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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하루오]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를 추억하며 아오조라문고



원제 : <稀有の文才>
출처 :
아오조라 문고



  아쿠타가와 상芥川賞의 계절로 접어들면 언제나 다자이 오사무를 추억하게 된다. 그가 이 상을 타기 위해 집념을 불태웠던 걸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일의 전말에 대해선 한 번 글로 쓴 적도 있다. 당시 이를 폭로소설이나 그 비슷한 걸로 받아들이며 읽은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이라 오랫동안 방치하며 작품집作品集에도 포함시키지 않았으나, 그간에《분게이文芸》에 재록再錄된 것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일언반구一言半句의 악의惡意도 없었음을 직접 확인한 후에야, 안심하며 새로이 작품집에 포함시켰다.

1946년 긴자銀座의 주점에서 촬영된 다자이의 사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그 작품에는 어떠한 악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깊은 우정에 뿌리를 둔 충고만이 담겼다 생각했으나, 지금 냉정하게 읽어보니 이런 의도를 과연 몇 명이나 이해해줬을까 싶다. 그러나 그 작품은 주저함도 거리낌도 없이 실제로 있었던 일을 정확히 이야기한 글이다. 나는 그것이 진실이라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이를 밝히는 게 옳다고 믿고 있다. 세속인世俗人이 아닌, 정말로 문학계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상식이라 생각해야 할 텐데도, 지나치게 실제로 있었던 일을 드러내었던 게 다자이의 마음에 들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허영심 강한見え坊 그로서는 거울 앞에 생생히 비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던 것 아닌가 싶다. 그러한 허영꾼 특유의 부끄럼 많고 젠체하는 면이 다자이의 문학을 하이칼라스럽고 소탈하게 만드는 반면, 얼마간 그를 약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지나치게 진실을 응시하고, 진실을 너무 많이 떠벌리던 나의 거처에 그는 언제부턴가 발길을 끊고, 오로지 이부세(井伏, 역주 : 마스지鱒二)의 거처 언저리에만 드나들었던 듯하다. 나도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물건처럼 조심조심하면서 교류해야 하는 인간은 성가시다 생각했기에, 발길을 끊은 그를 굳이 데려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가진 재능은 애초부터 크게 인정하는 바였다. 아쿠타가와 상 따위 받지 않더라도 충분히 일가一家를 이룰 수 있는 재능이라 믿었고,《아쿠타가와 상》이란 제목으로 그를 모델로 한 작품을 쓴 건 이를 그에게 자각시키기 위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세속인이나 그렇고 그런 문예인들 따위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든지 문제될 건 없었지만, 다자이 본인이 이를 자신에게 충고하는 걸로 받아들이지 못한 건 나로선 대단히 안타까웠다. 그렇게 되어 이후 나의 거처에 발걸음을 하지 않게 된 다자이에게 다소의 유감遺憾을 느끼면서도 먼발치에서 그의 동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쇼와 18년(1943) 가을, 남방전선으로 보내진 나는 19년(1944) 봄에 쇼난(昭南, 역주 : 싱가포르)에서 뎅기열에 감염되어 1주일 정도 와병했던 적이 있다. 그때 우연히 호텔 사람이 머리맡에 갖다주었던《카이조改造》잡지에 <길일佳日> 이라는 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었다.

  나는 이를 한 번 읽어보고 새삼스레 그의 문재文才에 경탄驚歎했다. 그야말로 그가 지닌 문재는 그가 언제나 마음을 터놓던 벗인 단 카즈오檀一雄의 그것과 쌍벽을 이루는 것으로, 그 외의 자들은 여기에 견주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와 단은 본질적으론 대척對蹠을 이루는 면이 있어서, 두 사람의 깊은 우정을 성립시키는 비밀은 그 점에 있는지도 모른다.

  단이 남국적南国的이고 남성적이며 거칠고 자주 경거망동軽挙妄動하는 데 비해, 그는 북방 사람北国人으로 여성적이고 세심細心하며 자의식과잉意識過剰이고....

  나는 따분한 병상생활 중에 언제나 <길일> 을 머리맡에 두고 매일같이 읽었다. 밖에서 들어오는 거라곤 신문新聞밖에 없었기에 신문을 주워 읽은 후 반드시 <길일> 을 애독하는 식이었다. 그러다보니 '그냥 읽는 것만으론 재미가 없으니 어딘가 문장 내지 다른 면에서 결점을 찾아볼 수 없을까, 하나만이라도 좋으니 이를 찾아보도록 하지.' 라는 심술궂은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다시 읽었다. 그러나 쓸데없이 젠체하는 점이나 부끄러워하는 점 등 이제 와선 뭐라 하기도 애매한 근본적인 불만을 별개로 치면, 그 단편의 구성 / 문장의 세련미에서 나는 두 번을 읽고 세 번을 읽으며 흠집을 찾는 데 혈안이 된 것처럼 심술궂게, 아니 옹고집依估地 같은 심사가 되어 달려들었음에도 결점이라고 할 만한 부분을 찾는 데 실패하였다. 이 일은 내가 귀환한 것을 알고 그가 나를 찾아왔을 때 직접 이야기했던 것 같다. - 만약 그 기억이 맞다면 19년(1944) 6월 경이 그와 마지막으로 만난 때가 된다. 어쩌면 직접 만났던 건 아니고 그에게 책을 빌려 읽은 데 대한 감사편지 서문에 이를 기록하였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21년(1946) 봄이 아니었나 싶기도 한데, 이미 기억의 명확성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다자이의 스승 중 하나이자 대표적인 후원자였던 사토 하루오(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본문에서 언급되었듯 아쿠타가와 상 문제로 다자이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은 신슈(信州, 역주 : 나가노 현長野県)의 산중에서 들었다. 결국 그는 그런 최후最後를 맞을 운명運命이었다는 생각이 듬과 동시에, 몇 번이나 시도하였다 실패했던 일(역주 : 자살)을 이번엔 작정하고 성취하려 했구나. 싶은 몰인정하고 허무한 생각에 사로잡혀있던 나는, 언젠가 내게도 닥칠지 모르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데 선선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괘씸한 마음이 들었던 것을 잊지 못한다.

 《츠가루津輕》는 출판되었을 당시엔 읽지 않고 근년에 접어들어 - 작년 말인가 올해 초였던가 나카타니 타카오中谷孝雄로부터 책을 빌려 읽고, 대단히 감탄하였다. 이 작품에선 그의 결점은 전혀 부각되지 않고 그가 지닌 장점만이 두드러지게 드러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자이의 다른 모든 작품을 말소시킨다 해도 이 작품 하나만으로 그는 불후의 작가不朽の作家 반열에 오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작품에서 등장하는 토지土地는 그의 고향인 카나기金木 땅을 제외하면 나도 모두 본 적이 있고 알고도 있는 곳이지만, 토지의 풍토風土와 인정人情을 이 정도로 멋지게 배합한 그의 재능은 정말로 경탄스럽다. 그의 생전에 이 책을 읽고 직접 찬사를 바치지 못했던 것이 천추의 한千秋の恨事이다.

  지금까지 대부분 신슈에서 지내며 발걸음을 하지 않다가 <오우토우키桜桃忌>(역주 : 다자이의 기일) 도 7주년에 접어든 올해, 나는 처음으로 부부동반으로 출석하여 그가 남긴 아이遺孤들이 성장한 모습을 보았는데, 부탁을 받아 그 좌석에서 이야기하였던 것들은 대체적으로 이 글에서 기록한 내용과 동일하다.

- 쇼와 29년(1954) 9월 5일발행《현대일본문학전집 제 49권 부록 월보 제 17호》(치쿠마쇼보筑摩書房)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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