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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 료타로] 미국의 검객 모리 토라오森寅雄 (下) 역사



  이 글은 故 시바 료타로 씨의 역사 에세이집인《여담으로》의 7 ~ 15쪽에 수록된〈미국의 검객 - 모리 토라오의 사력事歷〉을 번역한 포스트입니다.


  -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미국에 도착하긴 했으나, 딱히 취직할 자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오렌지 농원에서 농부로 일했다.

  그 후, 온갖 직업을 전전했다. 양봉업자養蜂業者 밑에서도 일했던 듯하다. 그러던 와중에도 검술 외에 지닌 기술技術이 없던 이 천재는, 일본의 검술을 잊지 않기 위하여 스승도 대련상대도 없이 몽둥이를 깎아 목도木刀를 만들고, 농원 구석에서 이를 휘두르며 은밀히 검법을 연구했다.

  백인 친구인 다니엘 선이라는 친절한 남자와 알게 된 것이 그의 인생의 변곡점이 되었다.

  "미국에도 비슷한 게 있지. 펜싱이라는 거야." 라고 선은 가르쳐주었다.

  가르쳐주었을 뿐만 아니라, 선은 이 일본인 검술가를 LA의 펜싱 클럽으로 데리고 갔다.

  견학하는 동안에 실제로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 그의 입장에선 지극히 기묘한 형태와 기능을 지녔을 사벨을 빌려 손에 쥐어 보았다. 휘둘러보니 낚시대처럼 탄력이 있었다. 바로 거기서 클럽 간부와 시합을 가졌다. 5판 승부였는데, 전패하고 말았다.

  "앗" 하는 사이에 5판 모두를 내준 참담한 패배로, 어디를 어떻게 찔러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건 찌르는 거야. 베려 하면 안 돼." 라고 선이 호들갑스럽게 가르쳐주었던 것 보면, 토라오는 상대 선수를 베어버리려 했던 건지도 모른다. 선은 가난한 모리 토라오를 위해 펜싱 도구 한 벌을 맞춰 주었다.

펜싱시범을 보이는 모리 토라오의 만년 사진.


  토라오는 연구를 해 보았다. 펜싱이란 건 (일본) 검술에서 말하는 '찌르기突き' 와도 다른 것 같았다. 검술의 찌르기는 선線에서 점点으로 변화하였다가 다시 선으로 돌아오는 변환과 유동의 움직임이나, 펜싱 쪽은 단순히 점(칼 끝)이 점이 되는 운동과 비슷하다. 그렇게 이해를 하고 다시 자기 식대로 연습을 해 보았다. 그리고 다시 클럽을 찾아가 이전에 자신을 참패시켰던 상대에게 재도전하여, 이번에는 완벽하게 승리를 거두고 5판 모두를 따내었다.

  깜빡하고 적지 않았으나, 다니엘 선은 양봉업자였다. 이 시기 토라오는 그의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야산에서 벌집을 키우는 한편으로 그는 입문서手引書를 읽으며 펜싱을 공부했다. 1년 후, 다시 한 번 LA의 클럽(YMCA 도장)에 가서 그 클럽의 최강회원 6명을 소개받아 그들과 각기 세 판 시합을 가졌다. 이번에는 그도 연구를 해 놓았다. 일본검술의 기술을 그 나름대로 펜싱에 접목시켜, 검술에서 말하는 '수세受け' 상태로 상대를 끌어들인 후 찌르기를 시도했다. 그 결과, 단 한 판도 내주지 않고 6명 모두에게 승리했다. 6명 모두와 세 판을 겨루었으니 18연승을 거둔 셈으로, 이 클럽이 생긴 이래 최고기록이었다. 이 사건은 그를 이 분야에서 유명하게 만들었다.

  필자의 손에 정확한 자료가 없어 그 해였는지 다음 해였는지는 모르지만(역주 : 1938년), 토라오는 LA 선수권 대회에 출장해 우승優勝을 거두었고, 이어서 전미 선수권 대회에 나가 우승(역주 : 실제로는 준우승準優勝)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지 고작 2년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토라오의 '토라寅'를 딴【 타이거 모리Tiger Mori 】라는 별명은 미국의 펜싱계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고, 쇼와 11년(1936)에 열린 베를린 올림픽에서 그는 미국의 펜싱 팀으로부터 비공식 코치가 되어줄 것을 제안받기까지 했다.(역주 : 시바 씨의 고증오류 1. 실제로는 1940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들어온 제의였다)

마츠다 나오마사松田尚正가 그리고, 코단샤에서 출간《타이거 모리라 불린 남자》만화판.
토라오의 일생을 다룬 만화로, 하야세 토시유키早瀬利之가 쓴 동명의 평전을 베이스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났다. 쇼와 16년(1941) 이후로는 수용소에서 지냈다. 콜로라도 주의 수용소에 입소해 있었다. 이 수용소 생활은 그가 동 / 서양 쌍방의 검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역주 : 시바 씨의 고증오류 2. 모리 토라오는 1938년 일본으로 귀환하였기에, 일본인 수용소에 갇힌 적은 없다. 그는 이후 11년 동안 일본을 무대로 활동한다.)

  "나는 미국으로 건너와, 술術을 떠났다. 그러나 술을 떠나자, 도道을 알게 되었다." 고 만년에 자주 언급하곤 하던 그의 '개안開眼'은 이 시기에 이루어졌던 듯하다.

  "펜싱은 이기기 위한 기술이다. 그러나 검도劍道는 스스로를 단련하기 위한 기술이다."

  이하의 말도 그가 한 말이다.

  "나는 일본에 한을 품고 있다. 그러나 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내가 일본인이라는 게 통절히 와 닿았다."

  "나는 미국에 온 일본인으로서 고독함을 알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무사도武士道를 알게 되었다. 그때 그대로 일본에 있었다면 무사도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평생 몰랐을지도 모른다."

  전쟁이 끝났다. 전쟁 전도 그러했지만, 전쟁 후의 그의 삶도 풍족하지 않았다. 증권 / 보험 세일즈맨으로 일하고, 일본인 모임의 사무를 맡기도 하면서 생활자금을 벌었다.

  그는 패전한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본인이 알던) '일본은 이미 사라졌다.' 고 통절히 생각하게 되었다.(역주 : 시바 씨의 고증오류 3. 토라오는 태평양전쟁 시기엔 일본에 있었고, 패전 4년 후인 1949년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가기 전까진 일본에서만 활동했다.)

  일본이 사라진 이상, 그는 자기 스스로가 일본이 되어보려 했다. 그러기 위해선 검도劍道를 연구하여 이를 후세에 남기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그는 이를 미국에서 펼쳐보려고 결심했다.

검도시범을 보이는 모리 토라오의 만년 사진.


【 미국 검도연맹 】이라는 것을 설립하여, 그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가 일본계 미국인으로서 지닌 유일한 직함이 이것이었다. 일본검도에만 전념하려 했으나 미국 펜싱계는 그를 버리지 않았고, 로마 올림픽 때 그는 미국 펜싱 팀의 정식 코치로 위촉되어, 성실한 그는 이를 받아들여 선수단을 이끌고 로마로 향했다.(역주 : 모리 토라오는 1960년 로마 올림픽 / 1964년 도쿄 올림픽 /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이상 세 번에 걸쳐 미국 펜싱 팀의 정식 코치로 활약했다.)

  그 후, 검도와 펜싱을 가르치기 위한 도장을 LA에 차리고, 양가養家의 성을 따서【 노마 도장Noma fencing school 】이란 이름을 붙였다.

  모리 토라오는 관계자들이 보기엔 대단히 느닷없다 생각되는 죽음을 맞았다.

  1969년 1월 8일 밤 10시, LA에 있는 자기 도장에서 문인門人들에게 거합술居合術을 가르치기 위해 칼을 뽑아든 그 순간, 불쑥 찾아온 심근경색心筋梗塞이 그에게서 생명을 빼앗아갔다. 그는 칼을 뽑은 자세 그대로 쓰러졌다. 허겁지겁 달려온 의사의 말에 따르면, 한쪽 볼에 미소를 지은 채로 세상을 떴다고 한다. 향년 54세. 그의 생애는 심히 고난으로 가득한 것이었음에도, 최후가 찾아온 순간에 그 자신은 만족스러운 점수를 스스로에게 매겼을지도 모르겠다.

  고별식告別式은 같은 달 15일, LA의 고야 산 홀에서 불교식으로 치뤄졌다. 상주는 아내 테이코貞子, 라고 1월 12일자 요미우리신문 부고란에 자그맣게 실려 있었다.


덧글

  • 차가운 도시남자 2017/12/21 23:17 # 답글

    검객다운 최후군요. 중세일본인이었으면 어느날 갑자기 진켄쇼부를 하다가 죽을 운명이었나 봅니다.
  • 3인칭관찰자 2017/12/22 08:58 #

    칼을 뽑은 채로 세상을 떠났으니 검객으로선 극적인 최후라 할 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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