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故 시바 료타로 씨의 역사 에세이집인《역사의 세계로부터》의 90 ~ 93쪽에 수록된〈에도 천도 비화〉를 번역한 포스트입니다.
사츠마 번(薩摩藩, 역주 : 시마즈 가문島津家. 77만 석)의 오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가 쵸슈(長州, 역주 : 모리 가문毛利家. 36만 9천 석) / 토사(土佐, 역주 : 야마우치 가문山內家, 20만 2천 석) 두 번의 무사들을 끌어들여 왕정복고王政復古에 관해 협의한 건 케이오 3년(1867) 3월 6일이었다.
같은 해 9월 15일, 오오쿠보는 (사츠마) 번의 군함인 토요즈이마루豊瑞丸를 타고 야마구치山口로 급행하여, 막부 토벌 / 신정부 수립에 대한 구체적인 방책을 협의했다. 쵸슈 측에서는 키도 타카요시木戸孝允 / 히로사와 효스케広沢兵介가 참여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오오쿠보 토시미치 사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여기서 비로소 텐노의 행차 건이 논의되었는데, 이는 對 막부 군사행동의 필요에 따라 텐노를 안전한 장소로 옮기게 한다는 데 그쳤고, 천도론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그러나 오오쿠보는 이른 시기부터 오사카 천도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 근거는, 옛날에 (오다織田) 노부나가信長가 오사카 이시야마大坂石山 땅에 눈독을 들였음에도 중도에 살해당해, (토요토미豊臣) 히데요시秀吉가 그 뜻을 이어받아 오사카를 정권의 수도로 삼은 것과 동일한 사상에 기반했다. "그곳이 일본 열도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세토 내해瀬戸内海의 안방과 같은 곳인지라 수운이 편리하여 외국과 절충하는 데 편리하다."는 등의 이유였다.
메이지 원년(1868) 정월, 토바ㆍ후시미 전투에서 막부군을 격퇴한 직후, (오오쿠보는) 이 뜻을 정식 건백서建白書로 만들어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 친왕有栖川宮熾仁親王를 수반으로 삼은 총재부에 상주上奏했다. 물론 쿠게(公家, 역주 : 일본의 조정 귀족)들 대부분은 천 년의 고향인 교토를 버리는 데 감정적인 반대의사를 보였고, 그나마 오오쿠보의 뜻을 지지해준 게 오오쿠보의 맹우盟友인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 정도였다. 소문은 교토 시중에 퍼져 나갔다. "수도를 옮기려는 듯 하다.."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의 젊은 시절 사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그것은 교토 사람들에게는 경천동지할 만한 일이었을 터이다. 그들 가운데는 교토가 황거皇居의 땅이라는 데 기대 생업을 벌여 대대로 먹고 살아온 사람이 많았다. 쿠게 저택 등으로 몰려가 온갖 진정陳情을 하였으리라 추측된다.
나카야마 타다요시中山忠能 경(역주 : 메이지 텐노의 생모인 나카야마 요시코中山慶子의 친정아버지) 같은 경우는 확고한 반대 태도를 드러내며, 다음과 같은 의견서를 내었다.
【 옥좌를 오사카로 옮기는 건 뭇 사람들의 마음을 일신시킬 순 있겠으나, 지금과 같이 인심이 불안할 때에 이와 같이 커다란 변혁을 벌인다면 인심의 향배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나아가서는 천하의 치란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도 가늠하기 힘들다. 굳이 교토가 불편하다면 국정기관들을 오사카로 옮기고, 조정은 지금 이대로 교토에 두는 것도 한 가지 방책이 될 수 있다. 】
논의는 분규紛糾하였으나, 사이고(西鄕, 역주 : 타카모리隆盛)ㆍ키도ㆍ고토(後藤, 역주 : 쇼지로象二郞) 등 유신의 공신들이 모두 오사카 천도를 지지하였기에, 이 방안이 거의 통과되나 싶었다.
그러나 오오쿠보는 의외의 사실을 깨달았다. 신정부에는 돈이 없었다. 서일본의 여러 번들이 그들의 번 체제 그대로 교토에서 텐노를 옹립하고 있었을 뿐, 정부 그 자체에 기초재원도 없는 상태에서 턱없이 많은 지출을 필요로 하는 '천도'라는 대사업을 과연 성사시킬 수 있을까.
물론 불가능했다. 그런 이유로 급작스레 구체적인 색채를 띠기 시작한 것이 '에도 천도론江戸遷都論'이었다.
에도 천도론의 도화선을 당긴 건, 당시 쿄토 이시야쿠시石藥師의 테라마치히가시寺町東로 들어가는 곳에 위치했던 오오쿠보의 사저에 날아든, 익명의 투서였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정말로 로맨틱한 이야기다. 그 문장은 당당하였으며 논지도 명쾌했기에, 이름 없는 시정 사람의 투서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오쿠보 이치조大久保市藏 군 좌하坐下 】라고 관두에 적은 후,
【 요즘 들어 선생께서 천도에 관해 상주 올리신 의견서를 전해준 자가 있어, 삼가 읽어보았습니다. 탁월한 견식과 논의의 성대함에 책상을 두드리며 찬탄하였습니다 】라며 띄워준 후,【 그렇긴 하나 】라면서
【 칸토, 토호쿠의 무사들이 아직도 신정부에 대해 의문을 품고 그 전의戰意가 왕성해 있을 때, 에도의 진무를 팽개치고 제국의 수도帝都를 오사카에 두는 건, 전략ㆍ정략에서 보면 감탄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운수運輸로 보면 오사카가 편리하다고 하나, 이제부터는 일본식 선박의 시대가 아닌 서양식 대형선박의 시대가 될 것이므로, 오사카와 에도의 거리라고 해 봤자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사카로 천도한다면 궁궐宮闕ㆍ관아官衙ㆍ저택第邸ㆍ학교 등을 모두 새로 지어야 합니다. 그러나 에도에는 이 모든 것이 제대로 갖춰져 있습니다.
첨언드리자면, 오사카는 제국의 도읍이 되지 않아도 쇠퇴할 일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도의 경우, 제국 수도로라도 삼지 않는 한 시민들은 사방으로 이산하여, 토카이東海의 썰렁한 도시로 전락해버리겠지요. 국가적으로 봐도 대단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발신자는【 에도의 가난한 무사江戸寒士 】라고 되어 있었다. 기실 이 투서를 쓴 자는 훗날 남작이 된 마에지마 히소카前島密라는 자로, 막부의 신하幕臣였다. 그는 막부의 하코다테 쇼쥬츠시라베쇼函館諸術調所에서 서양학문을 배운, 막부의 젊은 신하들 가운데서도 신지식을 소유한 사람 중 하나였다. 물론 오오쿠보와 면식이 있었던 건 아니다.
오오쿠보는 이 투서를 쓴 자가 마에지마 히소카였음은 전혀 알지 못한 채, 유신 이후 몇 년이 지났다.

일본 우편제도 창설 75주년 기념으로 출시된 마에지마 히소카 우표(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마에지마는 그 학재學才를 높이 산 유신정부에 의해 메이지 2년(1869), 민부성民部省 9등 출사로 채용되었고, 얼마 후 소제이곤노카미(租税権頭, 역주 : 대충 국세청 차장 정도)가 된 후 에키테이곤노카미(駅逓権頭, 역주 : 대충 우편부 차관 정도)를 겸했으며, 우편사업 연구를 위해 영국으로 파견되어 귀국한 후 에키테이노카미(駅逓頭, 역주 : 대충 우편부 장관 정도)에 임명되어 '일본 우편제도의 아버지'라 불리게 되었다
오오쿠보는 훗날에 몇 명의 정부고관들과 유신 전후의 일을 회상하였는데, 문득 생각이 난 듯이 "그 무렵에 묘한 일이 있었지. 나는 오사카 천도를 강경히 권하고 있었는데, 형편이 좋지 않은 일이 산적했기에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가 없었다네. 바로 그 때 한 통의 투서가 날아들어와, 그 문장에 크나큰 감명을 받아 에도 천도를 밀어붙일 수 있었지. 그 문장을 쓴 사람은 도대체 누구였는지 궁금하군." 이라고 말했다.
우연히도 그 코 앞에 마에지마 히소카가 있었다. 그는 공적을 자랑하지 않는 인물이었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동석해 있던 사람이 마침 이에 얽힌 비화를 마에지마에게 들은 바 있던 인물인지라 "그게 이 마에지마 군입니다."고 말하였다. 오오쿠보는 무릎을 탁 치고는, 감탄한 나머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하여 쵸슈ㆍ토슈ㆍ삿슈ㆍ히고(肥後, 역주 : 호소카와 가문細川家. 54만 석) 등 여러 번 병사들의 호위 하에 국새國璽를 지닌 메이지 텐노를 태운 가마가 교토의 궁궐을 떠나 에도를 향해 출발한 건 메이지 원년(1868) 9월 20일 진시(辰時, 오전 7시 ~ 9시)의 일이었다. 에도 성은 이후 도쿄 성東京城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당시, 에노모토 타케아키榎本武揚 / 오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 / 히지카타 토시조土方歳三 등은 하코다테 고료가쿠五稜郭에 농성하여 삿쵸토를 주체로 삼은 서일본의 군대에 저항하고 있었으나, 이미 오슈奧州 아이즈 번会津藩은 항복한 상태였다.
덧글
다만 그렇게 본다면 오오쿠보는 오사카가 수도로 정하기 좋아서가 아니라 애초에 교토에서 수도를 옮길 작정이었는데 그 유력한 대상이 바뀌었을 뿐인 것도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단순히 오사카를 수도로 하자는 의도였다면 에도가 끼어들 여지는 없지 않았을까하고요. 하지만 그런 결론을 내기엔 글의 내용에서 지나치게 벗어난 것 아닌가 싶군요..
당시 오사카의 경우 사실상 교토와 함께 일본 정세를 좌지우지하던 곳이었고, 14대 토쿠가와 이에모치 쇼군이 오사카에 주둔한 이래 15대 쇼군 토쿠가와 요시노부가 오사카를 탈출할 때까진 후방에 방치된 에도를 대신하여 막부의 실질적인 수도로 기능하기도 했습니다. 요시노부의 장래구상인 '다이쿤 제도' 에서도 군현제 아래 중앙집권화된 막부가 새 수도로 삼을 곳으로 오사카가 언급되기도 했고요.
그만큼 반막부파 / 친막부파를 막론하고 당시에는 에도보단 오사카의 비중이 높았고, 또 쌍방은 정권을 장악할 경우 오사카를 수도로 삼으려는 계획을 짜고 있었습니다. 말씀드리자면 오사카는 단순히 '어쨌든 수도를 옮기고 싶어서' 천도논의가 있었다기보단 '오사카만의 메리트'가 있었기에 천도계획이 논의되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말씀대로 제국수도로 리모델링할 만한 재정이 뒷받침했더라면 오사카가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의 새로운 수도가 될 확률은 높았습니다.
그러나 재정이 뒷받침되지 못했고, 당시 신정부가 갓 평정한 에도와 내전이 벌어지고 있던 칸토 / 토호쿠 지방을 평정하기 위해선 텐노가 직접 에도로 행차하여 거기에 주둔하면서 에도와 칸토 지방을 직할통치하는 게 낫다... 는 생각도 한 몫하여 결국은 에도=도쿄가 수도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늘 궁금했습니다. 왜 천도를 에도로 했을까? 막부는 대정봉환으로 이빨 빠진 호랑이이고,
한바츠 세력의 중심지인 초슈, 사츠마하고도 거리가 있는데요.
하지만 이번 글을 읽으니 납득이 되는군요.
재정문제도 있겠지만은, '그러나 에도의 경우, 제국 수도로라도 삼지 않는 한 시민들은 사방으로 이산하여, 토카이東海의 썰렁한 도시로 전락해버리겠지요. 국가적으로 봐도 대단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는 구절에서 오오쿠보는 구 막부세력의 불만의 태동을 감지했던 것을 아닐련지요?
이번 천도 글과 서남전쟁 등에서 막부와 사무라이들의 불만이란 후세대 사람들이 생각했던 이상으로, 상당히 컸던 모양입니다.
메이지 유신이 일본의 근대화를 견인한 성공적인 변혁이었다는 결과론에 의해 간과되는 부분이지만 기실 유신에 의해 당시 직접적으로 득을 본 계층은 거의 없었으며, 신정부의 근대화 개혁들 - 특히 국민개병제 / 폐도령 / 질록처분 - 등에 의해 이전까지의 특권을 빼앗긴 사무라이들과, 무거운 연공부담과 지조개정으로 허덕이던 농민들의 불만은 대단한 것이었죠. "천자는 쇼군보다 못하고 모리는 토쿠가와보다 못하다" 는 슬로건이 메이지 초기에 괜히 유행했던 게 아니었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