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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 카즈토시] 이자와 모토히코와의 전국시대 이야기 (3) 역사



  <한도 카즈토시半藤一利>

  쇼와 5년(1930) 도쿄에서 출생. 쇼와 28년(1953)에 도쿄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후 분게이슌쥬文芸春秋에 입사.《슈칸분슌週刊文春》《분게이슌쥬》편집장 / 분게이슌쥬 전무이사 / 고문역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일본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성단 - 쇼와 텐노와 스즈키 칸타로,《레이테 앞바다 해전》,《싸우는 이시바시 탄잔》,《소련이 만주로 침공한 여름》,《진주만의 날》,《머나먼 섬 과달카날》,《세이쵸 씨와 시바 씨》,《그 후의 카이슈》,《카후 씨의 전후》등이 있다. 헤이세이 5년(1993)에《소세키 선생님. 어쩌면漱石先生ぞな、もし》으로 제 12회 닛타 지로 문학상을, 헤이세이 10년(1998)에《노몬한의 여름ノモンハンの夏》으로 제 7회 야마모토 시치헤이 상을, 헤이세이 18년(2006)에는《쇼와사昭和史》(全 2권)로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특별상을 수상했다.(역주 :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의 손녀사위다. 이 분 저서 중《쇼와사》(全 2권)는 국내에도 간행되었던 바 있음.)


  <이자와 모토히코井澤元彦>

  작가. 1954년 아이치 현 태생.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TBS에 입사. 보도국 기자 시절인 1980년에《사루마루 환시행猿丸幻視行》으로 제 26회 에도가와 란포 상을 수상한 이후, 작가활동에 전념하였다. 역사 미스테리들을 집필하는 한편 독자적인 역사관으로 일본사를 되묻는《역설의 일본사》시리즈 등을 통해 새로운 일본 / 새로운 일본인관을 제시하고 있다. 주된 저서로《텐노가 되려 했던 쇼군》,《역설의 일본 역사관》,《중국 - 지구인류의 난제,《이자와식「일본사 입문」강좌》,《영걸의 일본사》,《新 이자와식 일본사 집중 강좌》등이 있다.(역주 : 국내 정발된 역사소설《야망패자》=《무사》의 저자이며, 후쇼샤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에 가담한 적 있다. 흔히 말하는 "일본 우익" 성향)


  노부나가와 히데요시는 뛰어난 경제인經濟人이었다

  한도 : 다시 생각해봐도 노부나가란 사람은 꽤나 대단하지요. 중세中世를 타파했던 데다,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창출하려 했습니다. 라쿠이치楽市ㆍ라쿠자楽座를 만들고, 세키쇼関所를 철폐하여 인간들의 교류를 증진시키는 식으로, 고루한 것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차례차례로 도입했죠. 대단한 선견지명先見之明이라 하겠습니다. 그 당시엔 전쟁이 벌어지면 수많은 토착농민들이 동원되어 죽어갔습니다만.

  이자와 : 전쟁이 벌어지면 영내의 농민百姓들을 징병하여 데리고 다녔죠. 그렇기에 농번기가 되면 병력이 잘 모이질 않아 1년 내내 군대를 운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도 : 대진 중에 모내기가 가까워오면 병사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했죠. 그러나 노부나가는 "농민은 나라의 근본이므로 죽게 해서는 안 된다." 고 하며, 그들을 부리는 대신 병농분리兵農分離를 도모했습니다.

  이자와 : 전업적으로 활약할 병사를 고용하는 용병제傭兵制로 전환하였던 거죠. 상업을 발달시켜 그 이익으로 병사들을 모집하기로 한 겁니다.

  한도 : 히데요시도 그랬듯이 노부나가도 상인들과 긴밀한 교류를 맺고 있었죠. 그런 의미에선 두 사람 모두 경제인이었다 하겠습니다.

  이자와 : 그만큼이나 병사를 모을 수 있었던 건, 상당한 재력財力을 갖고 있었던 덕이라 생각되는군요. 노부나가의 경우엔 그 아버지인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부터가 상당한 축재가蓄財家이기도 했고.

  한도 : 그렇지 않다면 아즈치 성 같은 곳은 지을 수 없지요. 그 성의 벽 한 면 한 면에는 금박金箔이 발라졌고, 카노 에이도쿠狩野永德의 일가사람이 그렸다는 '금벽장벽화金碧障壁畵' 도 있었다고 하니, 정말로 화려했을 겁니다.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는 미술적으로 봐도 대단한 시대였지요. 그림병풍 장르도, 성곽도, 대단한 것들이 줄줄이 등장했으니.

  이자와 : 카노 탄유狩野探幽도 신시대적 취향의 예술가였죠. 그림에다 금金을 아낌없이 바르던. 그의 밑에서 오가타 코우린尾形光琳 같은 자들도 나왔고요.

  그러나 노부나가와 히데요시는 라쿠이치ㆍ라쿠자 정책에 힘입어 축재하였다고는 합니다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재물을 모았는가 하는 점은 상세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전국全國의 코쿠다카石高를 합치면 약 1,800만 석 정도로, 토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경우엔 그 중에서 800만 석을 영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만, 히데요시의 직할령直轄領은 300만 석도 안 되었다지요. 그럼에도 오사카 성大坂城엔 어째서인지 산더미같은 황금黃金이 가득 쌓여 있었다고 하죠. 역시나 무역貿易 같은 것을 통해 돈을 번 게 아닐까요.

  한도 : 히데요시는 다이묘大名의 급료를 코쿠다카 제도石高制로 계산했지요. 각지에서 생산된 쌀을 교토京都로 집적시켜 필요한 양은 다이묘나 무사에게 분배하고, 남은 분량은 하카타博多 / 사카이堺 등지의 상인을 통해 해외에 매각하기라도 하지 않았겠습니까.(웃음) 라쿠이치ㆍ라쿠자나 토지조사檢地가 그러하듯, 히데요시란 인물은 노부나가의 방식을 이것저것 그대로 흉내내곤 했죠.

  이자와 : 단지 노부나가와 달랐던 건, 천하통일을 완성시키기 위해 지금까지 고용해왔던 용병이 약 20만 명이나 남아 있었다는 점이지요. 그들이 농민이라면 "전쟁이 끝났으니 고향으로 돌아가. 수고했어." 라 하면 됐겠지만, 20만 병사들을 단번에 해고했다간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목이 남아날 리 없죠.

  저는 이 점이 히데요시가 조선朝鮮으로 출병하여 대실패大失敗를 맛본 최대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히데요시의 조선출병朝鮮出兵에 대해선, "만년에 접어들어 정신이 이상해졌다." 든가 "요도기미淀君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츠루마츠鶴松를 잃은 슬픔을 달래려 했던 것이다." 는 이야기가 횡행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훨씬 더 현실적인 경제상의 이유가 존재했습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굳이 말하자면 러일전쟁日露戰爭 때와 마찬가지로, 군사 버블로 인해 확대될만큼 확대된 인적 구조조정リストラ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 대한 해결책이 바로, 바다 저편으로 쳐들어가는 것이었던 거죠.

  한도 : 러일전쟁이 끝난 후, 해군海軍 같은 경우는 한번 대대적으로 감축시켜야만 했어요. 그럼에도 손을 쓰지 못했죠. 그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명확히 하지 못한 채로.(웃음) 덕분에 이후 일본은 제국주의帝國主義, 군국주의軍國主義로 돌진해가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이자와 : 히데요시의 실패를 후세의 일본인이 조금 더 진지하게 연구했다면, 이후 일본의 운명도 변했을 수 있겠군요.

  한도 : 아니, 그건 과연 어떠려나요.


출처 : 한도 카즈토시半藤一利 編著,《日本史はこんなに面白い》p.69 ~ 87. 文藝春秋, 2008.


덧글

  • 無碍子 2018/03/02 08:57 # 답글

    쌀을 수출까지했다니 일본의 경제력은 놀랍기만 합니다.
  • 3인칭관찰자 2018/03/02 10:21 #

    보통 노부나가 / 히데요시 시기 일본의 최대 수출품은 은, 그리고 황금이며, 윗 글과 같이 쌀이 수출되었다는 이야기는 거의 들어본 적 없습니다만은, 히데요시 직할령에서 생산되어 바쳐진 미곡을 이용해 수출할 수 있을 만한 다른 물건을 입수하여 외국과 교역했을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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