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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의 진》토요토미 제장諸將 인물열전 (3) 역사



  이 글은 2015년 8월에 출간된 신인물문고新人物文庫 353《여기까지 알아냈다! 오사카 전쟁과 토요토미 히데요리ここまでわかった! 大坂の陣と豊臣秀頼에 수록된〈오사카 전쟁 무장열전 - 토요토미 측의 제장〉(p.194~213)을 번역한 글로, 필자는 토쿠가와 뮤지엄徳川ミュージアム 소속 연구원이신 호리 토모히로堀智博 님입니다. 위 책은 현재 종이책, 그리고 아마존 킨들 등의 전자서적을 통해 일본에서 판매되고 있는 책입니다. 가능한 한 필요한 부분만 번역하겠으며, 절대로 배포나 불법공유 목적으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 명확히 하겠습니다.


  <호리 토모히로堀智博>

  1979년 기후 현岐阜県에서 출생. 토쿠가와 뮤지엄 연구원. 논문으로〈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와 오사카 전쟁〉(야마모토 히로후미山本博文 / 호리 신堀新 / 소네 유우지 編《거짓된 히데요시 상像을 때려부순다》, 카시와쇼보柏書房) 등이 있다.

  ※ ①은 생몰년 ②는 출신 ③은 오사카 전쟁 시기의 신분ㆍ코쿠다카石高


  ◆ 키타 노부카게北信景

  ① 텐쇼 3년(1575) ~ 겐나 원년(1615)
  ② 사쿠라바 씨桜庭氏
  ③ (前) 하나마키 성주花巻城主

  키타 노부카게는 사쿠라바 미츠야스桜庭光康의 친아들이나, 자식이 없었던 키타 노부카네北信愛에게 양자로 보내져 케이쵸 13년(1608)에 가문을 상속, 하나마키 성주가 되었다. 노부카게는 금광 행정관金山奉行도 겸임하고 있었기에 자금사정은 풍부했다 한다.

  이후로도 노부카게의 지위는 안온했으리라 생각되나, 케이쵸 19년(1614)에 주군 난부 노부나오南部信直와 분쟁을 일으키고 난부 가문을 퇴거해버렸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오사카 성에 입성하였다.

  오사카 입성 당시 노부카게는 그 풍부한 자금력을 이용하여 활 500자루와 화살 1만 개를 장만, 토요토미 히데요리에게 헌상하였다고 한다.(쿠도 토시요시工藤利悦,《유우세이시키祐清私記를 읽는다》) 노부카게는 오사카가 함락된 후 이윽고 이세 마츠자카伊勢松坂에서 포박당했고, 그 신병은 옛 주군 난부 노부나오에게 인도되어 참수형에 처해졌다.


  ◆ 고토 마타베에 모토츠구後藤又兵衛基次

  ① 에이로쿠 3년(1560) ~ 케이쵸 20년(1615) 5월 6일
  ② 하리마 고토 씨播磨後藤氏
  ③ (前) 치쿠젠 마스토미 성주筑前益富城主. 1만 6천 석

  고토 마타베에 모토츠구라 하면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郎의 소설《거지 대장乞食大将》의 주인공으로, 지명도 높은 인물이다. 마타베에는 어린 시절부터 쿠로다 요시타카黒田孝高 / 나가마사長政 부자를 섬기며 두터운 신뢰를 얻었고, 케이쵸 5년(1600)에 쿠로다 가문이 치쿠젠 지방筑前国을 배령拜領 받았을 때는 1만 6천 석이라는 많은 녹을 받으며 접경지대 요충지를 위임받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마타베에는 쿠로다 가문을 뛰쳐나가고 만다. 그 이유는, 쿠로다 가문과 인연을 끊은 사이였던 호소카와 가문細川家과 친하게 교제한 것을 문책받았기 때문이라 한다. 분노를 삭이지 못한 나가마사는 이후로도 마타베에를 집요하게 추적하여 그가 가는 곳마다 재취업을 방해하였다. 이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된 마타베에는, 토요토미 측의 초빙에 응하여 오사카로 입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후쿠다 치즈루福田千鶴,《집안 소동御家騒動》) 그 후 마타베에는 오사카 도묘지 전투道明寺の戦い에서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부대와 충돌, 덧없이 목숨을 잃게 된다.


  ◆ 사이토 카에몬斎藤加右衛門

  ① 텐쇼 10년(1586) ~ 케이안 3년(1650)
  ② 에치젠 사이토 씨越前齋藤氏
  ③ (前) 사누키 지방 통치자讃岐国主 이코마 치카마사生駒親正의 시동

  사이토 카에몬은 오사카 전쟁 당시엔 키무라 시게나리 부대에서 활약하였고, 전후에는 오카야마 번 이케다 가문岡山藩池田家을 섬겼다. 그러나 쇼호 원년(1644)에 이르러, 동료인 쿠사카 고로에몬草加五郞右衛門을 상대로 분쟁을 일으킨다.

  다툼의 내용은 오사카 전쟁 당시 어느 쪽의 무공이 우월했는가 하는 점으로, 쿠사카 역시 과거에는 시게나리의 산하에서 활동하였었다. 두 사람 모두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기에 결국 번주藩主 이케다 미츠마사池田光政가 직접 재판을 하게 되었다. 다음 해 내려진 판결은 사이토 측의 주장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그(=사이토)의 신병을 유폐하라는 죄과를 매기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일방적 처분이 내려진 건, 사이토가 증거물을 위조한 것이 들통났기 때문이었다.

  위와 같은 죄를 범해서라도 무공을 주장하려 한 사이토의 모습에서, 당시 무사들의 높은 명예의식을 엿볼 수 있다.


  ◆ 타카마츠 히사시게高松久重

  ① 생년월일ㆍ사망연월일 미상
  ② 사누키 타카마츠 씨讃岐高松氏
  ③ (前) 사누키 키오카讃岐喜岡 성주

  타카마츠 히사시게는 이마후쿠 전투今福の戦い 당시 키무라 시게나리 부대의 일원으로 사타케 요시노부佐竹義宣 군에 돌입, 이치방야리(一番槍, 역주 : 전투에서 가장 먼저 적진으로 돌입하는 무훈)를 기록하는 공적을 세웠다. 이후 히사시게는 오사카가 함락된 후에도 살아남아, 로닌浪人으로 신분을 위장한 채 다른 다이묘 가문을 섬기기 위한 구직활동에 열심이었다.

  그 과정에서 히사시게는, 이마후쿠 전투에서 적대하였던 토무라 요시쿠니(戸村義国, 사타케 가문의 중신重臣)에게 자신이 이치방야리를 거둔 데 대해 증명을 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때로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로부터 감사장을 하사받았다, 는 있지도 않은 경력까지 사칭해가면서, 무공武功을 보다 아름답게 가다듬기 위한 선전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노력이 성과를 거두었던지 쇼호 2년(1645)에 그는 쿠와나 마츠다이라 가문桑名松平家에 등용되어, 가로家老 신분으로 2,500석이라는 많은 녹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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