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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다테 마사무네와 스리아게하라 전투 (5)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5호(2001년 2월호) p.50 ~ 65쪽의 기사인,《결전! 스리아게하라決戦! 摺上原》를 번역한 것으로, 카와이 히데오河合秀郎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스리아게하라 전투 - 요시시게의 우유부단優柔不斷과 아시나 군의 맹공猛攻]

  아이즈 침공작전

  이 좋은 기회를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위해 (다테伊達) 마사무네政宗가 입안한 작전은 양동, 그리고 주력군의 소재 비닉에 힘입어 적을 농락한다는, 노부나가나 히데요시에 필적하는 대기동전이었다.

  우선 센도스지를 남하하여 타카타마 성高玉城 / 아코가시마 성安子ヶ島城을 공격, 만약 저항해온다면 이나와시로에 대한 공갈도 겸한 나데키리(撫で斬り, 역주 : 모두 죽임. 구성원 전원을 도륙)를 하여 일거에 공략한다. 이 작업이 완료된 후 주력은 소마 씨相馬氏의 영지 쪽으로 방향을 돌려 사타케 요시시게佐竹義重 / 요시노부義宣와 아시나 모리시게蘆名盛重의 주의를 아이즈会津 방면에서 돌리게 하고, 모리쿠니의 내통을 기다리면서 연합군을 스카가와 성須賀川城에 집결시키게 한다. 특히 아시나 군을 센도스지仙道筋로 끌어내는 것이 핵심으로, 그들이 타카타마 / 아코가시마 두 성의 탈환에 나선 때를 노려 (이나와시로) 모리쿠니盛国를 배반시킨 후 소마 씨와의 접경 부근에서 다시 회군하여 연합군과 대치하려는 척 하다가 몰래 이나와시로猪苗代로 입성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요네자와(米沢, 역주 : 데와 오키타마 군出羽置賜郡에 있던 당시 다테 가문의 본거지)에 대기시켜 놓은 별동대에게 요네자와 가도를 남하하게 하여 동쪽과 북쪽 두 방면에서 쿠로카와 성으로 진격, 아시나 군이 부재한 본성을 공략한다.

현재 요네자와 시에 있는 우에스기 신사上杉神社(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요네자와는 에도 시대(1603~1867) 내내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의 본거지로 기능했다.


  이 작전에서 특히 중요한 건, 요시시게들에게 다테 군 주력이 소마 / 센도 방면으로 향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나와시로로 주력이 이동한다는 것을 숨기는 이상으로, 소마와의 접경지역과 아사카 군에는 오히려 자기들의 소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연합군 측이 움직임을 파악하게 해야만 한다. 그러한 점에선 모든 것이 마사무네가 의도한 대로 진전되었다.

  텐쇼 17년(1589) 4월 22일, 다테 군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오모리 성大森城에 입성한 마사무네는 일단 여기서 병마를 쉬게 한 후, 5월 3일 일거에 남하하여 모토미야 성本宮城으로 들어가 카타쿠라 코쥬로 카게츠나片倉小十郎景綱 / 다테 토고로 시게자네伊達藤五郎成実 / 오우치 비젠노카미 사다츠나大内備前守定綱 / 사다츠나의 동생 카타히라 스케에몬 치카츠나片平助右衛門親綱에게 아코가시마 / 타카타마 두 성을 공격하게 했다. 다테 군의 압도적인 우세 앞에 아코가시마 성은 다음 날인 4일에 성문을 열었으나, 타카타마 성은 무모한 저항을 벌이다 다테 군의 맹공 앞에 5일자로 함락되었고, 그 직후 성내에 생존해있던 자들은 모두 살해당했다.

  고작 이틀만의 전투로 두 성을 손에 넣은 마사무네는 방향을 돌려 소마 씨와의 접경지대로 진군했다. 다테 군이 질풍노도의 기세로 전진転進한 것을 알게 된 아시나 모리시게는, 마사무네가 기대한 대로 아코가시마 / 타카타마를 탈환하기 위해 이나와시로 호수猪苗代湖 남쪽 강변을 우회하여 27일 스카가와에 집결했다. 사타케 군의 도착을 기다려 북상할 계획이었다는 건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장남 요시노부에게 사타케 동가佐竹東家의 부대를 인솔시켜 스카가와로 들여보낸 후에도, 요시시게는 주력을 시라카와 성白河城에서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오오나와 요시토키大縄義辰에게서 "이나와시로 부자의 대립은 타협의 여지가 없다" 는 사실을 보고받았던 요시시게로선, 마사무네의 진의가 이나와시로 진출이라는 점 정도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1991년 복원된 시라카와 코미네 성白河小峰城 3층 망루(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토호쿠로 통하는 관문과 같은 곳이라 보신전쟁戊辰戦争 때 여기서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소마로 방향을 돌린 다테 군이 얼마 안 가 회군해 올 거라면, 섣불리 아코가시마 / 타카타마를 탈환하려고 움직였다간 다테 군에게 배후를 급습당하게 될 것이다. 그보다는 다테 군 주력이 이나와시로를 지나 쿠로카와로 전진할 때를 노려 아시나 군을 쿠로카와로 돌려보내는 동시에, 사타케 군과 연합군의 잔여병력이 북상하여 아코가시마 / 타카타마를 탈환하여 그 상태로 동쪽에서 이나와시로 영지에 난입, 아이즈 분지에서 다테 군을 포위하는 쪽이 마사무네와 다테 군을 확실히 포착하는 방법이었다.

  만약 마사무네가 주력을 움직이지 않는다 해도, 쿠로카와로 돌아간 아시나 군이 서쪽에서 이나와시로 성을 공격한다면, 다테 군 주력은 구원을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순간을 노려 사타케 군 주력을 스카가와로 전진시키면, 마찬가지로 결전으로 몰고 갈 수 있게 된다. 요시시게의 계산대로 사태가 흘러간다면 다테 군은 어느 쪽을 취하든 이나와시로를 중심으로 연대한 사타케 / 아시나 군에게 측면공격을 받거나 협공당할 운명이었다.

  요시시게의 꿍꿍이를 알 리 없는 마사무네는 6월 1일, 소마 가문과의 접경지대에서 모리쿠니가 보낸 자로부터 내통을 승낙하는 답변을 듣고, 카타쿠라 카게츠나 / 다테 시게자네의 부대를 차례대로 먼저 출발시켰다. 그와 동시에 요네자와에도 사자使者를 보내 별동대에게 요네자와 가도를 남하할 것을 명령했다. 마사무네 자신은 3일 해가 진 후 중신들의 반대를 억누르고 빗속의 야간행군을 감행하여 스카가와에 집결중이던 아시나 / 사타케 양군의 코 앞을 통과, 4일 오후에는 주력부대와 함께 이나와시로 성에 입성했다. 아시나 군이 스카가와에 묶여있는 동안에 예정대로 일거에 쿠로카와 성을 공략할 의도였다.

  다테 군의 이러한 움직임 중에서 카타쿠라 부대의 동향은 3일 중으로 아시나 측에 포착되었다. 모리시게는 다테 군 주력이 이나와시로에 들어가기 전에 선제공격을 하여, 카타쿠라 부대와 이나와시로 모리쿠니를 피의 제물로 삼을 목적으로 아시나 전군을 이끌고 쿠로카와 성으로의 귀로에 올랐다. 요시노부가 이끄는 사타케의 선견부대는 요시시게의 북상을 기다리며 예정대로 스카가와에 계속 머무른다. 요시노부가 마사무네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대로, 그 보고를 따라 요시시게와 사타케 주력군은 북상하여 스카가와의 연합군과 합류하게 될 터였다.

  그러나 6월 3일, 4일 양일에 걸쳐 쏟아진 호우로 인해 양군은 그 후의 적 동태를 잘못 파악하게 되었다. 요시시게는 다테 군의 선견부대가 이나와시로에 입성했다는 사실과 다테 군의 주력부대가 모토미야 성에 집결했다는 것을, 마사무네는 아시나 군을 포함한 연합군 주력이 스카가와에 집결해 있으며 아직 요시시게가 거기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탐지했을 뿐, 그 정보는 쌍방에 있어서 불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적정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음에도 이 시점에서 마사무네는 요시시게 부자를 완전히 따돌렸다고 결론지었고, 요시시게는 판단을 내리길 보류했다. 이 차이가 그 후 양군의 대응격차를 결정적으로 만들게 된다.

이나와시로 호수를 수원으로 삼는 닛파시 강 일부(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아시나 군의 움직임을 알리는 정보는 거의 하루 늦게 마사무네에게 도달했다. 5일 새벽이 되어서 아시나 군이 쿠로카와로 철수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된 마사무네는, 그날 내로 쿠로카와 성에 육박하기 위해 전군에 아침 일찍 출진하도록 명령했다. 사타케 군이 움직이기 전에 아시나 군을 따돌리고 쿠로카와 성의 숨통을 틀어막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출진 직전,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다. 아시나 군이 이미 닛파시 강日橋川을 건너 타카모리 산高森山 부근에 집결중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야 쿠로카와 성에 연연할 때가 아니다. 마사무네는 아시나 군과 결전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반다이磐梯 산기슭에서의 대진

  5일 이른 아침, 반다이 산기슭을 따라 서쪽으로 향한 다테 군은 스리아게하라摺上原 부근 타카모리 산에 포진한 아시나 군과 대치했다. 고지대 완사면緩斜面에 위치한 1만여 명의 다테 군에 맞서, 시냇가가 흐르는 움푹 패인 땅을 둘러싼 타카모리 산 부근에 배치된 아시나 군도 숫자는 대략 비슷했다. 그러나 닛파시 강을 등지고 타카모리 산 부근에 부대를 배치한 아시나 군은, 의도치 않게 배수진을 친 형국이었다.

  센다이 번의 정사正史인《테이잔코우지케키로쿠貞山公治家記録》이 인용한 <키무라우에몬오보에가키>에 따르면, 스리아게하라 전투에서 다테 군은 크게 두 부대로 갈라져있었다. 한 부대는 이나와시로 군과 카타쿠라 카게츠나 부대를 선봉으로 내세운 본대로, 그 전면에는 조총병만을 엄선한 100여 명의 조총부대가 전초부대로 배치되었다. 일체가 되어 싸우라는 명령을 받은 이나와시로 군과 카타쿠라 부대는 그 바로 뒤로 진격하여 적을 정면에서 구속한다.

  다른 한 부대는 다테 시게자네 부대와 친위대 일부에다 친위대의 조총집단에서 분견되어 온 5~60여 명의 조총수들로 전초부대를 보강한 별동대였다. 본대가 정면에서 적을 구속하는 동안, 산기슭의 고지를 우회하여 후방으로 진출, 조총수들을 앞세워 아시나 군의 후위를 속박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마사무네의 사촌동생 다테 시게자네(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이들 실전부대 외에 마사무네는 또 하나의 별동대를 준비해놓았다. 쿠로하바키구미黒脛巾組 중에서 선발한 소수의 파괴공작 부대였다. 이 부대는 닛파시 강에 설치되어 있는 교량을 파괴하여 아시나 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호숫가를 따라 우회하여 적군에게서 멀리 떨어진 후방으로 침투하게 되었다. 최단경로가 차단당하면 아시나 군은 닛파시 강을 북서쪽으로 우회할 수밖에 없어지므로, 다테 군은 정면공격만으로도 아시나 군을 포위할 수 있게 된다. 양군이 거의 길항하고 있다고 할 때, 교량을 방화하는 건 아시나 군의 전의를 짓부수고 승패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한편, 타카모리 산에 본진을 치고 선봉부대를 그 북동쪽까지 진출시켜 놓은 아시나 군은, 다테 군 주력의 출현이라는 예상 외의 사태에 깜짝 놀랐다. 카타쿠라 부대와 모리쿠니를 공격해 죽이려 했던 모리시게의 계획은 힘없이 무너져내렸다. 요시시게의 뜻에 위배되는 모리시게의 계획을 저지하지 못하던 오오나와 요시토키는 이로서 다시 주도권을 찾아와, 요시시게의 본래 전략에 기반해 사타케 군 주력이 센도스지에서 공세에 나설 때까지 버텨내기 위해, 전군의 포진을 수정하려고 했다. 이나와시로로 진격하고 있던 아시나 군은, 이 지역의 영주인 이나와시로 모리타네猪苗代盛胤의 부대를 선봉으로 타카모리 산을 둘러싼 채로 가늘게 늘어서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코에이 게임 속의 이나와시로 모리타네(출처 :《신장의 야망 창조 PK》갤러리 모드)


  모리시게의 참모 겸 아시나 군 선봉부대 총대장이었던 오오나와 요시토키는, 이나와시로 모리타네 / 카와라다 지부쇼유河原田治部少輔 / 니이쿠니 카즈사노스케新国上総介 같은 도자마外様 영주들과, 사타케 계열 가신들로 이루어진 지휘하의 부대를 전진시켜 타카모리 산의 안쪽 해자 역할을 하는 움푹 패인 지형으로 내려가는 언덕을 점거하려 했다. 이곳은 스리아게하라의 전술상 최중요지로, 이 언덕의 위쪽 끄트머리를 차지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성城에 성문이 설치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의 차이만큼이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적에게 밀리게 될 경우 마지막 반격의 발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요시토키는 후다이 신하들과 긁어모은 로닌들로 구성된, 카나가미 모리하루金上盛備가 지휘하는 선봉 2번대를 움푹 팬 지역 속에 배치시키고, 숙로宿老 사세 겐베에佐世源兵衛와 그 요리키인 케이토쿠 젠고로慶徳善五郎 / 나카노메 시키부中目式部 / 누마자와 이즈모노카미沼澤出雲守 등, 그들 대부분이 아시나 가문의 親 사타케 파 후다이 가신들로 구성된 선봉 3번대를 그 좌측 후방으로 전진시켰다. 이로써 선봉부대는 모두 움푹 팬 지형으로 들어가, 다테 군의 시야에서 모습을 감추게 된다. 언덕의 위쪽 끝을 점거한 이나와시로 모리타네의 병력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반사면反射面 진지를 확보한 것이다. 싸움을 결전으로 몰아가려고 전진하는 다테 군에 맞서 이런 반사면에 기댄 부대들이 자세를 낮춰 사격을 퍼부어, 그 의도를 분쇄하고 지구전으로 몰고 갈 의도였다.

  세 부대로 이루어진 선봉부대의 후방은 타카모리 산기슭의 친위부대로, 이 부대는 토미타 미마사카富田美作의 장남 토미타 쇼겐富田将監이 선두에 서고, 본진과 호위 기마무사馬廻り 쪽은 오오나와 요시토키의 아들인 요시치로与七郎가 장악하고 있었다. 친위부대와 선봉부대는 모두 스카가와에서 이리로 온 부대로, 다테 군 주력 이상으로 피로해져 있었으나 전의가 대단히 높은 아시나 군의 정예부대였다. 반면 전군의 3할 정도에 달하는 후방부대들은 모두 모리시게가 스카가와로 출진한 도중에 성을 지키면서 충분히 휴식한 부대들이었으나, 전의에 있어선 선봉과 친위대에 크게 미달했다. 히라타平田 / 토미타富田 두 숙로들과 마츠모토 일족松本一族은 모두 사타케 가신단들과 관계가 나빴고, 거기에다 토미타 일족과 마츠모토 일족 간의 대립도 한몫하여 이미 아시나 군의 전방부대가 전투대형을 갖춘 후에도 여전히 본진 후방을 행군하던 중이었다.


덧글

  • 키키 2017/11/18 16:54 # 답글

    중간중간 사진설명에는 막말 이야기가.. ㅋㅋ

    잘 읽었습니다 ㅎㅎ
  • 3인칭관찰자 2017/11/18 19:38 #

    감사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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