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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 료타로] 미국의 검객 모리 토라오森寅雄 (上) 역사



  이 글은 故 시바 료타로 씨의 역사 에세이집인《여담으로》의 7 ~ 15쪽에 수록된〈미국의 검객 - 모리 토라오의 사력事歷〉을 번역한 포스트입니다.


  - 그 어떠한 명인名人이라도, 패배할 때가 있는 법이다.

  검술劍術이라는 건 원래 그런 것으로, 절대강자絶對强者는 있을 수 없다 여겨진다. 그때그때의 몸상태와 상대의 실력, 그리고 상대방과 본인이 어떻게 나서느냐에 따라 일순간에 승부가 갈리므로,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100년에 한 번쯤은 절대강자에 가까운 명수名手가 나온다. 명수 내지 명인이라고 해도 검술이라는 건 기록성이 명확치 않은 경우가 많지만, 명백한 기록이 남은 사례들 속에서 근래 반 세기에 한해 살펴본다면 쇼와 8년(1933)의【 쇼와 천람시합昭和天覽試合 】에서 노마 히사시野間恒 선수가 그런 희귀한 기록을 남긴 바 있다.

'쇼와의 대검사昭和の大劍士'라 불리던 노마 히사시.
(지금도 건재한) 출판사 코단샤講談社의 2대 사장이기도 했다.


  승부는 3판 2선승제였는데, 노마의 기록을 보면 도쿄 부東京府 예선 단계에서부터 한 판도 내주지 않고 승리를 거듭하였고, 본 시합에 들어서 각 부 / 현의 대표들과 시합을 벌일 때도 그 실력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최종시합에서 카가와 현香川県 대표로 역이도逆二刀를 구사하는 후지모토 카오루(藤本薰, 역주 : 태평양전쟁 때 징집되어, 1942년 버마 전선에서 전사戰死)와 만나, 오른손에 쥔 소도小刀를 조리용 젓가락처럼 곁들여 사용하던 후지모토의 난검難劍에 휘말려 처음으로 우측 몸통을 맞고 한 판을 내줬다. 그러나 즉각 반격에 나서 몸통을 / 다음엔 얼굴을 때려 두 판을 가져와 노마의 전국우승이 결정되었는데, 예선에서부터 결승까지의 성적표를 보면, 과연 현실에서 이 정도의 강자가 존재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만한 기록이었다.

  첨언하자면 이 노마 히사시는 코단샤講談社의 창시자 노마 세이지野間淸治의 외동아들이었는데, 애석하게도 이 시합 이후 몇 년 지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코단샤 창업자이자 일제시대 일본 검도계의 거대 패트런이었던 노마 세이지.
모리 토라오의 외가쪽 큰아버지로 기실 토라오와 혈연지간이었다.


  "정말로 희귀한 기록이군요." 라면서 10년 정도 전, 노마 히사시의 소년시대부터 그를 잘 알고 지냈던 검도가劍道家 R씨에게 이야기를 하여 화제를 끌어내보려 한 적이 있다. "그렇지요." 하면서 R씨는 수긍했으나, 뭔가 탐탁찮은 표정을 짓다가 이윽고, "그 노마 히사시보다 더 강한 자가 있었어요. 사정이 있어 천람시합에는 출장하지 못했지만." 이라 말씀하셨다.

  "히사시 씨의 사촌이지요."

  "이름 말씀입니까? 노마 토라오野間寅雄였죠." 라며 R씨는 토라오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노검객老劍客답지 않게 정열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토라오에게는 다소 사정이 존재했다. 노마 가문에 입적하여 그 성씨를 쓰긴 했으나, 양아버지 세이지 옹의 혈연은 아니다. 본래는 모리森 성을 쓰다 소년 시절 노마 가문에 거두어져, 어머니 쪽 핏줄을 통해 사촌관계였던 히사시와 함께 자랐다. 노마 가문의 도장에서 두 사람 모두 소년 때부터 검술을 배웠다. 둘 다 검술교사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재능을 타고났다고 하는데, 어쩌면 유전에 따른 것인지도 모른다.

  막부 말기, 아이즈 마츠다이라 가문(会津松平家, 역주 : 아이즈와카마츠 23만 석)의 지번支藩인 이이노 번(飯野藩, 역주 : 호시나 가문保科家, 2만 석)에서 검술지도사劍術指南役를 맡고 있던 모리 요조森要藏라는 검객이 있었다. 요조는 젊은 시절 에도로 나와 치바 슈사쿠千葉周作 문하에 들어가, 이윽고【 치바 4천왕 】의 일원으로 꼽힐 정도의 명인으로 거듭난 후, 번으로 돌아갔다. 막부 말기 사람답지 않게 수염을 길러, 그 턱수염은 가슴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 관우식 수염이 하얘지기 시작할 무렵에 막부幕府가 와해되었고, 보신전쟁戊辰戰爭이 시작되었다.
호쿠신잇토류北辰一刀流의 창시자로 유명한 검객 치바 슈사쿠


  모리 요조는 온화한 인물로, 시세時勢와는 그다지 인연이 없었다. 그러나 아이즈 지번의 사무라이인만큼 당연히 對 삿쵸 항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어갔고, 보신전쟁 최대의 비극이라 불리는 아이즈와카마츠 성会津若松城 농성전에 참가했다. 그는 지번의 병력을 이끌고, 막 농성전이 시작되었을 무렵 성 외곽의 라이진 산雷神山이라는 산의 수비대장이 되었다.

  관군官軍의 대장은 토슈(土州, 역주 : 토사土佐 24만 석. 야마우치 가문山內家)의 이타가키 타이스케坂垣退助였다. 그들은 라이진 산을 포위한 후 산기슭에서 산 위를 향해 대포를 쏘아대고, 이어서 대규모 총격을 가해왔기에, 그 포연이 산중턱을 기어올라와 소나무가지 끄트머리만이 겨우 보일 정도로 시야가 흐려졌다. 이 총격과 포격에 의해 모리 요조는 대원들 중 태반을 잃었고, 그 후 공격해 들어오는 관군에 맞서 산 위에서 달려 내려가 참격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말년의 이타가키 타이스케를 도안으로 사용한, 미군정 시절에 발행된 50전짜리 지폐.
(정치가로서의 능력 여부는 별개로) 그가 자유민권운동의 거두였던 관계상 채용된 듯하다.


  그 선두에는 언제나 요조와 그 아들 토라오(寅雄, 앞에서 언급된 토라오와 이름이 같다)가 서 있었다. 모리 토라오는 아직 15~16세 정도의 소년으로, 흰색 진바오리陣羽織 상의에 요시츠네하카마義経袴 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버지 요조가 위태로워지면 아들 토라오가 달려오고, 아들이 포위당하면 아버지가 달려와 그 포위를 깨뜨려주었는데, 산기슭에서 두 사람의 운동을 지켜보니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고 이타가키 타이스케는 훗날 술회하였다. 이타가키는 총격을 중지시켜 최소한 저 부자가 총탄을 맞고 죽는 것만은 모면케해주려 하였으나, 얼마 지나지도 않아 어느 솔뿌리 옆에 관우식 수염을 기른 자와 흰색 진바오리를 입은 자가 엎어진 채, 서로 기대어 죽어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 요조의 딸이 히사시와 (앞에서 언급한) 토라오의 외할머니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은 모리 요조의 피를 물려받게 되었다. 요조는 안세이 년간에 치바 슈사쿠가 세상을 떠난 후, 한동안 칸다 오타마가이케神田お玉ヶ池에 있던 치바 도장의 사정을 봐주던 적이 있었는데, 그는 오케쵸 치바桶町千葉라 불리던 분가 쪽 도장의 사정까지 봐 주었다. 이 분가 쪽 도장의 학생회장塾頭이 바로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였다. 필자는 료마에 대해 조사하던 도중에 모리 요조에 대해서도 알아본 적이 있었다. 모리 요조 / 토라오가 분전하던 광경은 야마카와 켄지로山川健次郎도 목격하였다고 한다.

고학까지 해가며 1875년 미국 예일대학 학위를 받았던 야마카와 켄지로의 젊은 시절 사진.
보신전쟁 당시 뱟코다이白虎隊에서 제외되어 살아남았기에 평생 부채의식을 지고 살았다.


  야마카와 켄지로라는 사람은 아이즈 번 무사의 아들로, 처음에는 뱟코다이白虎隊에 참가하였다가 연령제한에 미달한다는 이유로 소집해제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훗날, 도쿄 제국대학東京帝国大学 제 4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야마카와는 모리 요조 부자의 이야기를 할 때면 항상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노마 도장에서 수련을 쌓고 있던 시기엔 토라오 쪽이 히사시보다 조금 더 강했습니다." 고 R씨는 말씀하셨다. 어느 쪽이 강했든간에【 쇼와 천람시합 】당시의 도쿄 부에선, 이 두 사람이 뭇 사람들을 압도하는 최강자였다고 한다. 우선 도쿄 부 예선에 출전하게 되었다. 토라오 역시 출전했다. 히사시와 토라오 모두 승리를 거듭하여 결국 최종결전에서 맞붙었는데, 의외로 토라오가 두 판 모두를 내주면서 패배, 실격하였다.

  검술에 절대강자는 없다고 하지만, "두 판이나 내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라고 R씨는 회고하였다. 승리를 양보하였다는 말도 있으나,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그 후, 토라오는 노마 가문을 떠났다. 모리森 성으로 돌아와 '모리 토라오森寅雄' 로 개명했다. 아이즈 성 밖 라이진 산에서 죽은 - 두 사촌형제들에게는 큰 숙부가 되는 - 토라오 소년과 동성동명同姓同名이 된 것이다. 애초부터 "라이진 산의 토라오를 닮거라." 라는 의미에서 부모가 그 이름을 지어줬던 듯하니. 모리 토라오는 이와 동시에 일본에서 탈출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쇼와 9년(1934)의 일이었다. 모리 토라오의 연령은, 20세를 2~3살 넘긴 상태였다.



덧글

  • 차가운 도시남자 2017/12/19 23:28 # 답글

    딱 재미있어 지는 참에 끝나서 아쉽습니다. ^^
  • 3인칭관찰자 2017/12/20 09:32 #

    본의 아니게 끊기신공이.. ㅎㅎ 하편은 내일 포스팅하려 하니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피즈 2017/12/20 07:40 # 삭제 답글

    젤다의전설 브래스오브와일드 공략 잘 보고있습니다 ㅠㅠ 앞으로 더 계획 없는건가요?
  • 3인칭관찰자 2017/12/20 09:32 #

    사람을 잘못 찾으신 것 같습니다. 저는 야숨 공략은 커녕 닌텐도 스위치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 파파라치 2017/12/20 10:33 # 답글

    요조-토라오 부자의 일화는 동 저자가 쓴 "료마가 간다"에도 들어가 있던게 생각나는군요.
  • 3인칭관찰자 2017/12/20 15:38 #

    네. 아마 료마가 간다 초반부에 요조-토라오 부자 이야기가 나왔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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