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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의 진》오사카 전쟁과 오다 가문 사람들 (2) 역사



  이 글은 2015년 8월에 출간된 신진부츠분코新人物文庫 353《여기까지 알아냈다! 오사카 전쟁과 토요토미 히데요리》에 수록된〈오다 가문 인물들과 오사카 전쟁〉(p.252 ~ 265)을 번역한 글로, 필자는 근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가신단 연구로 주목받고 계신 와다 야스히로和田裕弘 님입니다. 위 책은 현재 일본에서 종이책과 (아마존 킨들 등의) 전자서적으로 출간되어 판매중인 서적입니다. 불법공유나 상업적 목적으로 올리는 글이 아님을 명확히 하겠습니다.


 〈와다 야스히로和田裕弘〉

  1962년 나라 현奈良県에서 출생. 전국사戦国史 연구가. 공저한 저서로《진설ㆍ혼노사의 변》(슈에이샤集英社) / '신쵸키'와 노부나가ㆍ히데요시의 시대》(벤세이슛판勉誠出版) 등이 있다.


  화평을 위해 힘썼던 우라쿠사이有楽斎

  (노부나가의) 또 다른 동생인 (오다織田) 나가마스長益는 흔히 '우라쿠사이' 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노부나가의 친동생이나, 노부나가 생전에 남긴 족적은 미미하다. 혼노사의 변이 터졌을 때 조카 노부타다信忠에게는 자살을 권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도망쳐버렸다. 본인은 "할복할 시기를 놓쳐서 그랬다." 고 변명하였다 한다. 무인武人으로선 무능無能하다는 낙인烙印이 찍혀버렸으나, 다인茶人으로서 대성했다. 리큐 7철利休七哲 중 하나로 꼽히며, 다도茶道를 통하여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 히데타다秀忠 부자를 위시해 유력 다이묘有力大名 / 쿠게公家 / 승려僧侶 / 상인商人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교우관계를 구축했다.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賴가 우라쿠테이有楽亭에 행차하여 다회를 열었던 적도 있다.

후세의 평가가 박한 인물 중 하나인 우라쿠사이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우라쿠 부대는 서군의 부대장급 무장 2명의 목을 벤 바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선 동군에 가담하여 무훈을 세웠고, 이후 토쿠가와ㆍ토요토미 이중정권 시대가 계속되던 케이쵸 16년(1611) 3월엔 이에야스와 히데요리가 니죠 성에서 대면하도록 하는 데 힘을 썼다.

  그는 겨울 전역이 다가오면서 미묘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이에야스와는 옛날부터 친밀하여 다회에서 동석한 적도 있었고, 때때로 이에야스가 매사냥을 나가 잡아온 전리품을 선물받기도 하는 등 자주 만남을 가졌고, 겨울 전역 전년(1613) 말에는 연말歲暮 선물로 은銀 50매 / 코소데小袖 5벌을 진상품으로 바치기도 했다.

  화평을 모색하던 우라쿠사이는 개전이 코 앞에 다가온 케이쵸 19년(1614) 10월 6일, 교토 정무대리京都小司代 이타쿠라 카츠시게板倉勝重에게 보낸 편지에서【 카타기리 카츠모토 형제가 거성居城인 이바라키 성으로 퇴거한 일 때문에 오사카 성하가 소란스러워져 있지만, 우리들은 두 고쇼(兩御所, 이에야스와 히데타다) 분들께 손톱만큼도 딴마음을 품고 있지 않다. 이 뜻을 두 고쇼님들께 전해 주시게. 】라고 변명했음에도 이미 세간에선 "우라쿠사이ㆍ요리나가賴長 부자와 오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가 중심이 되어 로닌들을 모집, 농성준비를 하고 있다." 고 간주하고 있었다. 토쿠가와 가문과 토요토미 가문의 관계가 끊어지려 하기 전부터 양자의 융화를 도모하였던 우라쿠사이로선, 의도치 않은 전개였을 것이다.

  겨울 전역에서는 그가 요도도노淀殿의 삼촌이라는 입장도 한 몫 하여, 결과적으론 의도치 않게 오사카 성에 농성하게 되었다. 농성 후에는 이에야스와 친밀했다는 말이 무색하게 오사카 측의 입장에 서서 히데요리의 편지에 동봉하는 첨부문서를 작성,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등 오사카 측을 위해 활약했다.

  겨울 전역에서는 자택 가까이에 위치한 니노마루二の丸에 자리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겨울 전역 전초전에서 사카이堺의 다인인 이마이 소쿤今井宗薰 / 소돈宗呑 부자가 오사카 성으로 붙들려왔을 때, 우라쿠사이는 다도 동료로서 구명救命 운동을 벌여 소쿤 부자를 구해주기도 했다.

  그의 아들인 요리나가(운쇼지雲生寺)는 흔히 말하는 '카부키모노傾奇者' 로, 기행奇行을 많이 저지르는 인물이었다. 케이쵸 14년(1609)에 터진 이노쿠마 사건(猪熊事件, 쿠게들의 추문이 발각된 사건)에 연좌되어 교토의 낭인浪人으로 전락하였다가, 케이쵸 18년(1613) 겨울에는 엣츄 타카오카越中高岡에서 지내던 마에다 토시나가前田利長를 히데요리의 사자使者 자격으로 찾아가, "토쿠가와와 적대할 일이 생기면 아군이 되어 달라." 는 뜻을 전달했다고 한다.

  그는 겨울 전역에서 히데요리의 일가붙이로 기대를 모으며, 1만 군대를 이끌고 텐노지天王寺 방면을 수비하였다고 한다.(이설이 있음) 강렬한 개성을 지닌 자였던 만큼 이것저것 수상쩍은 행동을 많이 보여서, 농성해 있던 사람들에게도 그다지 신용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겨울 전역 화친이 논의되던 시기 이에야스는 우라쿠사이에게 화친을 타진했고, 우라쿠사이는 12월 3일자 답신에서【 오오고쇼님(大御所樣, 이에야스)과 친밀한 관계였음에도 적대하게 되었는데, 오사카 측이 화친을 받아들이도록 에둘러 설득하고는 있지만 잘 되지는 않습니다. 】고 회답했다.

  이에야스는【 히데요리가 간언諫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라쿠사이는 일단 오사카 성에서 퇴거하여 본인과 대면하도록 하지. 】라는 답신을 보냈다. 그러나 이도 여의치 못하여, 우라쿠사이는 오오노 하루나가와 함께 화친조건을 둘러싼 교섭을 여러 번 거듭하여 벌였음에도 이에야스의 거부로 화친은 암초에 놓였다.

  결국 12월 19일, 이에야스의 제안을 히데요리가 수락하는 형태로 화친이 성립되어, 우라쿠사이와 하루나가의 자식이 토쿠가와 측에 인질로 넘겨졌다. 같은 달 24일, 우라쿠사이와 하루나가는 챠우스 산茶臼山에 있는 이에야스의 본진을 찾아가 화친의 예를 올리고, 다음 날에는 쇼군 히데타다에게도 문안을 드려, 대강이나마 절차를 마쳤다.


  (우라쿠사이가) 이에야스의 간첩이었다는 설說

  오다 가문織田家의 사료에 따르면, 우라쿠사이는 개전 이전부터 이에야스에게 인질을 바치고 그의 간첩이 되어 농성하였다고도 하는데,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호의적으로 해석하자면 토쿠가와 / 토요토미 쌍방에 인맥을 갖고 있던 우라쿠사이였던만큼, 화친을 할 경우에 써먹을 방도가 있으리라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다음 해(1615) 2월, 우라쿠사이는 오사카 성을 퇴거해도 좋다는 허가를 이에야스로부터 받기 위해 가신인 무라타 키치조村田吉蔵를 슨푸로 파견하여 "겨울 전쟁에서는 본의 아니게 농성하게 되어, 당장이라도 퇴거하려는 마음뿐이었으나 다행히도 화친이 성립되었으므로, 이번에야말로 오사카 성을 퇴거하여 교토나 사카이에서 은거하고 싶습니다." 라는 뜻을 전하였다.

  강경파가 실권을 장악한 오사카 성에서는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터이므로, 다시 일어날 전쟁에 말려드는 것을 피하려 했던 것이리라. 그는 4월 13일에 오사카 성을 퇴거, 나고야名古屋에서 이에야스와 대면對面하여 오사카 성의 내부사정을 보고했다.

  한편, 그의 아들인 요리나가는 "노부나가의 조카인 본인이 오사카 측의 총대장을 맡고 싶다." 고 요망하였으나 반대하는 자들이 많았기에 교토로 물러갔다. 이는 오사카 성을 퇴거하기 위한 구실이었다고도 한다.

  결과적으로 우라쿠사이 부자는 요도도노 모자를 버리는 모양새가 되었다. 우라쿠사이의 입장에선 히데요리 따위, 형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자의 자식이므로 충성을 서약할 의리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에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뻔히 목격하였던 만큼, 그러한 마음은 더욱 더 강했으리라.

  여름 전역에 의해 오사카 성이 병화兵火에 휩싸였을 때, 토요토미 가문이 비장秘藏하고 있던 다도 도구들 다수가 분실되어 버렸다. 이에야스는 이 다기茶器들을 숙지하고 있던 우라쿠사이에게 조사를 명령했다. 이런 분야야말로 우라쿠사이에게 어울리는 임무였을 것이다.

  반면, 우라쿠사이의 사위인 츠가와 사콘(津川左近, 오와리 지방 슈고守護였던 시바 씨斯波氏의 자손)은 여름 전역에서 히데요리를 따라 순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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