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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춘추 Special》텐노의 퇴위를 둘러싼 일본 근현대사 (完) 역사



  이 글은 일본의 거대출판사인 분게이슌쥬文芸春秋에서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삼아 3달에 1번씩 계절별로 출간하는 잡지인《文芸春秋 Special》의 2017년 겨울호 p.158 ~ 165, 아사미 마사오 님께서 집필하신《꿈으로 끝난 히로히토 법황裕仁法皇 - 퇴위문제의 근현대사를 번역한 글입니다. 내년에 헤이세이 텐노가 양위하기로 결론이 난 이상, 이미 지나간 이슈를 다룬 이 책(약 1년 3개월 전에 출간됨)의 여타 기사들보다 상당히 생명력이 길 것이라 생각되는 이 역사 관련 글을 옮겨보려 합니다.

  용어번역의 경우 天皇은 '텐노' 로 표기하나, 그 외의 단어들은 최대한 원문의 표기를 따랐습니다.

  (이 글은 절대로 배포나 불법공유 목적으로 올리는 글이 아니며, 상업적으로 이용할 의사도 전혀 없습니다. 제 번역글을 퍼가시는 건 자유입니다. 그러나 퍼가실 때는 그 출처를 명기해주셨으면 합니다.)


  <아사미 마사오浅見雅男>

  1947년생. 저술가. 케이오기주쿠 대학慶應義塾大学을 졸업한 후 출판사에서 잡지 / 서적편집에 종사하는 한편, (일본) 근현대사近現代史 연구에 달려들었다. 저서로《황족과 일본 육해군》(분슌신쇼文春新書) /《황통 150년사》(치쿠마신쇼ちくま新書, 공저共著임) 외 다수가 있다.


  히가시쿠니노미야의 고심苦慮

  패전 후 얼마 동안, 전승국戰勝國들이 텐노天皇의 전쟁책임을 추궁할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 일본 측은 좀처럼 아는 바가 없었다. GHQ(연합국군 최고사령부)의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元帥는, '원활한 점령통치를 위해선 수많은 일본인들이 텐노에게 품고 있는 존경과 숭배의 마음을 이용해야 한다.' 는 판단을 굳히고 있었으나, 전승국 중에서도 오스트레일리아(역주 : 호주)처럼 텐노를 전범戰犯으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국가가 있었고, 전승국 가운데서 주도권을 잡고 있던 미국 정부도 최종적인 결론을 내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1945년 8월 2일 필리핀에서 촬영된 맥아더 원수의 사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지만 그가 필리핀, 일본, 그리고 대한민국 등에 끼친 영향은...


  텐노 본인도 한창 고뇌하는 중이었다. 패전으로부터 반 년이 지난 쇼와 21년(1946) 3월 6일, 텐노는 시종차장侍從次長 키노시타 미치오木下道雄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키노시타,《측근일기側近日誌》)

  "나로선 퇴위하는 편이 편하리라 생각한다. 오늘과 같은 고뇌를 맛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말이지. 하지만 치치부노미야秩父宮는 병에 걸려 있고, 타카마츠노미야高松宮는 개전론자였던데다 당시 군대 중핵부에 속해 있었던 관계상 섭정攝政으로 삼기엔 어울리지 않아. 그리고 미카사노미야三笠宮는 너무 젊어서 경험이 부족하지."

  본인이 퇴위하면 제 1황자인 아키히토 친왕(明仁親王, 지금의 텐노)이 텐노가 되지만, 친왕은 미성년자이므로 섭정을 두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황실전범皇室典範의 규정에 따라 텐노와 가까운 혈연을 지닌 황족 가운데서 섭정을 지목해야 하는데, 맏동생 치치부노미야는 오랫동안 폐병으로 고생하며 정양중이었고, 둘째동생 타카마츠노미야는 (미일) 개전에 찬성한 바 있으며. 막내동생 미카사노미야 타카히토 친왕은 나이가 너무 젊기에, 셋 다 섭정으로 삼는 데는 문제가 있다. 그러니 본인은 황위에서 물러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시기 항간에서는 "치치부노미야가 건강을 회복하여 섭정으로 취임할 것" 이라는 루머가 돌고 있었고,【 타카마츠노미야가 확실히 섭정이 될 것 】이라고 보도한 외신기자도 있었으나, 텐노는 세 명의 동생 미야宮들이 섭정으로 삼기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텐노가 타카마츠노미야를 개전론자라고 말한 이유는 여기선 생략하겠다. 흥미 있으신 분께선 최근에 간행된 졸저拙著《황족과 텐노》(치쿠마신서ちくま新書)를 참조해주시길 부탁드린다.}

  그리고《측근일기》에 따르면 텐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번에 히가시쿠니노미야東久邇宮가 저지른 경솔한 행동은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히가시쿠니 씨는 이쪽의 사정은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것 아닌가."

  히가시쿠니노미야란 패전 직후에 황족으로서는 처음으로 총리대신이 된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東久邇宮稔彦王을 지칭한다. 왕은 이전부터 신문기자들에게 "텐노는 퇴위해야 하며, 본인은 텐노에게 그렇게 할 것을 권유했다." 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있었고, 그 해 3월 6일자 조간《요미우리 호치読売報知》에도【 히가시쿠니노미야는 "텐노께선 황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므로 퇴위하셔도 만족하실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는 기사가 실렸다. 이를 읽은 텐노는 불쾌감을 느껴 키노시타에게 "유감" 이라고 털어놓은 것이다.

1950년, 자신을 교주로 삼는 신흥종교를 창설한 나루히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신적강하 이후 온갖 도전을 했지만 그가 벌인 사업이 제대로 성공한 사례는 없었다.


  나루히코는 텐노의 퇴위에 대해 열심히 언급하고 다니기 이전엔, 본인의 황적이탈(皇籍離脫, 신적강하臣籍降下)를 이야기하고 다녔었다. 쇼와 20년(1945) 10월 5일, 히가시쿠니노미야는 고작 50일만에 총리대신에서 사직한 직후 내대신內大臣 키도 코이치木戸幸一에게 "패전의 책임을 지기 위해 황족皇族에서 이탈하고 싶다." 고 통고했다가 키도로부터 "그런 행동을 하시면 나라가 혼란스러워집니다." 며 타이름을 받았음에도, 같은 취지의 이야기를 신문기자에게도 털어놓고 기사화까지 시켰다.

  방위성 방위연구소에 있는 나루히코의 일지에 따르면, 그 신문을 읽은 미카사노미야는 나루히코를 찾아와 "지금 황족된 분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텐노께도 전쟁책임문제가 파급되어 폐를 끼치게 됩니다." 라고 항의하였고, 치치부노미야 역시 요양지인 고텐바御殿場에서 "경솔하다!" 고 비판하는 편지를 써 보냈다. 그리고 궁내대신宮內大臣이 "텐노께선 어지간한 이유가 없는 한 신적강화는 용납하시지 않을 의향이십니다." 라는 담화를 발표해버렸기에 그 나루히코도 황적이탈 발언은 하지 못하게 되었으나, 이를 갈음하기라도 하려는 듯 이번에는 텐노의 퇴위를 언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째서 나루히코는 이 같은 물의를 빚을 만한 언동을 했는가?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건 역시나 전쟁책임과의 연관성이다. 앞에서 서술했듯 패전 이후 얼마간은, '전승국이 텐노의 전쟁책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분명치가 않았다. 그러나 나루히코는 전승국들이 텐노와 황족들의 전쟁책임을 추궁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는 단서가 보인다. 육군 군인이었던 나루히코는 대 미영전쟁美英戰爭 개전 직후 방위총사령관防衛總司令官에 취임하였었는데, 재임 중 일본군이 미군 파일럿들을 사형에 처한 건 등으로 책임을 추궁받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걱정하여, 옛날 부하들과 대책을 강구하기도 했다.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일가의 사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맏딸 이방자李方子 여사(맨 왼쪽)의 납채날 촬영된 가족사진이다.


  결국 이 건은 나루히코의 기우杞憂로 끝이 났으나, 쇼와 20년(1945) 12월 2일에는 나루히코의 (이복) 형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梨本宮守正王이 전범용의자로 체포되어 스가모 형무소巣鴨刑務所에 수용되고 말았다. 모리마사는 황족이었던 덕에 원수元帥 겸 육군대장陸軍大將 직함을 갖고 있었는데, 군인으로서 전쟁에 관여한 적은 전혀 없다시피하여, 전범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나루히코는 자신도 안심할 수 없겠다 싶었을 것이고, 텐노에 대해서도 낙관할 수 없으리라며 마음을 굳게 먹었으리라. 그리고 다른 황족이나 궁내대신이 무슨 말을 하든, 황족의 황적이탈과 텐노의 퇴위가 전쟁책임 추궁을 면피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안이하게 처리해서는 안 되는 문제

  "미국 정부는 텐노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는 방침을 굳혔다." 는 정보가 일본 쪽에 전해진 것은 쇼와 21년(1946) 3월 20일이었다. 텐노도 그 주변인들도 가슴을 쓸어내렸겠지만, 그럼에도 텐노의 책임을 문제시하는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메이지 시대에 제정된 황실전범은 일반적 법률과는 다른 특별규정이었는데, 전승국은 일본정부에게 "황실전범 역시, 보통 법률로서 다시 만들어라." 고 명령했다.《쇼와 텐노 실록》에 따르면 텐노는 개정안을 "우선 황족회의의 심의에 붙이기를" 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정부가 제정한 초안을 일반 법률과 마찬가지로 귀족원貴族院 / 중의원衆議院에서 심의하여 제정되고 말았다.

  이 때 보수保守적인 의원들 사이에서조차, 텐노에게는 도의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새로운 황실전범에는 텐노의 자발적 퇴위를 인정하는 규정을 삽입해야 한다." 는 논의가 벌어졌다. 만약 그 주장이 실현되었다면 이번에 (현) 텐노께서 희망을 시사하신 데서 비롯된 문제도 간단히 해결되었을지도 모르나, 이와 같은 규정을 근거로 당시 쇼와 텐노의 퇴위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격화되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역사적 사실이 보여주는 것은, 텐노의 생전 퇴위문제는 안이하게 생각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단시간의 검토만으로 특별처치법 같은 것을 만들어 처리해버린다면 훗날, 황위계승 문제를 둘러싼 다른 혼란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

  얼마 전, 미카사노미야 타카히토 친왕께서 100세의 천수를 모두 누리셨다. 현재의 황실전범에 기반한 황실제도에 따르면, 남계 계승자가 사라진 미카사노미야 가문은 언젠가 절가絶家될 운명이다. 이와 동시에 황위에 즉위할 수 있는 남계 황족의 수도 고작 4명으로 줄어들었다. 생전 퇴위문제와 맞먹는 이 현실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진지한 대응이 필요하리란 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원칙적으로 경칭과 경어를 생략하였다.)  


덧글

  • 2018/03/12 16:4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03/12 21:0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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