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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토리 시소] 쿠로후네 내항黒船来航 아오조라문고


  이 포스트는 쇼와 시대 초중기 일본에서 마르크스주의 계열 (강좌파) 역사학자로 활약하신 故 핫토리 시소(服部之総, 1901~1956) 교수님이 1953년 7월에 집필하셨던,〈쿠로후네 내항〉이라는 토막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원문이 쓰여진 지 65년, 저자분이 돌아가신지 62년이 지난 지금의 눈으로 보기엔 이러저러한 면에서 낡았다는 느낌은 부정할 수 없으므로, 이를 감안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중국 제패의 발판으로서

  아편전쟁(阿片戦争, 1840~42)으로 중국이 개국開國한 후에는, 이제 극동의 일각을 이루는 일본을 개국시킴으로써 옛 문명국들을 자본주의 세계에 개방하는 사업은 완성을 맞게 된다.(역주 : 조선은? 이라고 묻고 싶지만..) 그렇기에 난징 조약南京条約 이후 다음 차례는 일본이 된다는 건 영국イギリス을 필두로 하는 자본주의 열강만의 상식이었던 게 아니라, 일본에게도 상식과 같았다. 그리고 찾아올 손님들이 어떠한 성질의 손님인가는 인도와 중국을 개국시킨 실상을 직시하였던 일본의 애국자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하야시 시헤이林子平는《카이코쿠헤이단海国兵談》을 출간하였고, 하시모토 사나이橋本左内는 일본이 "제 2의 인도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아편전쟁 당시 청나라의 정크선이 파괴당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당시의 자본주의는 무역제일주의貿易第一主義를 신봉하는 자유경제自由経済의 전성시대로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청년기였는데, 사실 이것도 인도나 중국을 상대로 한 식민지화 전쟁植民地化の戦争, 그리고 그 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불평등조약不平等条約과, 그 불평등조약에 의해 보장된 부당한 이윤에 의해 선진국으로서의 지위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어째서 미국アメリカ이 가장 먼저 선수를 쳐 일본을 개국시켰는가인데,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중국과의 무역에서 영국을 앞지르기 위한 발판으로서 일본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신흥국인 미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도 점점 영국을 따라잡으려 하고 있었다. 1848년이라면 부르주아 혁명ブルジョア革命의 파도가 서유럽을 강타한 때이며, 산업혁명産業革命으로 인해 증기선蒸汽船과 철도鉄道가 실용화된 시대였다. 페리는 종래의 전통에 고집하지 않고, 세계를 앞지르는 최신 기술을 가지고서 미국 해군을 증기선 해군으로 만들어냈다.

요코하마에 상륙하는 페리 제독 일행을 그린 석판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증기선 항로를 통해 중국에 갈 수 있게 되었으므로, 對 중국무역에서 영국을 꺾을 수 있다는 계산이 세워졌다. 그러나 당시의 유치한 기술력으로는 그 도중에 석탄을 보급할 기항지가 반드시 필요했다. 결국 앞에서 언급했듯 중국무역에서 영국을 꺾기 위해선 미국은 일본을 개국시켜야만 했다. 그렇기에 페리는 가장 먼저 오키나와로 가서 나하那覇를 근거지로 삼아 오가사와라小笠原 제도로 갔고, 치치시마父島에서 석탄 저장소로 삼을 토지까지 구입해놓은 후 일본이 개국하지 않으면 치치시마 내지는 오키나와를 중개지로 삼아 상하이上海에서 무역을 하려고 생각하였다. 이번의 태평양전쟁太平洋戦争에서 미국이 먼저 오키나와를 함락시키고, 뒤이어 일본 본토로 향하게 된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점이다.


  개국파와 양이파

  태평스런 잠을 깨게 한 쿠로후네의 내항은 일본 국내에서 개국파開国派와 양이파攘夷派의 항쟁으로 발전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런데 같은 개국파이고, 같은 양이파인데도 그들은 각자 두 종류로 다시 갈라졌다.

  개국파의 일각으론 이이 다이로(井伊大老, 나오스케直弼) 일파가 존재했다. 나라의 문을 열면 고루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속으론 알면서도 한때의 권세나마 유지하려던 개국파였다. 다른 한 쪽은 진정한 의미의 개국파로, 옛날의 안도 쇼에키安藤昌益 /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부터 시작하여 와타나베 카잔渡辺崋山 / 타카노 쵸에이高野長英를 거쳐, 페리 내항 당시에는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 / 하시모토 사나이들이 그 대표주자였다. 이쪽 사람들은 세계의 변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서, 우국지정憂国の至情에 기반하여 개국을 주장한 애국자들이었다. 그렇기에 당시 권력으로부터 격렬한 탄압을 받았다.

사쿠마 쇼잔의 생전 사진. 동시대 일본에선 제일가는 서양학자였다.(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양이파들도 봉건지배자들의 양이 / 인민의 양이 두 갈래가 존재했다. 전자 쪽이라면 나마무기生麥에서 사츠마의 무사가 영국인을 참살한 속칭 "나마무기 사건
生麦事件" 으로 대표되는 쪽이고, 후자로는 쓰시마 섬對馬島이 점령당했을 때 끝까지 (러시아 군에게) 저항한 쓰시마 주민들이 있었다. 민간 출신으로 양이에 참가한 자로는 키슈紀州의 하마구치 고료浜口梧陵 / 오와리尾張의 하야시 킨베에林金兵衛 내지는 텐구도天狗党에 가담하려 했던 코우노 히로나카河野広中, 그들 외에도 다수가 분큐 년간(1861~63)에 이루어진 과격 양이 결행파들에게 가담해 있었다. 무사가 아닌, 당시 인민들의 생산력을 대변하는 젊은 부르주아지들의 양이가 후자를 대표한다 할 수 있다. 이들 네 가지 파벌이 부딪혀가면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향해 역사는 진보하였다.


  해묵은 야망

  선수를 쳐서 일본을 개국시킨 미국이 그 직후에 발발한 남북전쟁
南北戦争에 손이 묶여있는 사이에 일본무역의 과실은 영국의 품으로 돌아갔다. 이윽고 일본에서도 메이지 유신이라는 변혁이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막부 vs 영국의 지지를 받는 텐노天皇 양 파벌의 - 봉건적 동일계급들 간에 벌어진 - 권력쟁탈전이라는 형태를 띠면서, 혁명이 아닌 일종의 개혁이 행해지게 되었다.

남북전쟁의 시작을 알린 남군의 샘터 요새 포격(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그러나 미국은 일본을 수로 안내인으로 삼아 아시아로 진출하려는 해묵은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점차 다가왔다. 그 최초의 발로는 그랜트 장군의 "류큐 문제 알선" 건으로, 대만 정벌
台湾征伐 이래 반목하고 있던 일본과 중국 사이에 미국이 중재자仲裁者로서 등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조선 문제에선 일본을 수로 안내인으로 삼아 영국에 대항했다. 무츠 무네미츠陸奥宗光가 펼친 외교가 불평등조약 개정不平等条約の改正을 성사시킬 수 있었던 비결은, 이러한 영국과 미국의 대립과 경쟁을 교묘히 이용했다는 점에 있었다.


  제 2의 개국

  100년간의 꿍꿍이를 100년이 된 해에 실현시킨 것이라 해야 할까. 그것이【 샌프란시스코 조약
サンフランシスコ条約 】이고,【 미일 안전보장조약日米安全保障条約 】이고,【 행정협정行政協定 】이고, 또 이번에 비준되려 하는【 미일 통상 항해조약日米通商航海条約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00년 전 쿠로후네가 찾아왔을 때, 우리들의 조상은 조국의 독립이 위태로워졌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아챘다. 텐노 존숭尊王과 결부지어진 탓에 일그러진 형태로 드러나긴 했으나, 이는 반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 저항하였던 애국적 본능의 발현이었다. 그리고 100년 후 지금 "제 2의 개국" 을 맞아, 일부 지사들에 국한하지 않고 일본 국민의 최대 다수 계급인 노동자 / 농민 / 민족자본가 / 인텔리겐치아들이 일어서서 100년 전의 걱정과 울분을 백 배로 증폭시켜도 부족함이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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