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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다테 마사무네와 스리아게하라 전투 (完)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5호(2001년 2월호) p.50 ~ 65쪽의 기사인,《결전! 스리아게하라決戦! 摺上原》를 번역한 것으로, 카와이 히데오河合秀郎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아시나 군의 자멸과 쿠로카와 성 함락

  만전의 포진을 끝낸 (다테伊達) 마사무네政宗는 계속해서 밀려오는 적군을 멀리서 바라보며, 그들이 태세를 완전히 갖추기 전에 먼저 공격하기 위하여 전군을 전진시켰다. 병력적으로는 다테 군伊達軍이 약간 우세했으나 그 차이는 미미했고, 지구전으로 흘러가면 센도스지仙道筋의 사타케 군佐竹軍에게 배후를 차단당할 위험이 있었다. 선제공격을 가하여 먼저 도발挑發한 후 전투로 몰고 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다테 군 본대는 조총수들과 그 뒤를 바짝 따르는 선봉부대를 선두고 전진을 개시했다. 그 우익으로 (다테) 시게자네成実의 별동대가 진출한다. 다테 군은 서쪽으로 뻗은 내리막 비탈을 따라 진군하여, 타카모리 산기슭과의 사이에 있는 움푹 패인 지형을 가도街道가 가르지르는, 언덕 위의 신록에 배치된 아시나 선봉부대에 접근했다. 그리고 오전 8시 경, 아시나 군의 코 앞까지 전진한 전초부대前哨部隊가 사격을 가하여 전투의 막이 올랐다.

센다이 성仙台城 혼마루에 있는 마사무네의 기마상(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다테 군의 사격에 맞서, 전 병력의 3분의 1 이상에 달하는 최대최강의 타격부대인 아시나 군 선봉대를 지휘하는 오오나와 요시토키大縄義辰는 바로 응전할 것을 명령했다. 언덕 위 신록에 배치된 이나와시로 모리타네 부대猪苗代盛胤隊 / 니이쿠니 카즈사新国上総가 지휘하는 나가누마 부대長沼隊 / 카와라다 지부쇼유河原田治部少輔가 지휘하는 히사카와 부대久川隊는 일제히 응사, 격렬한 총격전이 전개되었다.

  모리시게의 본진은 사타케 계열 가신들의 관리하에 있었으나, 요리오야寄親로서 배하의 부대를 장악한 카나가미 모리하루金上盛備나 숙로宿老들이 배제되고 사타케 계열 중신들마저 전선에 동원되었기에, 14세의 (아시나蘆名) 모리시게盛重와 젊고 경험이 부족한 측근들로 채워져 총사령부로서는 전혀 기능하지 못했다. 전황을 판단하고 이에 따른 결단을 내리는 역할은 선봉대 총대장인 사타케 계열 가신 필두인 오오나와 요시토키가 맡고 있었다. 그렇기에 전선의 변동에는 빨리 대처할 수 있었으나 후방에 위치한 부대들은 본진을 경유하여 제어해야만 했고, 그것이 전선과 후방의 연대를 괴리시켜 '유연한 전선부대''대단히 경직되었고, 통제를 상실한 후방부대' 로 양극화되고 말았다.

  다테 군의 선봉을 충분히 끌어들였다고 계산한 요시토키는 선봉에 선 모든 부대들에게 역습할 것을 명했다. 적군에 맞서 반대사면의 배후에서 대비하고 있던 아시나 군은, 사격에 노출되어 대오를 흐트리며 밀고 들어오던 다테 군을 마음껏 격파했다. 선봉 1번대의 최선진을 맡고 있던 이나와시로 모리타네는 부대를 맹렬히 진격시켜 다테 군의 전초부대를 유린한 후, 이나와시로 사람들끼리 싸우는 걸 피해 진로를 약간 오른쪽으로 틀어 카타쿠라 부대片倉隊의 우익으로 돌진했다. 이 침로변경을 따라 후속부대도 진로를 바꾸어, 나가누마 부대는 이나와시로 모리쿠니 부대猪苗代盛国隊와 정면으로 충돌하고 히사카와 부대는 카타쿠라 부대의 좌익으로 쇄도했다. 그 뒤를 따르는 사타케 계열 가신들의 부대도 진격, 완전히 밀리고 있던 이나와시로 군과 카타쿠라 부대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여기에 움푹 팬 지형을 지나 호숫가 방향으로 우회한 카나가미 모리하루의 2번 부대가 좌측 배후에서 밀고 들어왔기에 카타쿠라 군은 일거에 패주하고, 이어서 이나와시로 군도 완전히 무너졌다.

  아군의 선봉대가 좌측에서 무너지기 시작한 모습을 지켜본 마사무네는 친위부대旗本에서 조총수 200여 명을 뽑아 급히 전선으로 달려가게 하고, 친위부대의 좌우를 지키던 오우치(大内, 사다츠나定綱) / 카타히라(片平, 치카츠나親綱) 형제에게도 이나와시로 / 카타쿠라를 응원하라고 명령했다. 조총부대를 지휘하는 타로마루 카몬太郎丸掃部은 몇 년 전에 배반해온 前 아시나 가신이며, 오우치 / 카타히라도 마사무네에게 적대하였다가 귀순한 자들이다. 마사무네는 항복한 무장들에게 관대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조종하는 기술도 젊은이(역주 : 당시 나이 23세)답지 않게 능란했다.

코에이 게임 속의 오우치 사다츠나(출처 :《신장의 야망 창조 PK》갤러리 모드)
결과적으론 마사무네 밑에서 영달하긴 했으나. 그 과정에서 치른 대가가 적지 않은...


  용약하여 전진한 타로마루 카몬은 부하들을 카타쿠라 부대의 후방 - 이나와시로 모리타네의 부대 전면에 위치시켜 그 돌진을 저지하려 했다. 주력부대를 아버지 모리쿠니에게 빼앗긴 모리타네의 부대는 사격전력만 놓고 보면 마사무네 친위대 조총수들의 적이 아니었다. 이윽고 모리타네는 중상을 입고, 그 부하들은 뿔뿔이 흩어져 패주했다. 그러나 다테 군의 고전은 계속되었다. 카타쿠라 부대는 어쨌든 태세를 바로잡았지만, 중앙에서는 나가누마 부대와 히사카와 부대가 전장을 휘젓고 있었다.

  이러한 전황은 아시나 군의 실질적인 총지휘관인 요시토키를 경악하게 했다. 부대지휘관을 맡은 경력은 있으나 만 단위 군대를 지휘해본 경력이 없는 요시토키는, 제어하기 힘든 토자마外様 영주들을 한정적인 반격임무에 투입하려다 폭주시키고 만 것이다. 아시나 군 선봉의 여러 부대는, 이제 지휘관인 요시토키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의 기세를 몰아 무너져 도망치는 다테 군을 바싹 뒤쫓던 끝에, 공세한계를 무시하고 미쳐 날뛰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지구전으로 돌아갈 순 없다. 이미 다테 군 쪽에선 오우치 / 카타히라 양 부대가 진격하여 반격을 개시, 돌출한 아시나 군을 양익에서 죄어 들어가고 있었다. 계속 진격하지 않으면 파국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양극으로 분화된 아시나 군은 그 결함을 드러냈다. 선봉부대의 2번대와 3번대인 카나가미 / 사세(佐瀬, 겐베에 타네츠네源兵衛種常)의 부대는 전투를 벌이고 있었으나, 그 뒤를 따라야 할 후속부대는 멀찌감치 떨어진 후방에서 꾸물대고 있었기에, 전투국면이 전환점을 맞은 이 순간에도 소모되지 않은 병력을 투입시키는 걸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것이다.

  아시나 군 후속부대의 움직임이 뚝 멎어버린 원인은, 이 난전 속을 비집고 산 속을 따라 크게 우회했던 다테 시게자네의 별동대 때문이었다. 아시나 군의 본진 가까이까지 진출한 시게자네 부대는, 행군대형 그대로 진격하던 히라타平田 / 토미타富田 / 마츠모토松本 세 부대에게 갑자기 발포를 시작했다. 전혀 전투대형을 갖추지 못했던 이 세 부대는 병력적으로 우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혼란에 빠져, 태세를 바로잡기 위해 본진보다 후방으로 후퇴했다. 적이 후방 깊숙히 우회하도록 허용하는 모습을 보임에 따라, 최전선에서의 아시나 군 우위는 후방의 패퇴로 인해 상쇄되었다.

  이것이 아시나 군 전체의 전의戰意를 크게 손상시켰다. 전선에선 잇달아 신병들을 투입해 줄 것을 요청해왔으나, 후방의 부대는 '사천 숙로四天宿老' 부대 중 세 부대가 패퇴했기에 전진을 망설이며, 본진에서 파견된 사자가 아무리 독촉해도 움직이지 않았다. 전의 저하 / 전황의 혼란 / 가신들 사이에 만연한 상호대립이 박차를 가하여, 그렇지 않아도 통솔력이 없던 본진에서의 요구는 깡그리 무시당했다. 모리시게의 손에 남아있는 제대로 된 전력은 이제 호위 기마무사들(우마마와리馬廻衆) 뿐이었다.

  여기에다 더욱 치명적인 광경이 벌어졌다. 닛파시 강日橋川에 있는 다리가 검은 연기를 내며 불타기 시작한 것이다. 쿠로하바키구미黒脛巾組들 중에서 선발된 별동대에 의한 파괴공작이었다. 별동대는 교량의 방화로 아시나 군 후속부대들이 눈에 띄게 동요하기 시작하는 걸 보고, 이 순간을 노려 유언비어를 외치고 다녔다. "세 숙로가 배신했다!" 는 건, 그들 부대가 쉽게 패퇴해버린 것과 그 이후의 소극적인 움직임을 훌륭히 설명해주었기에, "세 숙로가 배신하여 교량을 방화했다!" 는 살까지 입혀져 순식간에 아시나 군 전체로 파급되었다.

  아시나 군은 본진 주변에 배치되어 있던 예비부대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흔히 말하는 '후방 붕괴' 이다. 배신자로 지목된 히라타 / 토미타 / 마츠모토 세 부대는 서로에게 품게 된 의심암귀疑心暗鬼에 빠져 차례대로 전선을 이탈했고, 카나가미 가문과의 감정적 대립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던 하리우 모리노부針生盛信도 현 위치를 버리고 도주했다. 거물급 가신들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그 뒤는 통제할 수가 없었다.

  후속부대의 패주로 인해 공세한계점을 넘은 선봉부대도 드디어 힘이 다해, 아시나 군은 완전히 무너졌다. 2번대 대장 카나가미 모리하루 / 3번대 대장 사세 겐베에 / 前 니혼마츠 성주二本松城主 하타케야마 요시츠나(畠山義綱, 요시츠구義継의 아들 쿠니오마루国王丸)들은 후퇴 도중 시게자네의 부대에게 퇴로가 차단되면서 모두 목숨을 잃었다. 추격을 뿌리치고 본진에 도착한 요시토키는 쿠로카와에 농성하며 요시시게의 원군을 기다리자고 모리시게를 설득, 후미부대를 자처한 토미타 쇼겐富田将監이 친위대 선봉 5백여 명을 이끌고 적중으로 돌격함과 동시에 철수를 시작했다. 이 친위부대의 반격에 힘입어 모리시게 주종은 무사히 쿠로카와 성黒川城까지 도망쳐 돌아갈 수 있었으나, 전장에 남겨진 토미타 쇼겐은 타로마루 카몬의 목을 베는 분전 끝에 전사했다고도, 전장을 이탈했다고도 전해진다. 이 친위부대의 반격을 마지막으로 아시나 군의 조직적 저항은 끝이 났다.

에도 시대 말엽 아이즈 번주의 명령으로 세워진 삼충비三忠碑(출처 : 이나와시로 관광협회)
카나가미 모리하루와 사세 겐베에 부자父子의 죽음을 기리는 비석이다.


  그러나 싸움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3천 명에 달하는 아시나 장병들의 목을 벤 대승으로 기세를 탄 다테 군은 다음 날인 6일에 시오카와塩川에 도달하였고, 요네자와 가도米沢街道를 남하해 온 별동대와 7일에 합류, 주변 지역을 점령하였다. 쿠로카와 성에 틀어박혀 있던 모리시게 주종은 패주한 장병들의 태반이 도주해버렸기에 수비병력을 확보하는 데 실패, 10일 야밤에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다음 날인 11일, 마사무네는 텅 빈 쿠로카와 성을 무혈점령했다. 아시나 군의 세력권이던 아이즈会津 / 오오누마大沼 / 카와누마河沼 / 야마耶麻 4군의 태반이 마사무네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아이즈 내륙지방 평정작전은 가을까지 지속되었으나, 아이즈 공략작전의 주된 목적은 스리아게하라 격전으로부터 고작 6일만에 성취한 상태였다.


  전략戰略의 승리와 정략政略의 승리

  그 동안 (사타케佐竹) 요시시게義重 / 요시노부義宣 부자는 끝내 병사를 움직이지 못했다. 하필 그 때 악천후가 겹치면서 정보수집에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요시시게는 끝까지 다테 군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했고, 다테 군 주력을 발견하였다는 소식은 그대로 아시나 군 대패의 흉보가 되었다. 마사무네의 의도와 행동을 9할 정도까진 예측했으면서도 그 신속한 결단과 기민한 행동에 대응하지 못하고 요시시게는 완전히 불의의 일격을 맞은 것이다. 43세의 요시시게는 (다테) 하루무네晴宗 / 테루무네輝宗를 모방하여 이미 텐쇼 15년(1588) 경에 은거했었으나, 이번의 패전은 실질적으로도 은거를 의식할만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후에 벌어졌다.

  아이즈 공략의 기세를 탄 마사무네는 스카가와 성須賀川城을 함락시켜 니카이도 가문二階堂家을 멸하고, 反 마사무네 연합에 가담한 여러 다이묘들과 주변의 반항적인 다이묘들을 굴복시켰다. 아이즈 점령과 이에 따른 중소영주들의 복속으로 마사무네의 세력권은 대략 190만 석까지 불어났다. 당시 여기에 견줄 수 있었던 건 호죠 가문北条家 뿐으로,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權 내 최대의 다이묘였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도 150만 석이 안 되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텐카비토天下人인 (토요토미豊臣) 히데요시秀吉와 겨루기에는 마사무네의 이 세력권은 너무나 어중간했다. 호죠 가문과 연대한다손 치더라도 이미 호쿠리쿠北陸 / 코신甲信 / 토카이도東海道 이서지역을 모두 지배하에 둔 히데요시의 세력과는 격차가 너무 심했다. 그리고 제압한지 얼마 되지도 않는 무츠 남부지방은, 지배력이 굳어지기 전까지는 즉시전력으로서 기대할 수도 없었다.

  요시시게는 이 상황을 교묘히 활용했다. 마사무네가 세력권을 완전히 장악하기 전에 히데요시가 호죠 토벌에 나서리라 본 요시시게는 마사무네의 히타치常陸 침공 위협을 역으로 이용하여, 아이즈 공략을 '소부지레이 위반惣無事令' 이라 호소하고 다테 가문과 호죠 가문 사이의 연대를 넌지시 지적했다. 압도적인 히데요시의 세력을 등에 업고서 마사무네가 전략적 승리로 삼킨 것들을 정략으로 뱉어내게 하려던 것으로, 결국 모든 것은 요시시게의 의도대로 돌아갔다.

히데요시에게 복속하는 마사무네(출처 : NHK 대하드라마《독안룡 마사무네》)
마사무네에게서 몰수한 아시나 가문의 옛 영지는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鄕에게 주어졌다.


  마사무네는 천재적이라고 해야 할 직감으로 전략상의 최량수를 선택하여 소소한 전술적 실패를 어려움 없이 뒤집고 승리를 거두었으나, 아직 나이가 어렸기에 외교外交에선 요시시게의 노회함을 당할 수 없었다. 히데요시로부터 아이즈 공략을 문책받자 반발하여 오다와라 전역小田原の陣에 늦게 참전한 마사무네는, 스리아게하라에서 일전을 벌여 획득한 모든 것을 상실하고 만다. 마사무네는 이 경험에 의해, 전략적인 승리가 보다 상위에 위치한 정략에 의해 뒤집힐 수도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었다.

  훗날 노회한 권모가權謀家로 거듭나는 마사무네는, 다테 가문 누대의 부자대립과도 유사한 노회함 vs 젊음이 부딪히는 다툼 속에서 요시시게로부터 그러한 재능을 학습하게 되는 것이었다. 


덧글

  • 2017/11/22 21:1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11/22 22:5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진냥 2017/11/23 02:42 # 답글

    다테 마사무네는 과대평가되었다라는 평판이지만, 이 글을 읽으니 그렇게까지 과대평가는 아니라는 기분도 드는군요. 시대를 조금 늦게 태어난 탓일까요....
  • 3인칭관찰자 2017/11/23 11:43 #

    노부나가의 득세로 전국시대 대세가 정해져 가던 무렵에 태어나, 히데요시가 일본의 절반 가까이를 통일했던 시기(당시 나이 18세)에 세력확장을 시작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마사무네는 야망을 달성하기엔 너무 늦게 태어났던 것 같습니다. 벽지인 토호쿠 지방에서 태어난 것도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했으려나요.

    마사무네는 전국시대 인물들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지는 인성문제 때문에 개인적으론 그닥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젊은 시절에 보여준 실적만 봐도 과대평가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ㅎㅎ
  • 키키 2017/11/23 21:29 # 답글

    잘봤습니다 ㅎㅎ 재밌었어요.
    다테에 대해서는 '과대평가 되었다', '허세만 부린다'라는 주장이 있는데, 저는 이런 것들에 하나도 동의 못합니다. 이번 편의 스리아게하라 전투도 그렇고, 이후 정략적인 면에서 서쪽의 다이묘들을 상대하는 일이라든지 도쿠가와와 적당히 줄다리기를 하며 말년에 쇼군가의 숙로로 거듭나는 일들은 전혀 허세나 과대평가가 아니거든요. 후발주자로서 치열하게 살아왔고, 보신을 위하여 독특한 행동을 취한 것일뿐. 그가 결과적으로 얻어낸 것들은 전국 다이묘에 적합한 것이었지요.

    다테 이야기는 정말 무궁무진한데, 다음에도 관련 글을 봤으면 좋겠습니다.
    끝까지 번역해주셔서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ㅎㅎ
  • 3인칭관찰자 2017/11/24 18:13 #

    재미있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했을 때 고작 24세였던 마사무네는 이후 45년을 더 살면서도 전장에서 활약할 기회(오오사키 카사이 잇키 진압 / 제 2차 진주성 전투 /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우에스기 영지 침공 / 오사카 여름 전쟁 토묘지 전투 정도)는 많이 부여받지 못했는데 그 전에 무츠 남부를 한번 평정한 것만 감안해도 과대평가되었다고 하긴 힘들죠.

    세키가하라 당시에 우에스기 영지를 침공했을 때는 이기지 못한 적이 많았지만 당시 우에스기의 코쿠다카(약 120만 석)가 마사무네(약 58만 석)의 2배 이상이었던 걸 감안해야 한다 봅니다.

    그리고 히데요시와 토쿠가와 쇼군들을 섬기면서 적지 않은 경계와 견제를 받았고, 숙청되거나 카이에키당할만한 위기도 평생 5~6번 이상 겪었는데도 본글에서 언급한 영지삭감 외엔 1591년 (오오사키 카사이 잇키 배후조종혐의로) 영지를 1번 이전한 걸 제외하면 언제나 무난하게 위기를 모면한 위기관리능력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방심할 수 없는' 인물이면서도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같은 거물의 호감을 얻게 한 능란함도 그렇구요.

    요즘 토호쿠 지방 역사에 관심이 많아진지라 기회되면 다음에 다른 글도 블로그에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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