로 아쿠타가와 상을 제정한다고 했을 때도 솔직하게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죽은 친구를 기념하기 위해 문학상을 만들어 신인들을 발굴한다는 이타성을 발휘하는 김에 주최자들도 소소한 이익을 얻고자 하는 건 결코 비난할 만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위원 위촉을 받았을 때는 살아있을 때부터 그러한 의향을 내비친 바 있던 아쿠타가와가 죽어서도 본인과 키쿠치를 연결시켜주려 한 것 같은 감상이 들어, 위원이 되기를 승낙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이 소임에 임한 이상은 문단결사를 위해서가 아닌, 문학을 위하여 신인을 발견하는 데 미력을 다하겠노라고 스스로 다짐한 적이 없지도 않았다. 그 때문인지 병에 걸려 딱 한 번 결석한 것 외에 회합에 빠진 적은 달리 없다.

  그러므로 제 1회 때 그다지 열심치 않았던 것도 다른 뜻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저 업무에 익숙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본인은 회차를 거듭하며 업무에 익숙해지면서, 갈수록 열심히 하는 위원이 되고자 했다. 후보작候補作들은 언제나 내 마음이 흡족해질 때까지 독파를 하여 확실한 평가를 내렸다. 본인의 뇌는 보기보다 융통성이 있는지라, 온갖 작자들이 자기만의 취향을 응집시켜 그들 나름대로 작품에서 의도하였던 점을 빨아들이는 능력은 지니고 있다 자부한다. 그건 어쩌면 본인에게 고수固守해야 할 정도의 신념이라는 게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만.

  본인은 스스로가 지지支持하는 작품이 생기면, 선고장에 가는 것이 즐겁게 기다려질 정도가 되었다. 본인의 거처에 출입하는 작가들을 위해 마치 졸업생에게 취직자리就職口를 얻어주듯 아쿠타가와 상 추천을 이용하고 있다니 어떠니 하는 건, 본인을 심각하게 무함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다른 위원들까지 모욕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본인은 그러한 가십은 가볍게 넘기고 금후로도 본인의 소신을 관철할 생각이다.

  본인은 게으른 성격인데다 시간 / 독서능력 모두 부족하여 평소에 의도치는 않았으나 신진작가新進作家들의 작품을 읽을 기회가 없었으므로, 1년에 두 번 신진작가들의 반짝이는 작품들을 일거에 읽어야 할 필요를 만들어주는 아쿠타카와 상 선고위원으로서의 직무는 본인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다. 위원들 중에서도 늙은 너구리古狸가 되다 보니 다른 위원들로부터 성가신 방해꾼邪魔者 취급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어도 키쿠치 / 아쿠타가와 두 망우亡友에 대한 의무를 실천하고, 본인이 공부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는 이상, 꾹 참고 앞으로도 계속 위원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쿠타가와 상의 작품들 말인데, 이에 관해선 그때그때마다 감상感想이나 비평批評 등을 써 놓았으나, 그런 글들도 대부분은 어디 뒀는지 잊어버렸다.

  당선작품들을 되돌아보면 일종의 '대회용 작품会場作品' 이랄까, 전람회에 최적화되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쉬운 작품이 많이 채택되었던 것 같다. 예선부터 그런 경향이 반드시 작용하는데다, 최후의 선정도 다수결 비스무리한 과정에 의해 결과가 나는 만큼 결국은 대회용 작품이라 할 물건이 추천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 점도 자연스러운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긴 하지만 가끔씩《성 밖城外》같은 수수地味한 작품이 당선되기도 했다. 분명 타카기 타쿠(高木卓, 1907~1974)의《견당선遣唐船》이나 이시즈카 토모지(石塚友二, 1906~1986)의《솔바람松風》은 후보작품으로 선정되어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 위원도 있었으나, 본인은 찬동하지 않은 작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최근의 작품 중에선 아리요시 사와코(有吉佐和子, 1931~1984. 대표작《키노가와 강》,《황홀한 사람》등)의《땅 노래地唄》가 이와 유사하다 하겠다.

  반면 본인이 지지했음에도 결국 당선되지 못한 작가라면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1909~1948) / 단 카즈오(檀一雄, 1912~1976)의 이름을 거론할 수 있으리라. 이를 보면 "아쿠타가와 상을 타든 타지 못하든 세상에 드러날 만한 사람은 알아서 드러나기 마련" 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아쿠타가와 상은 유망한 작가들에게 널리 착목着目하여 후보들을 선택해왔다." 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보기 드문 경우이지만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 1907~1991. 대표작《돈황敦煌》,《풍림화산風林火山》등)처럼 만장일치로 당선이 결정된 자도 있는가 하면, 고미 야스스케(五味康祐, 1921~1980. 대표작《야규 무예첩柳生武芸帳》,《박앵기薄桜記》등)처럼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 군과 본인 등이 지지하여 간신히 당선된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가 일대 유행작가가 된 건 재미있는 현상이라 하겠다.

  고미 야스스케를 언급하면 반드시 연상되기 마련인 시바타 렌자부로(柴田錬三郎, 1917~1978. 대표작《네무리 쿄시로眠狂四郎》,《고케닌 잔쿠로御家人斬九郎》등)도 완전히 묻혀버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쪽은 아쿠타가와 상에 낙선한 후 다음 회 나오키 상直木賞에 당선되어 세상에 나왔다.

  아쿠타가와 상은 신기하게도 이름에 '石' 자가 붙은 작가에게 행운이 따르는 모양으로, 제 1회 당선자 이시카와 타츠조를 위시하여 이시카와 쥰, 그리고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에 이르기까지, 아쿠타가와 상 수상자들 중에서도 화려하게 세상의 각광을 받은 사람들밖에 없다. '石' 자가 붙었음에도 당선되지 못한 사람은 이시즈카 토모지 한 사람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의《솔바람》은 대회용 작품이라기엔 너무나 씁쓸한 내용으로, 본인과는 영 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전집 발간에 힘입어 다시 한 번 읽어보려고 한다.

  히노 아시헤이(火野葦平, 1907~1960. 대표작《보리와 병사麦と兵隊》,《혁명 전후革命前後》등) 역시 아쿠타가와 상이 그를 발굴해낸 걸 자랑할 만한 작가임이 틀림없다. 그가 당선될 때 이론異論이 나오지 않았던 건 아니었으나, 그래도 대회장에서는 묘하게 활기가 감돌았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때로는 두 사람이 동시에 당선된 사례도 있는데, 예를 들자면 이시카와 쥰(石川淳, 1899~1987. 대표작《폐허의 예수》,《시온 이야기》등)과 (본인과 코지마 마사지로小島政二郎가 지지했던) 토미사와 우이오(富沢有為男, 1902~1970)는 같은 회에 함께 당선된 경우로, 이시카와가 시세를 타고 저널리즘의 조류에 능란하게 편승해갔던 데 비해, 토미사와가 완전히 묻혀버렸다고 할 순 없지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건 오로지 운이 나빴기 때문으로, 본인은 토미사와의 재능과 정열才情이 이시카와의 준수俊秀함에 뒤떨어진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토미사와가 본인같은 인물과 친밀하였기 때문에 손해를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전후戦後가 된 후에도 피난처에 눌러앉아 도쿄의 저널리즘으로부터 멀어진 데다가, 병까지 얻어 영락해 있던 토미사와는 근래 왕년의 의기를 회복하여《흰 벽화白い壁画》같은 대작을 완성하였으니, 설령 저널리즘의 환영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후세가 그에게 정당한 평가를 내려줄 것을 기대해도 될 것이라 본다.

  '제 3의 신인第三の新人' 이라 불리던 전후(戰後, 역주 :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의 당선자들(그들의 작품 역시 이 전집엔 포함되어 있지 않으나)도 지금에 와선 그야말로 일진일퇴의 시기에 봉착해 있다. 이 기회에 한번 분발一奮発하여 대성하기를 기대할 만하리라. 바라건대, 분분紛紛한 세상의 평가 따위에 번뇌하지 말기 바란다. 바람과 눈風雪을 능히 견뎌내어야만 우뚝 솟은 커다란 나무가 될 수 있다. 그들의 장래에 기대를 거는 바이다. 


- 쇼와 33년(1958) 3월 25일.《현대일본문학전집 제 87권 월보 86》(치쿠마쇼보筑摩書房)에 기고 - 
 

덧글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통계 위젯 (블랙)

3858
460
346290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블랙)

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