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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와다 테츠오] 천하를 훔친 히데요시의 비법 (下) 역사



  자기같은 인간이 출현할 가능성을 없애버린 히데요시의 정책

  히데요시의 시책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이라면, '타이코 토지조사太閤検地''신분고정화身分固定化 정책' 을 들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 흔히 '타이코 토지조사' 라 일컬어지는 문건이 가장 먼저 작성되었던 시기가 텐쇼 10년(1582) 7월, 야마시로山城 지방에서 행해진 토지조사 때였다. 이는 이후 히데요시가 죽을 때까지 반복적으로 시행되어 나갔는데 그 특징을 말하자면,

  ■ 이전처럼 자가신고에 의한 조사를 하지 않고 히데요시가 파견한 행정관이 직접 현지를 찾아가, 장대와 측량용 밧줄을 이용해 '실측實測' 하였던 점,
  ■ 전국적으로 통일된 면적표시 기준을 만들었던 점,
  ■ 전답의 견적생산량을 매겨 상上 / 중中 / 하下 / 하하下下 4등급으로 분류하였던 점,
  ■ 지금까지 1반一反 360보였던 것을 1반 300보로 수정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히데요시는 그저 토지면적과 수확량만을 조사했던 것이 아니라, 토지조사대장에 등록된 경작자를 '농민百姓' 으로 인정하고 그 농민에게 연공부담 의무를 지웠다. 지금까지는 경작을 하면서도 '츠쿠리아이作合' 라는 양태를 통해 유력농민들에게 중간착취를 당하고 있던 농민들이, 이 토지조사에 의해 자립할 수 있게 된 것은 큰 의의를 지닌다. 종속농민들을 자립화시킨 정책으로 평가할 수 있는 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농민들은 이를 반갑게 기뻐하며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다. 이는 히데요시의 또 다른 핵심 시책인 '신분제 고정화' 와 그대로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텐쇼 19년(1591) 8월, '신분 통제령' 을 발포했다. 여기에 따라 사무라이侍 / 츄겐(中間, 역주 : 무사를 섬기는 하인) / 코모노(小者, 역주 : 무사를 섬기는 잡일꾼. 츄겐보다 계급이 낮음) 등이 새로이 농민이나 도회인이 되는 것, 그리고 역으로 농민이 경작을 포기하고 상인이 되는 것들이 금지되었다. 농민百姓은 농민, 무사武士는 무사, 상인商人은 상인이라는 식으로 신분이 고정되며, 계층을 이동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것이다. 에도 시대 사농공상士農工商 신분제도의 원점이 되는 법령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알다시피, 히데요시 자신은 빈농貧農의 아들로 태어나 입신하여 칸파쿠까지 출세하였으나, 자신이 천하통일을 이루고 난 후엔 자기같은 인간이 다시 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가능성을 부정해버렸다. 히데요시 본인이 하극상下剋上을 벌여 입신하였으면서도 하극상의 사회를 부정해버린 것이다. 자기부정의 논리라 할 수 있겠지만, 봉건적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시책이었다.

  그리고 이 신분통제령보다 3년 앞서, 히데요시는 '칼 사냥령刀狩り' 을 내렸다. 이것도 병농분리兵農分離의 방침에 입각하여 반농반사半農半士 신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내용이었다. 병농미분리 시대에 토착하거나 귀농한 농민의 경우엔 칼이나 창 한 두 자루 정도는 갖고 있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는 지배권력 입장에선 상당한 위협으로 작용했음이 틀림없다.

  언제 또 하극상의 폭풍이 휘몰아칠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던 히데요시는, 이 무기들을 "못釘과 걸쇠鎹로 새로이 주조하여 대불전을 만드는 데 쓰겠다." 고 했으나, 그 당시에도【 내심은 잇키를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데 있다. 】(《타몬인닛키多聞院日記》) 고 속내를 간파당한 바 있었다.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 가장 주목을 받는 침략의 이유

  분로쿠 원년(1592) 4월, 15만 명을 상회하는 군대가 쓰시마 해협對馬海峽을 건너 한반도朝鮮半島에 상륙했다.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개시, 분로쿠 전역文禄の役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한번 철병하였다가 다시 케이쵸 2년(1597)에 재정再征에 나섰는데, 이쪽은 케이쵸 전역慶長の役이라 부른다. 2차에 걸친 침략을 받은 조선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히데요시는 어째서 이 시기에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을 개시했던 것일까?

동래성 전투를 그린〈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출처 : 한국 위키피디아)


  에도 시대의 유학자儒學者 하야시 라잔林羅山은 "사랑하는 아들 츠루마츠鶴松가 죽자, 그 슬픔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히데요시는 조선출병을 결의했다." 고 이야기하였다. 현재도 소설가들 중에선 이와 같은 설에 입각하고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설은 성립할 수 없다. 왜냐고 물으신다면, 히데요시가 조선침략의 의도를 입에 담은 건 츠루마츠가 죽은 때보다 훨씬 이른 시기엔 텐쇼 13년(1585) 부터이니까 말이다. 현재 히데요시가 조선출병을 언급하기 시작한 최초의 문헌으로 여겨지는 게〈텐쇼 13년 9월 3일자 히데요시 문서〉이다. 이 문서는 가신 히토츠야나기 스에야스一柳末安에게 보낸 편지로, 이 글에【 이 히데요시, 일본국은 물론이요. 당나라의 영지까지 줄 생각을 하고 있다. 】고 적혀 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히데요시가 칸파쿠로 임관한 건 텐쇼 13년(1585) 7월이었다. 그로부터 2개월 후의 문서라는 데 주목하시길 바란다.【 칸파쿠로서 일본 전체의 통일지배를 물론, 마찬가지로 당나라(중국)도 그렇게 만들라는 분부를 받았다. 】는 논리다. 칸파쿠로 임관된 건 어디까지나 일본 내에 한함에도 히데요시는 위와 같이 확대해석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적남 츠루마츠. 생모는 요도도노.(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어쨌든 조선을 침략한 의도는 사랑하는 아들 츠루마츠의 죽음이라는 개인적인 레벨의 문제가 아니라, 칸파쿠 임관이라는 공적인 문제와 연동되어 있었다는 건 분명하다.

  현재(1991년) 통설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는 건 스즈키 료이치鈴木良一 씨의 학설이라 생각된다. 히데요시가 포르투갈의 침략에 맞서 싸우기 위해 국제적 환경 속에서 일본통일을 밀어붙일 필요가 있었고, 히데요시 자신도 좁은 일본 땅을 지배하는 것만으로 그치는 게 용납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국내에선 농민들이 지닌 츠치잇키土一揆 이래의 예봉을 피하려던 봉건영주계급封建領主階級의 바람, 그리고 포르투갈 상업자본에 대항하려 하던 일본의 호상豪商들의 요구가 그 웃전에 있던 히데요시의 전제화專制化와 결합되어, 타 국가를 침략하는 방향으로 이행하였다는 말이다.

카노 나이젠狩野内膳의〈남만 병풍南蛮屏風〉(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그 외에는《속 선린국보기続善隣国宝記》에 나오는, 히데요시가 조선국왕에게 전언토록 한 이야기 그 자체를 이유로 간주하는 사람도 있다. 텐쇼 18년(1590)에 히데요시는 조선국왕에게 전언하기를, "내가 바라는 건 다른 게 없다. 그저 아름다운 이름佳名을 삼국三國에 드러내려는 데 있다." 고 했다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삼국' 이란 일본ㆍ명나라ㆍ조선으로, 말하자면 히데요시의 명예심ㆍ공명심이 침략전쟁을 초래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조선국왕에게 보낸 전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위험하리라.

  그 외에 주목받는 설로는 나카무라 히데타카中村英孝 씨의 '영토확장설領土擴張說' 이 있다. 나카무라 씨는 분로쿠 원년(1592) 5월에 한성漢城이 함락되었을 때 히데요시가 명ㆍ조선을 포함한 정복지의 분배방침을 내린 것을 두고 "조선침략은 히데요시의 영토 확장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고 결론지으신 바 있다.

조선 순조 시대의 창경궁과 창덕궁을 그린〈동궐도東闕圖〉(출처 : 한국 위키피디아)   


  결론적으로 내 의견도 나카무라 씨의 학설과 가장 흡사하다. 왜냐하면, 조선에 대한 '처단成敗' 이 구체적인 고문서古文書에서 문제시되기 시작한 게 텐쇼 15년(1587)에 벌어진 큐슈 정벌九州征伐을 전후한 시기부터이기 때문이다. 히데요시 입장에선 실제로 큐슈까지 건너가 이키 / 쓰시마 섬對馬을 제압하고 보니 저쪽 건너편에 있는 조선이 보다 가깝게 다가왔을 것이며, 한편으로는 히데요시의 뇌리에서 일본을 통일한 후 해야 할 일이 서서히 아른거리기 시작한 게 이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여러 다이묘들은 내전을 벌여 상대를 쓰러뜨리고, 쓰러뜨린 상대의 옛 영지를 은상恩賞으로 (부하들에게) 지급하는 은총御恩<->봉공奉公 관계 속에서 봉건적 주종제도封建的主從制度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러 다이묘들은 내가 그들에게 은상을 줄 수 있으니 복종하는 것이지.' 란 인식을 당연히 히데요시는 갖고 있었을 것으로, 물론 이를 바꿔서 생각할 때 '줄 수 있는 은상이 없어지면 과연 그들이 나를 따를 것인가.' 하는 불안감도 자연히 생겨났을 것이다.

시코쿠를 거의 정복할 뻔했던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초상화.(출처 : 한국 위키피디아)
부하들에게 끊임없이 은상을 주기 위해 영토를 확대하는 것이라고 명언했던 대표적 인물.


  그렇기에 히데요시는 큐슈 정벌ㆍ칸토 정벌ㆍ오우 정벌이 끝난 후에도 부하들에게 계속해서 은상을 내리기 위해 항상 영토 확대를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첫 번째 표적이 조선이었고, 이어서 명나라까지 쳐들어갈 계획도 구상하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정작 히데요시 자신은 케이쵸 전역이 한창이던 케이쵸 3년(1598) 8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토요토미) 히데요리가 그 뒤를 물려받았으나, 토요토미 정권은 급속히 와해되어가게 된다. 조선 출병이 토요토미 정권의 주춧돌들을 후들거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출처 : 오와다 테츠오小和田哲男,《日本の歴史がわかる本 室町ㆍ戰國 ~ 江戶時代 篇》
p.128 ~ 136. 三笠書房, 1991.


덧글

  • 남중생 2018/01/14 22:19 # 답글

    재미있네요. 바이킹 침략 이나 몽골 제국의 확장을 설명할 때도 부하 혹은 후손에게 땅을 나눠주는 제도로 설명하곤 합니다.
  • 3인칭관찰자 2018/01/15 14:51 #

    그러고 보니 몽골도 바이킹도 이미지와는 달리 정복한 땅에 눌러앉아 자기들의 국가를 여럿 세웠었죠.. 그들은 자기 땅을 얻고 이를 물려받아가면서 리즈시절의 기세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만.
  • 진냥 2018/01/14 22:42 # 답글

    그 자신 충분히 능력이 있었음에도 공가의 논리를 압도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한 자의 말로라는 느낌이네요...
  • 3인칭관찰자 2018/01/15 14:56 #

    히데요시가 능력은 있어도 밑천도 시간도 빈약했기 때문에 조정이나 공가같은 기성권위와 좀 더 타협적하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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