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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 료타로] 소박한 식사粗食 역사

 

  이 글은 故 시바 료타로 씨의 역사 에세이집인《역사의 세계로부터》의 104 ~ 107쪽에 수록된〈소박한 식사粗食〉를 번역한 포스트입니다.


  에토 신페이江藤新平는 사가 번(佐賀藩, 역주 : 나베시마 가문鍋島家 35만 7천 석)의 무사佐賀藩士였다. (메이지明治) 유신維新 이후 사법경(司法卿, 역주 :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에 해당됨)이 되었고, 사가의 난佐賀の乱을 일으켜 죽었다. 그는 아직 도쿄에서 지낼 무렵, 베르츠 박사로부터 치료를 받은 바 있다. (베르츠 박사는) 초진初診 때, 당시 서양 의사의 항례에 따라 환자의 영양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귀하께선 어떤 음식을 드셨습니까?" 라고 통역을 통해 평소에 섭취하는 음식에 대해서 질문했다.

  에토는 정직하게 "2, 3년 전까지만 해도 가난이 골수에 사무쳐, 음식물의 좋고 나쁨을 따질 여유가 없었소. 정어리イワシ 대가리나 뜯는 게 고작이었지." 라고 답했다. 일본의 사법경이 말이다. 통역은 이를 민망히 여겨 에토의 말을 독일어로 전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에, 그저 "평소엔 소박한 식사를 하고 있다." 라고만 통역했다.

철저한 정한론자征韓論者였던 에토 신페이.(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영국 / 프랑스식 삼권분립제 도입을 주장한, 메이지 신정부 내부의 진보적 인사이기도 했다.


  에토는 "정어리 대가리" 라고 말했는데, 이는 형용도, 과장으로 쓰인 단어도 아니었던 듯하다.

  에토와 마찬가지로 사가 번 출신인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남긴 바 있다. 참고로 오오쿠마의 집안은 에토 같은 하급무사 계층과 달리 120석 녹봉을 받아오던 계급으로, 오늘날로 치면 각 부서의 국장급 지위에 취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며 200평짜리 저택에서 기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정이 주식으로 먹던 음식은 고구마サツマ였다.

  "반찬은 호시이와시(역주 : 기름을 짜고 남은 정어리를 말린 것. 논밭에 뿌리는 비료로 소비되는 게 더 일반적이었다) 같은 것들이었지." 라고 오오쿠마는 회고하였다. 생선 대가리도 가시도 허투루 버리는 일이 없었다. 이것들을 잘게 잘라서 소금에 절여 보관한 후, 때때로 꺼내서 시래기(ひば, 무 이파리를 말린 것) 같은 것들과 함께 국을 끓였다.

와세다 대학 설립자로 유명한 오오쿠마 시게노부의 젊은 시절 사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일본 최초의 정당 내각 수상이었고, 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의 일본 수상이기도 했다.


  "그런 식사를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립구만..." 이라고 에토는 앞에서 언급한 베르츠 박사에게 이야기하였다. 물론 이 말도 통역되지 못했다. 만약 통역이 되었다면 베르츠는 깜짝 놀랐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시래기' 라는 무 이파리를 말린 물건이,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식품이 될 수 있다며 베르츠를 납득시키려면, 상당한 수준의 독일어 능력이 필요했음이 틀림없다.

  메이지 이전 각 지방의 일본인이 어떠한 음식을 먹었는지를 조사하는 건, 상당한 곤란을 수반한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경우 코치 성 성하高知城下의 부유한 향토무사鄕士 집안에서 태어났으므로 매 끼니 쌀밥을 먹었음이 분명하나, 같은 토사 번(土佐藩, 역주 : 야마우치 가문山內家 24만 석) 인물이라도 료마의 탈번脫藩을 전후하여 번을 뛰쳐나간 타나카 미츠아키(田中光顕, 훗날 백작이 되었다)는 사가와佐川라는 마을 출신으로, 토사 번의 가로家老인 후카오 씨深尾氏를 섬기는 무사였다. 번의 직속 신하가 아닌 바이신(陪臣, 역주 : 다이묘가 아니라 다이묘의 신하를 섬기는 자)인 셈이다. 번에서 받는 처우는 아시가루足輕만도 못했다. 이 인물은《이신야와維新夜話》라는 속기를 남겼는데,【 쌀밥은 1년에 두 세 번 이상을 먹은 적이 없었고, 1년 내내 보리ㆍ수수ㆍ고구마 같은 걸 밥에다 섞어서 먹었다. 】고 회고하였다.

95세의 천수를 누린 타나카 미츠아키의 중년기 사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이와 같은 시골뜨기 무사들이 번을 뛰쳐나가 여러 지방을 유랑하면서 때로는 쵸슈 번(長州藩, 역주 : 모리 가문毛利家 36만 9천 석)의 신세를 지기도 하고, 때로는 교토京都로 올라가서 무심히 의식衣食을 해결하게 되었는데, 오히려 번을 뛰쳐나간 이후에 그나마 나은 영양섭취를 하였던 듯하다. 예를 들자면 케이오 2년(1866)인가 케이오 3년(1867)이 되자 토사 번은 교토에 낭인단체를 만들었다. 교토 북부 시라카와 마을白河村에 둔영屯營을 차린 리쿠엔타이陸援隊가 바로 그것으로 이를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慎太郎가 주재했는데, 번 저택의 조리사들이 이 부대의 식사를 제공했고, 세 끼 모두 쌀밥이 나왔다. 그러나 그것이 끝으로, 반찬이라고는 (1인당) 단무지 세 쪼가리 뿐이었다.

  에치고 나가오카 번(越後長岡藩, 역주 : 마키노 가문牧野家 7만 4천 석)의 가로家老가 된 카와이 츠기노스케河井継之助는, 에도에서 오랜 서생시대를 보낸 바 있다. 코가 세이리古賀精里의 손자인 코가 긴이치로古賀謹一郎라는 인물이 당시 막부의 반쇼시라베쇼蕃書調所에 출사하는 한편으로 개인학원家塾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츠기노스케는 이 학원의 기숙사寮舍에서 기거하였다. 그 당시 학원에서 배급되던 음식은 반찬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고, 단무지만 제공되었다. 그렇기에 눈치 빠른 자들은 부엌에서 콩을 삶거나, 두부를 사 와서 먹었으나, 츠기노스케는 그렇게 하지 않고 배급된 단무지만으로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고향에서 보내주는 돈이 풍족하였기에, 두 달에 한 번 내지는 두 번, 야나바시柳橋로 행차하여 게이샤芸者들을 끼고 탕진할 때까지 먹고 마셨던 듯하다.

호쿠에츠 전쟁北越戦争을 주도한 카와이 츠기노스케의 사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개틀링포 / 암스트롱포 등 최신예 장비로 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메이지 신정부군을 괴롭혔다.


  이 츠기노스케가 속한 번 무사들의 가정식 중에 '사쿠라메시桜飯' 라는 이름이 붙여진 음식이 있는 듯 하며, 대단히 맛이 있다는 이미지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요약하자면 미소즈케메시{味噌漬飯, 미소(味噌, 일본식 된장)를 가미하여 지은 밥}로, 미소에 절여놓은 무를 잘게 썬 후 밥에다 섞어 짓는다고 하는데, 그 색깔이 벛꽃을 닮았다고 하여 '사쿠라메시' 라 불렸던 것이리라.

  필자는 에치고 지방으로 가서 "미소즈케메시라는 걸 댁에서 지으시는지요?" 라고 만나본 사람들에게 일일이 묻고 다녔으나, 모두가 "사쿠라메시나 미소즈케메시 같은 명칭조차 들어본 적이 없어요." 라며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옛 사족士族 가정의 전유물이었던 게 아닐까요." 라고 말해주신 분도 계셨다.

  카와이 츠기노스케는 이 밥을 좋아하여, 영내를 순시하다 촌주 집에서 묵고 갈 때는 자주 "사쿠라메시를 내 주게." 라는 주문을 했다고 한다. 그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는 영내의 어느 촌주 집안에선, 기일마다 츠기노스케의 초상화 앞에 이 밥을 공양하는 것을 항례로 삼았다고 하는데, 물론 지금에 와서는 전통이 끊겼을 것이다.

  위와 같은 것들이 메이지 이전의 가정식이었는데, 이러한 영양상태 속에서 유신의 에너지가 샘솟았던 건 지금의 영양학으로 보자면 신기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덧글

  • 존다리안 2017/12/02 12:42 # 답글

    일본인들은 에도시대 잘먹고 잘산 건지 못먹고 못산 건지 모르겠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7/12/02 15:26 #

    에도나 오사카 같이 사람과 물류가 집중된 번화한 도시에서는 사람들의 수요에 따라 온갖 음식들이 만들어지고 대중적으로 소비되어 지금엔 일본의 전통요리로 대접받는 음식들이 우수수 발명되었습니다만 시골 쪽으로 들어가면....

    당시 일본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던 농민들은 자신이 일해서 쌀을 수확해도 그걸 잡곡이랑 섞어먹지 않으면 처벌받을 정도였고 각 번들도 일반농민이 사치를 부릴 여유가 생길 정도로 풀어주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사농공상 신분들 중에서 농민이 가장 빈곤했습니다.

    거친 잡곡밥+미소시루+단무지 등의 츠케모노 1~2개 정도를 먹는 게 농민들의 일반적인 한끼 식사였고, 이 글에서 등장한 에토나 타나카 같은 하급무사 출신들의 경우도 녹봉이 물가를 따라가지 못해서 그런지 집안살림이 그런 농민보다도 나을 게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에토의 경우는 메이지 유신 직전까지 2~3년 동안 가택연금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먹는 게 더욱 허접했을
    것 같습니다.
  • 2017/12/02 12:4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12/02 15:5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공손연 2017/12/02 16:55 # 삭제 답글

    일본의 식생활중에 바람직하지 못한것은 반찬을 넉넉히 먹지도 못하면서 현미대신 도정된 백미를 섭취하려드는 것입니다. 한국의 민물 갑각류 생식이라는 문제도 그렇고 옛날사람들이 불필요하게 스스로 건강을 망치는 식습관이 더러있죠.
  • 3인칭관찰자 2017/12/02 20:04 #

    맞습니다. 그런 면에선 몰랐던 게 독이 된 거겠죠.
  • 키키 2017/12/03 17:47 # 답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7/12/03 18:32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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