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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와다 테츠오] 천하를 훔친 히데요시의 비법 (上) 역사



  미츠히데 모반에 가려진 의외의 또 다른 진상真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천하통일天下統一을 달성하기 직전까지 도달했음에도, 텐쇼 10년(1582) 6월 2일 새벽, 숙소 혼노사本能寺를 습격한 가신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에게 살해당했다.

  아케치 미츠히데가 모반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선 온갖 학설이 존재하며, '야망설野望說', '원한설怨恨說' 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물론 야망도 있었을 것이고 노부나가에 대한 원망도 있었을 것이나, 나는 통설과는 약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사카모토 성터에 있는 아케치 미츠히데 석상(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기실, 노부나가가 살해당하기 약 1개월 전, 조정이 보낸 칙사勅使가 아즈치安土로 내려가서 노부나가에게,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 칸파쿠関白, 다죠다이진太政大臣 중에 원하는 관직에 임명하겠다." 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은 일본 역사에 전례가 없었다. 조정이 어떻게든 노부나가의 환심을 사려 했음이 엿보이는 에피소드인데, 이 사건과 미츠히데의 모반이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노부나가는 뱃놀이를 벌여 칙사를 접대하긴 했으나, 특정 관직에 취임하고 싶다는 대답은 유보했다. 그러나 내심 세이이타이쇼군에 취임하기를 바랐으리라 생각된다.

  노부나가는 계도 상으론 헤이시(平氏, 역주 : 타이라 씨)였다. 오다 가문은 후지와라시藤原氏 출신으로 노부나가 자신도 젊은 시절에는 후지와라노 노부나가藤原信長라 서명한 적도 있으나, '천하 훔치기天下盗み' 가 가시권에 들어온 시점부터 헤이시로 갈아탔다. 겐페이 교대사상源平交代思想에 따른 것이었다. 겐지(源氏, 역주 : 미나모토 씨)와 헤이시가 교대로 정권을 차지한다는 사고는 당시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었기에, 겐지인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의 자리를 노리려 한다면 오다 씨는 헤이시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신쇼타이코키真書太閤記》에 그려진 혼노사의 변 삽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그러나 헤이시 계열이 세이이타이쇼군에 취임한 전례는 없었다. 아마 아케치 미츠히데는 이로 인해 연루되었던 것이 아닐까? 거기에다 미츠히데 본인도 겐지에 속하는 토키 씨土岐氏의 일족이었다. 헤이시인 노부나가가 세이이타이쇼군이 되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저지하려고 혼노사의 변을 일으킨 것이라 본인은 생각한다.


  다이묘 편성 - 관위官位를 이용한 히데요시의 절묘한 전국지배

  혼노사의 변 이후,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한 자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였다.

  히데요시는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에서 미츠히데를 토벌하고, 다음 해인 텐쇼 11년(1583) 4월에는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대항마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를 쓰러트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서 지반을 굳혔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왜소한 체구를 가리기 위해 일부러 커다란 옷을 걸쳤다고도 한다.


  그 후, 노부나가가 남긴 자식遺児인 (오다) 노부카츠信雄와 결탁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코마키ㆍ나가쿠테 전투小牧ㆍ長久手の戦い를 벌이기도 했으나, 히데요시가 천하를 통일하는 방향으로 역사는 진척되어 갔다.

  사실, 코마키ㆍ나가쿠테 전투 직후, 히데요시는 종3위 곤다이나곤権大納言에 서임되었다. 히데요시는 조정 내의 관위를 이용하여 다른 다이묘들보다 위에 서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텐쇼 13년(1585) 7월, 히데요시는 종1위에 서임됨과 동시에, 칸파쿠関白로 임관하였다. 이전까지 후지와라시藤原氏 이외의 인간이 칸파쿠에 오른 전례는 없었다. 그렇기에 코노에 사키히사近衛前久의 양자로 들어가 편의적으로 후지와라 씨가 되어, '후지와라노 히데요시藤原秀吉' 로서 칸파쿠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직후, 히데요시는 새로이 '토요토미豊臣' 란 카바네姓을 하사받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秀吉' 가 되어 칸파쿠 정권을 출범시켰다.

  칸파쿠 토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이 벌인 시책의 특징 중 하나가, 관위를 이용하여 다이묘들을 편제한 것이다. 텐쇼 16년(1588) 4월에 고요제이 텐노後陽成天皇가 쥬라쿠테이聚楽第로 행차했을 때가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온갖 다이묘들은 고요제이 텐노 앞에서 히데요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히데요시가 종1위 칸파쿠, 그 이하로는 오다 노부카츠가 정2위 나이다이진內大臣 /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종2위 곤다이나곤이란 식으로 관위에 따른 등급매기기가 행해지며, 히데요시를 Top로 삼은 다이묘 편성 원칙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츠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히데요시에게 책잡혀 몰락하기 전까진 그래도 50만 석은 훌쩍 넘기는 다이묘였다.


  또 하나의 특징이라면 '칸토関東ㆍ오쿠奥 양 지방 소부지레이惣無事令' 발포發布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난, 칸파쿠로서의 논리를 전면에 내걸고 다이묘들을 지배하려 한 점이다.

  이 '칸토ㆍ오쿠 양 지방 소부지레이' 라는 건, 현존하는 문서를 통해 보면 텐쇼 15년(1587) 12월 3일에 발포되었다. '소부지레이' "다툼이 없다" 는 의미로, 사적인 전투를 금지한다는 명령으로 위치지어진다. 즉 히데요시는 "칸파쿠로서의 권한에 의거해 앞으로 칸토関東 / 데와出羽 / 무츠陸奥 지방에서의 사적 전투를 금지한다." 고 선언한 것이다. 칸파쿠의 논리를 앞세워 전국지배에 나서겠다는 말이 된다.


출처 : 오와다 테츠오小和田哲男,《日本の歴史がわかる本 室町ㆍ戰國 ~ 江戶時代 篇》
p.128 ~ 136. 三笠書房, 1991.
 

덧글

  • 하니와 2018/01/13 22:54 # 삭제 답글

    누가봐도 원평등귤에 안들어가는 수길이로선 다른 선택의 여지가 ..
  • 3인칭관찰자 2018/01/13 23:34 #

    일단 칸파쿠가 되기 위해선 후지와라 집안에 들어가야 했지만 칸파쿠가 된 후엔 마음이 변했을 거라 추측해봅니다. 말씀대로 누가 봐도 그 출신이 뻔한 히데요시가 후지와라 집안에 들어가봤자 가문 성골진골들에게 진심으로 받아들여질 리도 만무했을 테니..
  • 진냥 2018/01/14 00:53 # 답글

    특정 성씨만이 어느 역할을 역임할 수 있다니 일본 공가의 논리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더욱 이해되지 않는 바는 그 논리가 아직도 일본 천황 가문에 조금은 남아있다는 것이지만요...ㅠㅠ
  • 3인칭관찰자 2018/01/14 09:52 #

    공가들 집단이 헤이안 말기 이래 그 가문들의 지위가 거의 고착화되다시피 하여(예외가 없는 건 아니지만요) 그야말로 고인물 상태로 메이지 유신까지 이어졌던 만큼 가문의 격식 같은 문제엔 대단히 민감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뭐 그러면서도 헤이시인 오다 노부나가에게 혼노사의 변 직전 쇼군 내지 칸파쿠 취임을 요청했던 걸 보면 그런 관례도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서는 부정할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만.

    이 글과는 관계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헤이세이 텐노의 양위문제가 진척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텐노의 가문과 그들을 둘러싼 일본의 여론은 지금도 대단히 보수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 Hyth 2018/01/14 12:53 # 답글

    '평수길' '원가강'이 나온 이유를 알겠네요(...) 그렇다면 만약 노부나가가 겐페이 교대사상을 믿지 않고 그대로 밀고 갔으면 (나머지 둘은 믿었다는 전제에서) 히데요시가 '원수길'이 되고 이에야스가 '평가강'이 될수도 있던 거군요;;
  • 3인칭관찰자 2018/01/14 14:03 #

    겐페이 교대사상을 믿지 않은 노부나가가 등원신장으로 죽었다면 교대사상을 믿는 히데요시는 좀 더 자유롭게 원수길이 될 수도 있고 평수길이 될 수도 있었겠죠.

    단지 노부나가를 계승하는 입장인 히데요시로선 노부나가가 멸망시킨 이전 정권(무로마치 막부)이나 노부나가를 죽인 아케치 미츠히데가 모두 원씨였기 때문에 이 경우에도 아마 평수길을 쓰다 등원->풍신으로 갔을 확률이 더 높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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